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뮤지컬’이 줄 수 있는 극적 체험의 밀도를 높이다 - 뮤지컬 〈팬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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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뮤지컬’이 줄 수 있는 극적 체험의 밀도를 높이다 - 뮤지컬 〈팬레터〉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2.01.16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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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사진 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팬레터>가 네 번째 시즌(프로듀서 강병원, 연출 김태형, 작/작사 한재은, 작곡 박현숙, 2021. 12. 10~2022. 3. 20)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사연(四演)은 지난 시즌들과 달리 라이브 연주로 진행되며, 코엑스아티움(coexartium)이라는 강남의 대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코엑스아티움 극장은 SM엔터테인먼트가 운영해온 K-pop 복합문화공간 ‘SM타운’이 전신으로서 인터파크씨어터가 운영권을 갖게 되면서 1004석을 보유한 전문 공연장으로 재개관됐다. 따라서 새롭게 변모한 코엑스아티움의 개관 기념작으로 공연되고 있는 <팬레터>는 모두 중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이전 시즌들과 달리 대극장으로 규모를 확장한 도전적인 기획을 선보이는 셈이다. (참고로 초연(2016)부터 <팬레터>가 공연되었던 극장을 시즌별로 살펴보면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320석), 동숭아트센터 동숭홀(450석), 연강홀(620석)이었다. 점차 객석 수 기준 극장의 규모가 확장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제공: 라이브(주)

이번 칼럼에서 ‘사연’ <팬레터>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와 같다. 코로나 시대에 객석수를 크게 확장하면서 규모를 키우고 동시에 대학로가 아닌 ‘강남’을 공연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무엇보다도, 작품에 대한 신뢰 때문일 것이다. 제작사 라이브(주)가 갖고 있는 작품에 대한 확신과 관객이 작품에 보내는 신뢰가 핵심이다. <팬레터>의 매력은 진중한 테마를 인물과 사건으로 구체화시키는 방식에 있다. 작품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예술을 완성시키려는 작가의 예술혼을,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펼쳐놓는다. 일제 강점기에 순수문학을 주장했던 구인회를 ‘칠인회’로 바꾸고, 소설가 김유정을 모델로 한 천재 소설가 ‘김해진’과 김해진의 문학을 사랑했던 작가 지망생 ‘정세훈’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통해 파괴적인 예술혼의 실체를 탐구한다. 극의 중심 사건은 해진이 철저히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생의 반려>라는 마지막 소설을 남기는 과정을 다룬다. 이 소설을 연인 히카루와 함께 가장 빛나는 생의 국면에서 쓰고 싶은 해진의 열망은 지병을 악화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해진의 이 멈출 줄 모르는 창작욕은 히카루와의 ‘공동 집필’을 완성시키고 싶은 욕망에 근거한다. 또한 히카루 역시 해진의 죽음을 예상하면서도 그의 열정을 타나토스적 아우라로 뒤덮으며 채찍질한다. 그 사이에서 세훈은 죽음의 광기를 보여주는 히카루를 제어하려 하고 해진의 파괴를 막으려 한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상황은 세훈이 자초한 것이다. 히카루는 곧 세훈이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라이브(주)

히카루는 세훈의 필명으로서, 작가지망생 세훈의 예술적 원천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생인 세훈은 유학 기간 내내 조선인으로서 고통에 시달린다. 이런 세훈에게 해진의 소설은 유일한 위로였는데, 반대로 해진에게도 히카루는 유일한 ‘생의 위로’였다. 해진은 히카루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히카루라는 이름으로 오는 팬레터를 통해 (그녀와) 강렬한 사랑에 빠진다. 물론 이 팬레터들은 세훈이 보낸 것이다. 따라서 이들 (셋)의 교감은 얽히고설킨 치명적인 상황으로 점차 발전한다. 해진은 자신의 문학을 ‘슬픔’의 코드로 읽어내는 히카루에게 점점 빠져들고 이런 해진을 어쩌지 못해 상황에 말려들어가는 세훈은, 점차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 하나의 인격처럼 진화하는 히카루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해진은 편지로만 인식되고 감각되는 히카루를 자신의 ‘뮤즈’로 칭송하고 탐닉하는 지경에 이른다. 

