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빈번한 사면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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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빈번한 사면 조치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2.01.1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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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㉖_ 너무 빈번한 사면 조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논란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난달 30일에 특별사면해서 논란이다. 이른바 ‘촛불정부’를 자임해온 문재인 정부가 박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복권을 결정하며 내세운 명분은 ‘국민 화합’이다. 여론은 어떨까? 사면이 잘된 일인지 여부를 묻는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을 지지하는 국민이 과반을 넘겼다고 한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제대로 된 죗값을 치루지 않고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국민 화합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을 표시하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

사실 대통령의 사면권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삼권이 분리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행정부 수반이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사면은 권력 분립 원칙에 위배되는 조치라는 지적이다. 기준도 모호해서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사면은 법이 평등하지 않음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비판도 있다. 

 

조선왕조 사면령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는 『대전회통(大典會通)』 속 「사령(赦令)」 항목이다. 규장각 소장. 

최고 권력자의 사면은 그 연원이 꽤 깊은데, 수백 년 전 조선왕조에서도 사면을 둘러싼 논란이 자주 있었다. 조선시대 사면권은 국왕이 쥐고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를 보면 그에 관한 논란이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당시 빈번하게 사면 조치가 단행되곤 했다. 


조선왕조의 빈번한 사면령

조선왕조에서 사면령을 사령(赦令)이라 했는데, 국왕이 특별한 날에 사면령을 내리는 것을 반사(頒赦)라고 했다. 그럼 언제 사면령을 내렸나?

먼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면이 내려졌다. 예컨대 왕이 즉위하거나 세자가 탄생했을 때, 왕실의 혼례나 왕실 가족들의 생일날에 이를 축하하는 사면령이 내려지곤 했다. 또 왕실의 가족이 중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경우, 종묘에서 가을에 정기적인 제례를 드릴 때에도 반사(頒赦)가 행해졌다. 이와 함께 반역 사건을 진압하는 등 중대한 국사가 있을 때에도 으레 사면령이 단행되곤 했다.

 

1897년 고종이 황제 즉위 절차를 담은 『대례의궤(大禮儀軌)』 표지(좌)와 그 속에 수록된 고종황제의 어보 그림(우).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면서 곧바로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에도 사면을 단행했다. 사람들은 자연재해를 하늘이 국왕에게 내리는 경고로 이해했기 때문에 형정(刑政)이 잘못되어 억울하고 원통한 백성이 있다면 찾아내서 사면함으로써 하늘의 경고에 답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식으로 사면령이 내려지다 보니 심한 경우 한 해에도 몇 번이나 사면 조치가 있곤 했다. 예컨대 1547년(명종 2) 정월에 돌아가신 선왕 중종(中宗)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명종이 대사면을 내렸다. 그런데 불과 넉 달 뒤인 5월에는 한재(旱災)로 인해 많은 죄수들을 너그럽게 풀어주는 조치를 재차 단행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국왕의 은혜가 지나쳐 사면이 잦아지면 법질서가 문란해질 것이라 간언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조만간 사면이 있을 것이라 미리 넘겨짚고 경솔히 죄를 저지르는 일까지 발생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사면 대상 또한 너무 광범위한 것도 문제였다. 기록에 따르면 사면령이 내리면 대개 ‘잡범(雜犯) 사죄(死罪) 이하’ 죄수들이 모두 풀려났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반역이나 강상과 같은 중대 범죄가 아닌 일반 형사범죄자의 경우 사형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모두 사면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사면제도를 연구한 연세대 유성국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대략 11개월에 한 번 꼴로 사면이 단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사면령이 내려져 감옥과 유배지에 갇혀 있던 수많은 죄수들이 풀려났음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사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인범, 평균 5년 반 만에 풀려나다

그런데 사면 외에도 국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죄수들을 풀어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소결(疏決)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소결은 소석(疏釋), 소방(疏放)이라고도 하였는데, 죄수를 관대하게 처결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재해를 당했을 때 감옥에 수감된 미결수, 혹은 형이 확정되어 유배 중인 죄수들의 옥안을 재심사하여 형량을 감해주거나 아예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켜 주는 절차를 말한다.

일정한 죄목이나 죄수에 대해 일괄적으로 죄를 용서하는 사면과 달리 소결은 사안별로 심사 방법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소결 제도의 취지와 달리 가벼운 죄수들을 일괄 석방하는 등 소결과 사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위 국왕의 은택인 사면과 소결의 효과는 있었을까? 1440년(세종 22)에 가뭄이 심하자 영의정 황희(黃喜)가 국왕 세종에게 사면령 시행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세종은 재위 22년 동안 매년 한발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지만, 이런 조치가 자연 재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토로하였다. 또 사면이 오히려 형벌을 면하고자 하는 자들의 요행수가 되고 있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추조결옥록(秋曹決獄錄)』. 19세기 형조에서 처리한 각종 옥안(獄案)이 실려 있으며 국왕의 사면 관련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규장각 소장.

최근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문준영 교수는 『일성록(日省錄)』, 『추조결옥록(秋曹決獄錄)』 등 규장각에 소장된 사법 관련 기록을 상세히 추적하여 조선후기 살인범의 판결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19세기에는 2,690명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이들 중 사형 확정 판결이 내려져 형이 집행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또 이들 살인범 중 사형에서 감형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336명 가운데 220명은 유배형이 확정된 이후 조정의 사면령에 의거하여 평균적으로 5.6년 만에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요컨대 19세기에는 사람을 죽여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음은 물론 판결 후 평균 5년 반이면 유배지를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왕조의 지나치게 관대한 처벌, 이에 더한 잦은 사면을 우리는 문준영 교수의 위 분석 결과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의 31세 모습을 담은 초상화. 철종은 1849년 7월부터 1864년 1월까지 재위하였다. 본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화재로 일부분이 소실된 <철종 어진>을 최광수가 복원 이모한 것이다.

죗값은 정당하게 치러야... 

유교국가인 조선 왕조는 덕치(德治)를 표방하였으므로 범죄가 감소하여 최종적으로 형벌 그 자체가 불필요한 사회의 실현이 국왕이 목표하는 이상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국왕에 의해 사면과 소결이 자주 시행된 배경에는 ‘공옥(空獄)’, 즉 감옥이 비는 것을 선정(善政)을 베푸는 가늠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죄를 지은 만큼 정당하게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산 정약용의 지적을 환기해보자. 그는 당시 법관들이 악을 보고도 미워할 줄 모르고 죄수에 대한 관용과 은전이 지나치게 넘쳐나고 있는 세태를 냉엄하게 꼬집고 있다. 다산은 죄수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만을 음덕(陰德)이라 생각해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관리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살인범이 정당하게 죗값을 받는 것 또한 죽은 피해자를 위한 음덕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산은 그의 저서 『흠흠신서』에서 국왕 정조의 온정주의적인 너그러운 판결, 사면권의 남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와 같은 다산의 생각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충분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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