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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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이유
  • 최진우 한양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2.01.16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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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방인’과 조우한다. 거리에서, 교정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언어와 문화를 달리하는 이방인과 예사롭게 마주친다. 코로나 감염병 확산과 같은 예기치 못한 사태로 이방인의 유입이 일시적 감소세를 보일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인구의 이동, 따라서 이방인과의 접촉은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방인은 여러 모습으로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온다. 취업, 학업, 관광, 혼인, 사업, 망명 등 사정과 이유가 매우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는 ‘합법적’ 절차에 따른 방문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 방문은 일시적일 수도 있으며 영구적일 때도 있다. 

우리는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의 방식은 배제, 차별, 동화, 관용, 인정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 방식이 지배적일 때도 있을 것이고 몇 가지 방식이 혼재된 적도 있을 것이다. 시대적 상황과 필요성의 산물이었을 것이나 이 방식들은 사회적 평화를 위협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어느 것이든 이방인을 ‘우리’와 구별지으며 타자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우리와의 거리두기를 당연시 하고 있다. 타자화는 필연적으로 불평등과 소외를 수반하고, 이에 대한 반작용을 유발하며, 이로 인한 저항과 갈등은 격렬한 물리적 충돌을 야기하기도 한다. 기존 방식에 내재된 이방인의 타자화는 근원적으로 불안정성을 배태하고 있다. 

기존 방식이 수반하는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적 방식으로 이 글은 ‘환대’를 제안한다. 환대는 기본적으로 타자중심적 윤리를 지향한다. 이념형적 수준에서 환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의 공간으로 들어온 타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목소리’를 갖게 하는 것을 뜻한다. 자리를 준다는 것은 이방인이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일자리와 거주의 공간을 가지고 우리와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목소리를 갖게 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권리를 향유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뜻으로 성원권(成員權)을 준다는 의미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한가? 주체의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보면 환대란 주체가 자신의 권리를 모두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따라서 실제로는 조건적 환대가 불가피하다. 환대의 대가로 어느 정도의 조건(직업적 능력, 재산 정도, 언어능력, 범죄 전력 여부 등)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조건의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왜 이방인을 환대해야 하는가? 

환대는 어찌 보면 윤리적 지상명령이다. 이방인을 포함해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지닌 존재이며 인간 본연의 감정인 연민과 동정심의 대상이다. 보편적 도덕률이 이러한 인간의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보편적 도덕률에 따른 인권 존중의 연장선에 있다 할 것이다.  

한편 환대는 종교적 계명이기도 하다. 이방인을 억압하지 말 것이며 이방인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 종교적 가르침이다. 이방인을 무시, 차별, 억압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막론하고 모든 주요 종교의 핵심 교리다. 

도덕률과 종교적 계명 외에도 환대를 해야 하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도 있다. 홉스는 사회계약의 동기를 이익에 대한 희망보다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찾는다. 마찬가지로 공포가 환대의 합리적 기반일 수도 있다.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나 환대의 실천을 거부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두려움에 근거한다. 환대를 실천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방인을 받아들였을 때, 그 이방인이 적으로 돌변해 나를 해치고 내 것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환대의 실천을 어렵게 한다. 반면 환대를 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도 있다. 홀대받은 이방인이 앙심을 품고 나에게 불이익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환대의 실천을 종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환대는 ‘위험의 회피’를 도모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rational choice)이요, 상대의 반응에 대한 예측을 기반으로 하는 전략적 선택일 수 있다. 

환대의 공리주의적 이유는 또 있다. 예외가 없진 않지만 많은 경우 우리를 찾아오는 이방인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동기부여가 강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용자원의 상당 부분을 동원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겠다는 진취적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며, 영민함과 성실성을 동시에 갖춘 유용한 인적자본일 가능성이 높다. 이방인은 또한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도 소중하지만 새로운 것이 주는 신선함의 이점도 크다. 이방인의 시각과 세계관은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촉발시키며 문화의 교류와 섞임을 통해 삶을 더욱 풍요롭과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요컨대 환대는 일견 추상적인 윤리적 당위이며 종교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평화로운 삶, 경제적 효율성, 문화적 역동성의 촉매가 되기도 한다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도 실천의 필요성이 충분히 있다. 다만 공리주의적 논리에서만 환대의 이유를 찾는 경우 공리주의적 효용성이 희석되면 환대의 필요성 또한 상실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윤리와 종교가 요청하는 규범적 논리가 계속 작동할 필요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환대의 실천은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환대를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생물학자의 말이다. 

우리는 “생판 모르는 수백 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타 몇 시간씩 하늘을 날고, 수천 명이 고함을 질러대는 축구 경기장에 어린 아들 손잡고 겁 없이 들어선다. 누가 언제 어떻게 덮칠지 모를 컴컴한 영화관에 앉아 화면에 코를 박은 채 울고 웃는다.” 

사실 인간이 오랜 역사를 거쳐 오늘날 거대국가를 건설해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성취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생면부지 익명의 타자와 뒤섞여 사는 데 익숙해질 수 있었던 인간 고유의 본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이 생물학적 입장에서의 관찰이다. 익명의 타자와 섞여 사는 것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속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대문화의 DNA를 이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DNA 덕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환대의 실천이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은 이유다. 


최진우 한양대학교·정치학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양대 평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미국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정치학 박사. 한국정치학회 회장과 한국유럽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연구분야는 국제정치, 유럽정치, 문화와 정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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