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삶과 예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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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삶과 예술 이야기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1.10 0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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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예술혼: 조선 화가 32인의 삶과 예술 | 백형찬 지음 | 살림출판사 | 208쪽

 

조선 시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딱딱한 전문서에서 탈피, 에세이 형식으로 쉽게 풀어쓴 책으로 32명 화가들의 작품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을 붓으로 노래한 화가, 조선 최초의 프로페셔널 화가, 조선 제일의 스토리텔링 화가, 조선의 다빈치 화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화가, 조선을 문화대국으로 만든 화가, 조선 시서화 삼절의 화가, 조선 최고의 인물화가, 조선 최고의 묵장화가,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 조선 종실 출신 화가, 조선 선비 출신 화가, 조선 노비 출신 화가, 서른에 요절한 천재 화가, 신선이 된 화가 등 조선 오백 년 동안 수많은 화가들 중 특별한 삶과 예술 세계를 펼친 화가들을 만나본다.

예술가에게 시련과 역경 그리고 고난은 운명처럼 따라다닌다. 그것은 가난일 수도 있고, 고독일 수도 있고, 병일 수도 있다. 예술가의 길은 멀고도 험하며 그 길은 피와 눈물과 땀을 요구한다. 그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에 훗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기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산〉은 단발령에 서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한 마리 새가 되어 단발령과 금강산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단발령은 금강산 초입에 있는 고개이다. 신라 마의태자가 나라를 빼앗기고 그 설움에 아버지 경순왕에게 하직하고 출가를 결심하고 바로 금강산으로 입산해 단발령에서 삭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정선 일행이다. 그는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금강산을 구경했는데 평생 친구였던 김화 현감 이병연이 겸재를 금강산으로 초대한 것이다. 그가 화가로서 이름을 크게 떨친 것도 금강산을 그리면서부터였다.

정선은 숙종 때 서울에서 태어나 영조 때까지 활동했다. 당시 대단한 권력가였던 안동 김씨 형제들의 후원으로 그는 평생 벼슬을 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우리 강산을 무척 사랑해서 전국을 유람하며 그 시대와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조선 화가 중 가장 많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정선이 아닐까 싶다. 그는 평생 금강산을 눈에 담고 살았다고 한다. 금강산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정선의 그림을 ‘실경산수’라 하지 않고 ‘진경산수(眞景山水)’라 한다. 진경산수는 중국의 화풍을 배제하고 우리 눈으로 우리 강산을 직접 보고 느낀 그대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진경산수에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들어가 있지 않고 순수하다.

 

(왼쪽부터)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산〉, 김홍도의 〈씨름〉, 장승업의 〈호취도(豪鷲圖)〉, 안중식의 〈백악춘효〉

김홍도의 〈씨름〉은 그냥 조선 시대 풍속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양반과 상민 그리고 어른과 아이의 신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이 그림은 파격적이었다. 신분제도를 없애고자 노력한 정조의 생각을 김홍도가 그대로 그림에 담은 것이다. 정조는 온 나라 백성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리고 정조가 꿈꾸던 태평성대를 김홍도는 풍속화 작품으로 완성해냈다. 그래서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웃음을 머금고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김홍도를 정조는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김홍도는 임금의 초상화를 두 번씩이나 그렸다. 한번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의 어진을 그렸고, 또 한 번은 정조의 어진을 그렸다. 그리고 정조의 어진을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 현감이 되기도 했다.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그림으로 현감 벼슬을 얻은 것이다. 어진은 조선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도화서 화원이 그렸다. 그들을 어용화사라 했는데 이것은 최고의 명예였다.

도화서 화원이 된 김홍도는 그곳에서 조선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줄줄이 그려 조선의 르네상스를 활짝 열었다. ‘청은 남에서 나나 남보다 푸르다’라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 3대 화가 중 한 사람인 장승업은 고아로 자랐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제대로 된 그림 공부를 받아본 적도 없다. 안견에게는 안평대군이라는 권세가가 있었고, 김홍도에게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꽃 피던 시대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장승업은 조선 말기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쇠퇴해가는 국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는 예술가로만 살았다. 세속적인 것에는 일절 얽매이지 않았다. 돈과 벼슬을 하찮게 여겼다. 그의 그림값은 모조리 술값으로 나갔다. 술을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려면 반드시 그 옆에 술병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취명거사’라 했다.

그의 작품 〈호취도(豪鷲圖)〉를 보면 커다란 나뭇가지에 두 마리 독수리가 앉아 있다. 한 마리는 몸을 활처럼 잔뜩 구부리고 먹이를 노려보고 있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빛. 이 모두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다른 한 마리는 먹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 달관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장승업이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를 대비시켜 그린 것이 아닐까? 그림은 세상살이는 두 가지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안중식은 고종 때 활동한 조선의 마지막 도화서 화원이다. 그는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어진을 그렸다. 안중식의 스승은 장승업으로 그는 스승의 전통적인 화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의 작품 〈백악춘효〉는 백악산 밑 봄날의 새벽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백악춘효〉는 작품이 두 개이다. 하나는 여름을 그렸고 다른 하나는 가을을 그렸다. 그런데도 두 작품 모두 제목을 〈백악춘효〉라 붙였다. 봄 그림이 아닌데 왜 그렇게 봄을 강조했을까?

그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915년으로 이미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때였다. 오백 년 왕업을 이어온 조선왕조가 슬프게도 막을 내리는 시기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새로운 봄날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이 그림은 조선 진경산수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큰 화면에 조선의 디테일을 가득 담았다.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백악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산과 산 사이에는 거대한 구름이 도도히 흐르고, 경복궁은 의젓하고 경건하다. 근정전을 비롯해 강령전, 경회루가 질서 정연하게 보인다. 그 앞에는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인 광화문이 있다. 그는 광화문의 모습을 위용 있게 표현했다. 광화문을 ‘조선이 있다고 자랑하듯’ 조선왕조의 마지막 화원으로서 종묘사직에 목숨을 바치듯 〈백악춘효〉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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