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배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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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배운다니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2.01.1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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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_ 논설고문 칼럼

배움에 대해 말하면서, 책에서 배우거나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낫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었다. “자연에서 배운다니, 무슨 말인가? 사회현실에서 배워야 한다.” 이 반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반론에 보충설명이 있다. “자연학문은 자연에서 배워야 하겠지만, 인문ㆍ사회학문은 사회현실에서 배워야 한다. 자연을 완상하고 유람을 일삼는 것은 도피 행각에 지나지 않고, 진정한 배움과 거리가 멀다. 지난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자연에서 배운다는 것은 완상이나 유람만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이다. 자연에서 배운다는 것은 모든 것의 근본이치를 알자는 것이다. 모든 것의 근본이치란 무엇인가? 질량을 가진 만물은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보다 더 근본이 되는 이치는 없다. 만유인력은 자연학문에서나 관심을 연구할 것이 아니고, 어느 학문에서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만유인력 때문에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 태양이 인력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과 지구가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어, 지구는 일정한 궤도를 그리면서 돈다. 만유인력이 없다면, 지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만유인력 덕분에 사람은 지구 위에서 살고 있다.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과 사람이 일어서는 힘이 균형을 이루어 사람은 지구 위에서 서서 돌아다닌다. 만유인력이 없다면, 사람은 허공에 떠서 행방불명이 된다.

이것은 만인주지의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인데, 왜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는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에서, 모호하고 논란이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지침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는, 또는 사회속의 여러 집단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총체를 이루고 있는가, 아니면 개체로 존재하는가? 총체가 개체보다 우월한가, 아니면 개체가 총체보다 우월한가? 이런 논란을 해결하는 해답을 근본이치라고 한 것에서 도출할 수 있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반된 힘이 균형을 이루어 개체가 총체이고, 총체가 개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자연의 원리를 무리하게 사회현실에 적용한다고 나무랄 것인가? 자연을 가져와 사회를 이해하는 비유로 삼으니, 용서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방어선을 치지 말고, 사실을 인정하자. 자연에서 사회까지, 물질에서 정신까지의 전 영역에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반된 힘이 균형을 이루는 원리가 일관되게 있으면서, 경우에 따라 특수한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연에서 배운다는 것은 이것을 안다는 말이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에는 사회현실에서 배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사회현실에서 배우는 것에는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자연에서 배우면 사현현실도 알 수 있다는 말을 자연학문에서는 하지 못한다. 자연학문은 자연에서 배우는 것을 그 자체로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인문ㆍ사회학문은 인간정신과 사회현실을 통관해서 고찰하는 작업을 하려고 고심하다가, 자연에서 배우면 전체적인 통괄이 가능하다고 깨닫게 된다. 

이것은 학문통합론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자연학문에서 시작한 학문통합론은 그쪽의 수리언어를 버리고 대중화를 목표로 일상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상식론으로 후퇴하고 설득력을 잃는다. 인문학문이 선도하는 학문통합론은 자연학문에서 이룬 연구 성과까지 포괄해 일상어의 논리적 수준을 최대한 높이려고 한다. 그 결과 생극론이나 대등론을 이룩한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반된 힘이 균형을 이루는 원리는, 상극이 상생이고 상생이 상극이라고 하는 생극론으로 재정립해야 뜻하는 바가 분명해지고 쓰임새가 넓어진다. 힘이 상반된다는 것은 상극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상반된 힘이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상생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상극이 상생이고 상생이 상극이라는 명제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룬다고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자연에서 사회까지, 다시 사람의 정신까지 상생이 상극이고 상극이 상생인 생극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자연학문은 수리언어가 지닌 한계 때문에 파악하지 못하고, 인문학문이 선도하는 학문통합에서는 일상어의 논리적 수준을 최대한 높이면서 찾아내려고 한다.

생극론은 대등론이어야 한다. 생극은 차등이 아닌 대등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萬物對等生克論이 추구하고자 하는 원리의 가장 포괄적이 형태이다. 그 속에 萬生대등생극론이 있고, 다시 그 속에 萬人대등생극론이 있다. 중간 단계인 만생대등생극론의 실상을 보자. 식물은 탄소동화작용을 해서 동물에게 먹이를 제공한다. 눈이 없어 보지 못하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동물을 유인한다. 동물은 식물을 알아보고 유익함을 취한다. 사람도 동물의 하나여서 그렇게 하면서 동물이 하는 행위까지 인지하고 평가한다.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만생대등생극론, 그보다 더 큰 만물대등생극론은 사람만 파악해 지닌다. 

생명이 있게 하는 데서는 식물이 으뜸이고, 인지에서는 사람이 앞선다. 동물은 양쪽 다 중간이다. 그러므로 식물ㆍ동물ㆍ사람은 대등하다. 생명은 필수적인 것이고, 인지는 부차적인 것이므로 양쪽이 대등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는 반론이 제기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반론을 사람이라야 제기할 수 있는 것을 반론에 대한 반론으로 삼을 수 있다. 

농부와 선비의 관계도 이와 같은가? 농부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기여는 절대적이다. 농부는 선비가 없어도 살 수 있고, 선비는 농부가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농부와 선비가 대등하다고 할 것은 아니다. 선비의 인지는 특정한 내용이 없어 허황되게 보이지만, 포괄적인 진실성을 갖출 수 있다.

선비는 농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머슴일 수 있다. 개별적 인지를 모아, 그 총체인 만물대등생극론을 정립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것을 누구나 공유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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