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분단체제 하의 삶과 문학 비평의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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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분단체제 하의 삶과 문학 비평의 애도
  • 배하은 대구경북과학기술원·국문학
  • 승인 2022.01.0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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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_ 『에코아나키: 통일이행기 한국문학의 해석적 모험』 (신철하 지음, 한양대학교출판부, 456쪽, 2021.11)

 

 

믿음과 소망, 사랑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비평하기

민주주의, 평화, 공동체, 시와 문학 같은, 한때 자명했던 것들의 가치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무래도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이른바 전환기 무렵이 그 기점이 될 것이다. 체제의 변화, 곧 대외적으로 냉전 체제의 해체, 대내적으로 오랜 독재 체제의 종식은 더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지 하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통일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 그래서 시와 문학에 그러한 것들을 노래하는 막중한 임무가 지워지지 않는 시대를 불러왔다. 그 역할과 쓰임이 더 이상 요청되지 않자, 명목과 허울만 남긴 채 가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풍화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가 우리의 뜻을 진실로 대의·대변한다고 믿지 않고, 통일로 운위되는 공동체의 평화를 소망하지 않으며,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일만큼 가난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에코아나키』는 그와 같이 풍화를 겪은 것들의 가치를 갱신하고자 한 비평서이다. 사람들이 더는 믿지 않고, 소망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것들에 대해 논한다. 분단체제와 그 이후 포스트분단체제 하의 삶과 문학에 대해 여러 텍스트들을 넘나들며 고구한다. 특별히 이른바 ‘역사의 종언’이 선언된 이래 대안적인 체제와 이념이 새롭게 발견되지 않는 교착 국면에서 저자는 노자와 동학의 재발견으로 눈을 돌린다. 노자의 ‘무위’를 19세기 동학의 ‘불연기연’과 연결하여 사랑이라는 정념이 어떻게 혼미한 시대에 연대와 혁명의 미학적 이념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이를 토대로 분단시대에 축적된 한국 문학 텍스트의 재해석과 포스트분단체제 하의 무너진 공동체 윤리의 재구축을 시도한다.

 

연결됨의 윤리와 미적 자율성의 힘

사실 사랑을 거론하는 것은 새롭지 않다. 유사 이래 인간의 문학, 역사, 철학, 종교가 사랑의 존재와 관념에 기대어 왔고,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문명이 초래한 온갖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으로 제시되어 온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사랑이 방편으로 제시되는 것은 모종의 태만함으로 비치기 쉽다. 다만 노자로부터 시작하여 들뢰즈를 경유하여 동학의 ‘불연기연’을 소환하고, 생태학 담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 ‘에코아나키’의 개념을 이끌어 내는 이 책의 논법은 이론에 대한 태만함의 결과가 아님을 역설한다. 이 책에서 핵심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에코아나키’는 공생과 공존의 관계적 연대와 자기동일성을 넘어서는 실존적 자유의 결합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러한 ‘에코아나키’적 사유와 비전을 식민지 근대를 경험한 한국 사회의 식민지성과 근대주의를 극복할 일종의 해법으로 요청한다. 그 구체적인 모델은 한국전쟁기를 그린 염상섭의 『취우』 속 강순제나 최인훈의 『회색인』 속 독고준에서 포착한다. 소설 속 이 인물들이 식민 지배와 전쟁의 폭력, 분단체제의 억압을 견디고 통과하며 실존적 주체를 지탱 혹은 변화시켜 온 원리가 사랑에서 파생되는 자유와 연대인 까닭이다.
 