 

윤나무(김해진役), 문성일(정세훈役), 허혜진(허혜진役): 사진 제공=라이브(주)

<팬레터>는 따라서 해진과 히카루, 히카루와 세훈, 그리고 세훈과 해진의 관계가 발전하고 파국을 맞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세훈과 히카루가 하나였다가 분리되고 파괴되는 과정이 히카루 의상의 변화와 안무를 곁들인 연기로 표현되고 그 사이에 해진과 히카루는 때로는 그림자로, 또 때로는 배우들의 직접적인 연기로 연출됨으로써 작품을 지배하는 의미망의 심도를 높인다. 이러한 연극적인 해법이 세 인물의 관계망을 함축하고 은유하는 흐름을 관찰함으로써 ‘예술혼을 질문’하는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이것이 바로 <팬레터> 관극의 매력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테마, 세훈이 청춘의 열병을 앓고 난 뒤 정신적 성장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민낯을 마주하는 결말은 극에 또 다른 매력을 더한다. 세훈의 마지막 솔로 넘버 ‘내가 죽었을 때’가 특히 뮤지컬 팬들에게 애호되는 이유다. 히카루의 정체를 이미 안 지 오래되었지만 세훈의 창작열을 지속시키기 위해 모든 거짓말을 모른 척 했던 해진의 배려와, 이런 해진의 의도를 사후에 알고 감정의 클라이막스를 경험한 세훈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순간이다. ‘내가 죽었을 때’는 그래서 감정의 온도를 낮춰 덤덤하게 가창될 때 극의 흐름에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된다. 

 

문성일(정세훈役), 허혜진(허혜진役): 사진 제공=라이브(주)

이번 사연은 라이브로 연주되면서 공연의 매력을 음악으로 한층 배가시켰다. 사실 <팬레터>의 정서적 수위를 높이는 데 음악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기존에는 피아노 위주로 편곡된 MR이 사용되어 마이너 음계로 펼쳐지는 전반적인 음악의 질감이 다소 딱딱하고 거친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번 시즌에서 돋보이는 것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의 현악기가 보강된 편곡이다. 현악 특유의 부드럽고 서정적인 톤이 거친 느낌을 상쇄시키고 공연의 흐름을 정서적으로 훨씬 밀도 있게 이끌었다. 더하여, 라이브 연주는 배우들의 호흡을 섬세하게 따라감으로써 공연의 리듬을 한층 설득력 있게 바꾸었다. 가령, ‘내가 죽었을 때’의 감정적 방점을 다소 긴 호흡으로 처리한 세훈(박준휘)의 장면, ‘해진의 편지’가 클라이막스로 치닫도록 해진(윤나무)과 세훈이 ‘편지’로 교감하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부재하되 존재하는’ 팬레터 인물들의 아이러니한 관계들은 라이브 음악이 만드는 흐름으로 유려하게 풀려 나갔다.

 

윤나무(김해진役), 허혜진(허혜진役): 사진 제공=라이브(주)

이제 ‘라이브 극장의 특수한 경험’은 공연은 물론이고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기 위해서도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시대가 되었다. 관객이 안방에서 OTT로 영상 콘텐츠를 즐길 때 느끼는 편리함과 경제성은 영화 산업의 구조를 빠르게 재편할 만큼 강력하게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영화 산업이 초점화 하고 있는 극장의 ‘시네마틱한 경험’은 극장의 스크린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영화문법을 더욱 적극적으로 개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구도 안에서 뮤지컬은 ‘라이브 경험’의 밀도를 더욱 예리하게 증폭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창작뮤지컬이 ‘서사’에 집중하면서 나소 느슨해진 ‘라이브’ ‘뮤지컬’의 본질이 과감하게 실험되지 않으면, 뮤지컬은 비슷한 것을 재생산하는 대중문화의 마이너 장르로 계속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뮤지컬로 흡수되는 세계관이, 동시대의 다양한 영상 미디어에 담긴 콘텐츠의 세계관에 비해 다양하지 않다는 점은 이 맥락에서 더욱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이번 <팬레터> 공연은 급격하게 재편되는 영상 미디어 환경 속에서 라이브 공연의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결과물을 생산했다. 여전히, 초연보다 검증된 공연의 재공연 비율이 높은 불안한 시장 상황 속에서 유의미한 행보로 평가된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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