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과 태도로서 내재적 발전’에 기반한 한국사 연구의 태동과 형성, 분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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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과 태도로서 내재적 발전’에 기반한 한국사 연구의 태동과 형성, 분화의 역사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1.0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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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역사학의 전환: 주체적·내재적 발전의 시선으로 본 한국사 연구의 역사 | 신주백 지음 | 휴머니스트 | 484쪽

 

저자 신주백은 2016년 간행한 『한국 역사학의 기원』에서 한국 현대 역사학의 뿌리를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한 바 있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성,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체제가 사학과라는 제도 속에 같이 있지만 사실상 독립된 분과 학문처럼 작동해온 분절성, 그리고 한반도 분단체제라는 결정적 현재성과 그것을 극복할 미래에 대해서는 입과 귀를 막아버린 분단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한국사 학계는 이 세 가지 특징의 기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저자는 이 움직임을 학계에서 검증 없이 흔히 사용해온 ‘내재적 발전론’이란 용어 대신,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움직임 속에서 포착하고자 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 사회를 이해할 때,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이라는 말만큼 꾸준하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온 역사 용어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이것이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들이 열등의식이나 낭패감을 떨쳐내는 데 지적 자극제이자 심리적 보충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러한 맥락에서 1950~1980년대 한국사 연구의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한국사 학계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문 경향의 ‘형성’이라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형성을 전후한 ‘태동’과 ‘분화’의 학술사도 함께 추적하였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중·후반경까지를 태동, 형성, 분화라는 세 시기로 나누고 각각 1~3부에서 고찰하였다.

여기에서 저자는 한국 현대 역사학의 세 가지 특징을 형성시킨 뿌리, 즉 식민주의 역사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성,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자장 안에 포섭된 증거물인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체제가 사학과라는 제도 속에 같이 있지만 사실상 독립된 분과 학문처럼 작동해온 분절성, 그리고 한반도 분단체제라는 결정적 현재성과 그것을 극복한 미래에 대해서는 입과 귀를 막아버린 분단성을 ‘기원’의 특징이라 규정하였다.

저자는 한국사 연구의 역사를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의 맥락에서 분석하면서, 태동(1950년대), 형성(1960년대), 분화(1970~1980년대)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태동: 한국전쟁 이후 이병도를 필두로 한 문헌고증사학이 한국사 학계의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관학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학계의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일본과 북한 그리고 서구 학계 등의 동향과 일제강점기 조선학운동의 흔적에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사를 ‘내면적’으로 파악하려는 흐름이 태동한 것이다.

형성: 1960년대 들어 한국사 학계에는 문헌고증사학과 다른 경향인 내재적인 발전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흐름이 새롭게 안착하였다. 로스토와 라이샤워식 근대화론의 유입과 주체적 수용 노력, 4.19혁명으로 촉발된 민족주의 열기 속에서 한국사를 새롭게 연구하려는 경향은 1967년 한국사연구회라는 학술공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일본인이 주조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역사인식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며 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연구를 구체화하였다.

분화 1: 197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박정희 정부가 주창한 관제적 민족주의 역사학의 국난극복사관(=주체적 민족사관)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내재적 발전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연구해왔던 사람들, 특히 한국사연구회 회원들은 이들과 어떻게 관계 설정을 해야 할지를 놓고 내부균열을 일으켰다. 한편에서 박정희 정부의 관제적 공공 역사인식과 친연성을 유지해가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분단을 발견하여 분단시대(분단체제)를 자각하고 민족 속의 민중을 주체로 재인식하며 민주적 공공성을 추구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후자는 다시 두 흐름으로 나누어져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란 ‘학술장’을 통해 서로 경합하면서 각자의 공공 역사인식을 다듬어갔다.

그 과정에서 창작과비평 그룹은 ‘민중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분단시대라는 역사의 현재성을 망각하지 않고 역사의 주체로 민중에 초점을 둔 ‘비판적 한국학’을 제창하였다. ‘주체적·내재적 발전’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구체적 자기화’로 ‘독자적인 해석’의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80년 ‘서울 봄’과 5.18민주화운동을 거치며 한국의 현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민중사학’을 제창하며 민중을 변혁의 주체로 내세우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한국사회의 현재적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사적 유물론을 역사연구의 방법으로 도입하여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의 맥락에서 접근해온 연구는 한국의 한국사 학계에서만 개별적으로 고립된 채 진행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학사적인 분석은 사실상 국가 단위로 이루어져왔다. 단일 국가에 시선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시선이 특정 시대로 제한된 경우도 많았다.

한국사 학계에서 내재적 발전에 입각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인데,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가 한국에서만 조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이미 그러한 접근법이 연구에 적용되고 있었고, 일본에서 비판적 조선사학을 지향한 사람들은 1960년대 들어 북한과 한국에서의 연구를 파악하여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사람 간 직접 접촉이든 글을 통해서든 아니면 사람과 글을 동시에 대면하든, 시대적 상황에 따라 국제 교류와 접촉 방식은 다양하였다. 저자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이 과정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지적 연계망’이라는 시야에서 해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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