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적게, 지나치게 납작하게 이야기된 여자들의 진짜 관계를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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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적게, 지나치게 납작하게 이야기된 여자들의 진짜 관계를 마주하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1.10 0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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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들의 사회: 말해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여자들의 관계에 대하여 |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0쪽

 

“남성과의 관계에서만 여성의 이름과 역할이 부여되는 시대는 지났다. 앞으로는 여자들의 사회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이 넘쳐날 것이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인 저자 권김현영이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영화 〈윤희에게〉, 소설 《작은 아씨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예능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 등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에서 찾은 여자들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저자는 그동안 여자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었고 이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너무 치우쳤다고 지적하며, ‘여자들의 사회’라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색한다. 

된장녀, 김치녀, 맘충 등은 여성을 혐오하고 함부로 규정하는 용어다. 그런데 여성 집단뿐 아니라 여성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도 비슷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 “여초 회사는 뒷말이 많다”, “여자들은 의리가 없다” 등의 말은 여자들의 관계를 편협하게 바라보고 폄하한다. 반대로 “자매애는 있다”와 같은 말 또한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공통적 경험을 상정하며 이유 없는 연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편견이다.

그렇다면 여자들의 진짜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사실 여자는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한다. 집, 학교, 회사 등에서 여자끼리 맺는 사회적 관계는 무척 다채로우며, 그 안에서 여자들은 모녀 관계, 자매애, 여성들의 우정, 네트워킹, 페미니스트 동지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듯 여자는 ‘여자들의 사회’에서 웃고 울고 싸우고 경쟁하고 좌절하고 실망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자들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만약 여자가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연 여자들의 사회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이 책은 바로 그동안 말해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여자들의 관계를 탐색한다.

지난 10여 년간 온라인 상의 여성 혐오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여성을 함부로 정의 내리는 말이 쏟아졌다. 단 한 명조차 그렇게 한마디로 단언될 수 없는데도, 여자에 대한 뻔한 얘기를 떠드는 입들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저자는 대중문화 콘텐츠 속 여자들의 이야기를 면밀히 살피며 여자들의 사회를 탐구한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영화 「윤희에게」, 소설 『작은 아씨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웹툰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 예능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 등에 등장하는 여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여자들의 관계를 증언하는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다.

당연히 그 목소리는 각자의 상황, 계층, 욕구 등에 따라 각양각색이며, 무엇보다 그가 다른 여자들과 어떤 사이인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다이애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친구가 되자고 말하는 앤(「빨강머리 앤」), 쥰과 만났던 이십 년 전에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고 편지를 쓰는 윤희(「윤희에게」), 자신을 배틀 상대로 지목한 상대에게 “난 한 번도 약자였던 적이 없는데?”라며 자신감을 보이는 리정(「스트릿 우먼 파이터」) 등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여자들 사회의 다종다양한 면면을 오롯이 드러낸다.

대중문화 속 여자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작업은 콘텐츠의 또 다른 의미와 가치와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관계’라는 분석 틀이 작품에 대한 색다른 평가와 흥미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14개의 콘텐츠는 지금-이곳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취향과 감성에 꼭 맞는 작품들이다. 평소 애정하는 작품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반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저자 또한 이 취향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에 관해 흥미롭고 독창적인 해석을 풀어놓았다.

바야흐로 여성 서사의 시대다. 영화, 소설, 드라마, 웹툰,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여성이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등장하고,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콘텐츠가 성공을 거두는 사례가 무척 늘어났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벡델 테스트(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로 콘텐츠의 성 평등을 가늠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그런데 여성 서사의 증가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가부장제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여자들의 사회와 그 사회가 만든 여성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오늘날 여성 서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868년에 출간된 『작은 아씨들』과 1908년에 출간된 『빨간 머리 앤』부터 2021년에 방영된 「스트릿 우먼 파이터」까지,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여성 서사 역사의 조각들이다. 비록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시대적 한계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이 작품들이 더욱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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