미술계의 남성중심주의를 논파한 획기적 논문, 그리고 3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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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의 남성중심주의를 논파한 획기적 논문, 그리고 30년 후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1.17 0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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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 린다 노클린 지음 | 이주은 옮김 | 아트북스 | 128쪽

 

페미니즘 미술사는 역사 속 여성 미술가들이 소외되어왔고 그 이유가 미술계의 남성중심주의에 있다는 전제하에 미술사에 젠더 관점을 도입해 미술교육, 제도, 문화 전반을 재검토하는 미술사 연구의 흐름이다. 그러한 페미니즘 미술사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논문이 바로 린다 노클린이 1971년에 미술 학술지 『아트뉴스』를 통해 발표한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이다.

이 글에서 노클린은 여성 미술가를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던 미술계의 관행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명화’를 탄생시키는 사회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이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위대함’을 중심으로 한 미술계의 낡은 담론을 뒤흔들었다. 이후 작품과 작가에 내재하는 천재성의 신화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맥락에서 미술가와 작품을 비평하는 미술사학자 세대가 배출되기 시작했고, 여성 미술가들은 ‘여성성’이라는 틀에 맞추려는 평단에 맞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거리낌 없이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노클린의 획기적인 논문 발표 50주년을 기념하며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와 2006년 『밀레니엄 시대의 여성 미술가들』에 실린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30년 후」를 함께 소개한다. 캐서린 그랜트는 「머리글」에서 두 에세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밝힌다. 또한 본문에 배치된 컬러 도판이 독자의 이해를 돕고, 미술가 주디 시카고와 미술사학자 그리젤다 폴록의 추천사가 린다 노클린의 학문적 성과를 뒷받침한다.

특히 우리말로 처음 번역 발표되는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30년 후」는 퀴어 이론, 인종 및 포스트콜로니얼 연구와 더불어 페미니즘이 번성하는 시대에 쓰인 만큼 완전히 새로운 규범의 출현을 반영하고 있어, 페미니즘 미술사가 걸어온 길과 그 성과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가 당시 화제가 된 까닭은 미술사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자연스럽다’라고 여겨온 가정들을 뿌리째 흔들었기 때문이다. 노클린은 미술관에는 ‘여성을 그린’ 그림은 많고 많은데 왜 ‘여성이 그린’ 그림은 없는지 질문하고, 미술사에서 명화를 가리는 기준이던 ‘위대함’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파헤친 첫번째 연구자였다. 이 질문은 1960년대 말부터 진보사상과 페미니즘의 흐름이 형성되는 가운데 학계의 자기 반성적 노력과 함께 제기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논문은 명실공히 페미니즘 미술사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여성의 창작을 장려하고, 여성의 공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여성 미술가의 정당한 대우를 위해 투쟁하는 페미니즘미술운동이 부상했다. 주디 시카고, 마리엄 샤피로 등 노클린의 글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페미니즘 미술가 외에도 많은 미술가가 작품 생산과 공적 발화를 통해 여성의 미술에 대한 편견과 무지를 깨뜨림으로써 노클린의 질문과 공명했다.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는 ‘위대함’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배경을 추적하며 시작한다. 남성 천재 미술가 신화가 만연한 가운데 제도적으로 확립된 미술교육은 ‘자연스럽게’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미술계의 남성들은 서로를 후원하고 지지하며 여성 화가의 존재를 주변부로 소외시켰다. 여성에게 누드 드로잉 수업이 금지되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 유명한 앙겔리카 카우프만도 런던 왕립미술원 단체 초상화에 그림으로밖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여성 미술가들은 어렵게 그 실력을 인정받아 제도권 미술교육기관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단지 예절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본적인 미술교육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불평등에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대중문화도 한몫했다. 19세기에 출간된 한 조언서에는 여성은 그의 본분인 가정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창작활동을 해야 한다는 조언이 담겨 있다. 게다가 여성 미술가는 단지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술작품의 질적인 차원을 높이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단순히 소모적인 투쟁”을 겪게 된다. 내적 강박이다.

2006년에 발표된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30년 후」에서 노클린은 그동안 일어난 미술계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꺼이 축하하며 여성 미술가가 바꿔놓은 풍경을 넓게 조망한다. 이제 많은 사람이 “여성 미술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쳐다보고, 표시해”두는 시대가 온 것이다.

노클린은 루이즈 부르주아, 메리 켈리, 신디 셔먼 등의 작품을 분석하며 여성의 위치와 미술의 관계를 진단하고. 마야 린, 카라 워커, 제니 홀저, 레이철 화이트리드의 작품을 통해 여성이 어떠한 질문과 작품세계를 통해 공적 공간으로 진입하는지 정밀하게 비평한다. 이 에세이는 희망적인 전망을 가득 담고 있는 듯하지만, 노클린은 아직까지 미술계의 주요 연사는 백인 남성이고 여성이 그의 말을 듣는다는 현실을 꼬집으며 더 나아가기를 호소한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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