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다시 증폭된 외국인 혐오와 불평등·정치적 불확실성·극우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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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다시 증폭된 외국인 혐오와 불평등·정치적 불확실성·극우 포퓰리즘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1.10 0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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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위기에 빠진 21세기 세계의 해부 | 도널드 서순 지음 |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384쪽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안토니오 그람시

 

우리는 기존의 제약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와 정당, 집단과 계급이 나타나서 구원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병이 심각하지 않은 시대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오늘날 그런 희망은 오로지 종교 광신자들만의 것이며, 외국인 혐오와 불평등, 정치적 불확실성, 기후변화, 환경 파괴, 전 지구적 팬데믹, 미치광이 정치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가운데 ‘평범한’ 희망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다.

저자 도널드 서순이 책의 화두로 삼은 그람시의 경구는 어떻게 보면 상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다. 그람시가 보기에 당시 자본주의는 헤어날 길 없는 위기로 빠져들었지만,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할 노동계급 세력은 아직 허약할 뿐이었다. 그 위기를 비집고 들어선 파시즘과 극좌 모험주의는 그람시가 생각하는 ‘새로운 것’, 즉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사회주의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공백기에 나타나는 ‘병적 징후’였다.

오늘날 죽어가는 낡은 것은 2차대전 이후 생겨나 ‘영광의 30년’을 거치며 모습을 갖추고 냉전 종식 이후 세계를 지배하게 된 현대 자본주의다. 이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 복지와 일자리를 보장하고 꾸준한 성장을 약속한 자본주의였다. 이 낡은 세계는 “성장과 안정, 교육 확대의 세계이자 젊은이들이 자기 부모보다 더 잘살고, 더 자유로우며, 도덕 관습의 제약을 덜 받을 것”이라고 자랑하는 세계였다. 완전고용과 복지, 사회서비스는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68세대는 여성과 인종적·성적 소수자 등의 인권 향상을 위해 싸웠고, 성장과 더불어 자유와 평등을 더 많은 이들에게 확대해주었다.

하지만 냉전에서 승리하면서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이 세계는 2008년 경제위기에 이어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가운데 허약한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불평등이 계속 확대되었고, 19세기 후반 첫 번째 세계화 시기부터 모습을 드러낸 외국인 혐오, 인종주의는 나날이 기승을 부린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민주의가 정당성과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던 정치는 어느 순간부터 막말과 혐오로 무장한 극우 포퓰리즘이 판치는 장이 되었다. 그람시가 꿈꾼 ‘새로운 것’, 즉 사회주의는 이미 스스로 파탄난 지 오래이지만, 지금의 우리는 어떤 새로운 것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

영국과 다른 나라들의 보수당이 언제나 ‘추잡한’ 정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서유럽은 한때 일정한 제약 안에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일종의 동정심 있는 보수주의를 특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불평등에 맞선 싸움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민당들은 그 대신 자신들이 신중하다고 여기는 카드, 즉 지배적인 친시장 이데올로기에 영합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게임에서 졌다.

극좌파는 압도적 다수, 즉 야비한 1퍼센트에 맞서 99퍼센트를 대변한다는 포퓰리즘적 주장을 펴는데, 마치 99퍼센트 자체가 계급과 젠더, 정치, 종교, 교육, 지역, 연령에 따라 나뉘지 않는 듯 행세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의 일련의 트윗과 인종차별적이고 거친 조롱을 떠올려보라.

또한 난민을 둘러싼 언론과 정치인들의 히스테리를 보라. 물론 현실은 사뭇 다르다. 2015년 영국에는 전체 인구의 0.2퍼센트 정도 되는 12만 3000명의 난민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2017년 8월 25일 이래 미얀마 난민 64만 7000여 명이 방글라데시로 도망쳤다.

죽어가는 ‘낡은’ 것이 그뿐이랴.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는 아랍의 봄이 기대와 달리 민주주의의 정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슬람국가(IS)가 여전히 건재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정부가 붕괴하고 탈레반이 당당하게 권좌에 복귀했다.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 지구 차원의 팬데믹은 과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있는지 물음표를 던진다.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생태적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기후 파국을 막기 위해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데 앙상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그 파국을 막을 수 있는지 좀처럼 확신하기 어렵다.

병든 시대에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은 거인들에 대한 기억을 잃은 난쟁이들의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과연 모든 게 종말을 맞이할 운명이고, 야만인들이 문 앞에 와 있으며, 우리가 믿는 가치는 위험에 빠져 있는가.

표지 그림으로 쓰인 영국 화가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Hope」에서, 그림 속 눈을 가린 여자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공 모양 위에 앉아서 현이 하나뿐인 리라의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무 희망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 소리가 그나마 위안이 될지 모른다. 지옥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것은 아니라고 여전히 희망을 품는 것이다. 병적 징후들이 넘쳐나지만, 어쨌든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우리의 삶이 좋아졌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아무리 시대가 병들었어도 계속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간 사람들 덕분이다.

저자는 이런 ‘병적 징후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오늘날의 위기를 진단한다. 영국과 유럽 등 서구를 중심으로 살펴보되 시야를 넓혀 세계 곳곳에 눈길을 준다. 저자는 이 책이 “역사를 바탕으로 삼긴 하지만 논쟁을 겨냥한 책”임을 밝히며, 마키아벨리의 구절을 통해 의지의 낙관주의를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과거의 무질서를 인간의 본성 탓으로 돌리지 말고, 시대를 탓하라. 시대가 바뀌어 더 나은 정부가 세워지면, 우리 도시가 장래에 더 나은 미래를 누리리라는 희망에 합당한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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