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태평양을 건너 시애틀로 간 우리 책 44종의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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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태평양을 건너 시애틀로 간 우리 책 44종의 숨겨진 이야기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1.17 0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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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대학의 한국 책들: 동아시아도서관의 보물 1900-1945  이효경 저 | 유유 | 514쪽

 

1900년부터 1945년 사이, 이 시간은 우리나라 출판 인쇄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시간이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세계사에 전례 없는 기록문화를 가졌지만 조선의 인쇄소는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기관이었다. 필사본 외에 대중 출판물이 드물었던 이 시기와 한글 사용이 강제로 억압됐던 일제 식민지 치하라는 특수한 시기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어떤 책들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출간되어 누구에게 읽혔을까?

이 책에는 이 시기에 출간된 책 44종이 담겨 있다. 이 책들의 소장처인 워싱턴대 동아시아도서관은 북미(미국과 캐나다) 14개 한국학 도서관 가운데서도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다음으로 많은 한국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44종을 가려 뽑았는데,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한 책이어서라기보다 책에 얽힌 갖가지 사연과 의미가 이 책을 고른 사서 개인의 선택 알고리즘을 통과한 결과다.

일제의 식민 지배시기였던 만큼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는 책들이 단연 눈에 띈다. 근대 시민으로의 계몽, 자주 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책들에 러시아, 인도 등 번역서들이 다채로움을 더하고, 한자에서 국한문 혼용, 한글 인쇄로 넘어오는 인쇄 환경의 변화도 실감할 수 있다. 20년 넘게 미국 대학도서관에서 한국학 사서로 일해 온 저자 이효경은 자신의 마음과 이목을 끈 책들을 골라 책을 통해 시대와 그 시대 사람들의 근경과 원경을 보여준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미국에서 한국학 사서로 일한 저자 이효경 사서가 여기 소개한 책들을 고른 이유는 다양하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보여서, 그 가치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책이어서, 미스터리로 남은 손 그림이 인상적이어서, 저자의 소중한 필체와 따뜻한 메시지가 남아 있어서, 내용이 파격적이라서, 유명인의 손길이 닿은 모던한 표지 디자인 때문에, 삽화가 좋아서, 심하게 작거나 너덜너덜해서, 많이 팔린 책이라서, 기획 아이디어가 기발해서, 저자의 굽이진 인생이 애달파서, 저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속지로 쓴 종이가 너무 곱고 예뻐서, 누군가 몰래 남긴 낙서가 재밌어서, 누구나 다 아는 책이라서 등 사서가 책을 펼칠 때마다 책갈피에 오래 숨어 있던 이야기들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린다.

그럼에도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당대의 화두가 책으로 남는 만큼, 이 시기의 책들은 다급한 당시의 시대적 요청을 담은 책이 많다. 1900년대 초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근대 지식을 담은 계몽 도서들. 근대 공교육의 시작과 함께 어린이 교육용 도서로 출간된 『유몽천자』나 『초등소학』이 그런 책이다. 『아학편』은 정약용이 한자 학습서로 만든 책이 한글, 영어, 일본어, 한자를 한꺼번에 배울 수 있는 플래시카드 형식으로 재탄생했다.

일제가 민족 문화를 억압했던 1910년 이후 시기에는 많은 책들이 해외에서 출간되었다.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상하이나 하와이 등지에서 출간된 책은 넉넉지 못했던 한글 자모, 어색한 세로쓰기 등 모자람이 많고 책 출간까지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 때문에 도리어 애틋하다. 독립운동 노선이 달라 희생되고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지고 만 박용만의 『아미리가혁명』은 해외에서는 워싱턴대학이 유일하게 소장한 책이다.

출판의 발전상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번역한 홍난파는 음악가 이면에 미진한 번역을 손보아 바로 개역판을 펴내는 전문 번역가로서의 면모를 뽐내고, 시인 김억은 1913년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집 『기탄자리』를 발 빠르게 펴냈다. 일제에 의한 한글 말살 정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국어 문법, 한글 전용, 가로쓰기 등 당대의 화두를 담은 책 『깁더조선말본』이 나왔다.

20년 이상의 짧지 않은 식민 지배 하에서도 한글 사용이 자연스러워지면서 30년대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정지용, 박태원 등의 책이 등장한다. 소설가 이상은 출판디자이너로 김기림의 시집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한국 문학’의 본격 시작과 더불어 대중들이 알 만한 소설가들이 이름을 감춘 채 릴레이로 써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는 파격적인 기획의 『파경』도 눈길을 끈다.

이 책에 이름을 올린 44종에는 친일 논란이나 분단으로 인해 평가가 엇갈리게 된 저자들의 책도 포함되어 있다. 이념과 노선의 차이가 역사의 평가로 새겨진 출판의 역사에도 시간은 흐른다. 1942년 출간되어 2만여 권을 넘게 팔고 1960년대까지 20여 년간 사랑 받은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은 베스트셀러와 저작권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알게 한 책이다. 근대에 들어서야 겨우 공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여성 저자들의 존재감이 부각된 예이기도 하다.

190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서 책을 출간하는 일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출판의 다양성이 씨 뿌려진, 우리 출판과 책의 치열한 시기였다. 1937년 록펠러 재단의 중국 장서 기금으로 시작한 워싱턴대학의 동아시아도서관에 한국 책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치러지던 무렵이었다. 2021년 현재, 한국 자료는 전자 자료를 제외하고도 15만 종까지 성장했다. 30만 종이 넘는 중국 자료와 17만 종 가량의 일본 자료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소장과 연구 가치가 있으며, 현재 한국의 관심사를 반영한 책들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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