자본의 초국적화, 이에 따른 삶의 유동성 극대화,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의 보편화가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탈북 난민은 자유와 연대라는 얼핏 추상적인 듯 보이는 문제를 실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존재들 중 하나이다. 이 책에서 포스트분단체제의 ‘에코아나키’적 모델로 주목하는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속 로기완의 여정, 곧 국경을 넘어 중국을 지나, 벨기에와 영국 런던에 이르는 가운데 그려지는 그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그것을 말해 준다. 국적과 시민권을 갖지 못한 한 벌거벗은 생명이 국가 폭력과 자본의 착취를 겪고 얻은 난민의 지위는 또 다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삶을 하나 더하고 지속시킬 뿐이다. 소설은 그가 그러한 난민 지위를 버리고 국가와 자본 바깥의 주체와 공동체로 기투하는 삶을 재현하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에코아나키』는 이로부터 “실존과 실존의 연민과 연대, 가족과 가족의 연민과 연대, 마을과 마을의 연민과 연대의 사슬을 이루는 기본 구조를 통일이행기의 주요한 비전과 생활 지표”로 제시하는 문학의 가능성을 엿본다.

구태여 문학에서 이러한 복잡한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는 것은 문학예술이 지닌 미적 자율성의 힘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김수영의 ‘반시(反詩)’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벤야민과 들뢰즈의 카프카 해석,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 등을 두루 살펴보며, 체제의 틀 안에 구조화된 의식과 무의식을 전복하는 것은 역시 그러한 의식과 무의식을 탈/구조화하는 언어가 벌일 수 있는 미학적 자율성의 실험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이중구속적’ 상황 속에서 그 구속의 명령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는 필경사 바틀비의 언어 같은 것이다. 그러한 언어가 저항과 해방으로 존재를 이끄는 원자 같은 것임에 대해서는 설명을 더할 필요가 없다.

 

남는 문제: 근본주의적인 당위론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문제들이 있다. 통일이행기의 설정 등으로 분단체제론과 선을 긋고 차별화하려는 노력이 보이지만, 이 비평서가 분단체제론의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분단 모순으로의 환원적인 시각과 분단 특수성의 과잉된 해석이라는 분단체제론에 대한 비판은 이 비평서의 시각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그 일면은 “현 단계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의 원인과 결과가 분단체제로부터 기여하고 있다”는 식의 지나친 일반화나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모순을 ‘분단 자본주의’라는 엄밀하게 규명되지 않은 개념으로 파악하는 논리적 비약 등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분단체제의 반생태적 측면이 미국식 세계화 및 제국주의의 패권 하에 놓인 신식민지화로 설명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익숙한 1980년대적인 논법이다. 분단체제/포스트분단체제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당위론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학에서 기인하여 면면히 지속되어 온 민중의식이나 서구적 근대화 이전의/바깥의 ‘오염되지 않은’ 토착적 언어 등을 강조하는 측면도, 노자의 무위를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1980년대의 민중문학론자들의 논법과 닮아 있다. 무엇보다도 서구 근대에 오염된, 또는 그로부터 “오역된 근대”와 다른 어떤 근대를 전근대 사회의 동학혁명이나 그러한 ‘인민’에서 찾고 있는 토착주의(nativism) 또는 근본주의적인 시각이 그렇다. 

그렇지만 지나간 연대가 아닌, 오늘날의 포스트분단체제에 대한 비평에는 그 이상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비판하는 “신이데올로기 투쟁처럼 보이는 사소성에 빠진 페미니즘, 하이퍼텍스트와 사이버문학이 보여주는 소수 마니아를 위한 저급한 글쓰기, 시대정신이 결여된 말장난 수준의 이야기체 서사, 개점휴업상태나 다름없는 비평 등”으로 이루어진 “오늘의 한국 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중 속에 포스트분단체제 하의 삶과 공동체를 구성할 인민의 잠재태와 분리되지 않는 주체들이 있다. 물론 대중과 인민을 규정하고 구분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으나, 다만 어느 것이든 그것을 구성하게 될 실존의 우리들이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포스트분단체제 하에서 근본주의적인 당위론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통일이행기 생태적 공동체에 대한 이 시대의, 또는 다음 시대를 향한 비전이 지나간 세기의 분단체제론과 다른 차원의 접근 방식이라면 그러한 물음에 대한 고민은 중요해 보인다. 물론 비평은 언제나 조금은 늦게 오는 것이기에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도의 형식일 따름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배하은 대구경북과학기술원·국문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기초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대소설을 전공했고, 1980년대 문학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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