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갯벌과 출렁이는 갈대밭…하늘이 내린 정원 순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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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갯벌과 출렁이는 갈대밭…하늘이 내린 정원 순천만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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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전남 순천 순천만

 

                          겨울의 순천만 갈대밭. 하얀 솜 같은 갓털을 단 갈대열매들에 눈이 시리다.

소설가 김승옥은 이곳을 무진이라 했다. 무진(霧津), 안개나루라는 뜻이다. 소설속의 무진은 단호한 슬픔이었다. 괴어서 썩어가고, 그래서 벗어나려 하고, 그러나 또다시 어둠과 마주치는 삶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주인공처럼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40년도 더 지난 지금, 그의  무진에 서서 나는 무진(無塵)이라 우겨본다. 고대의 이상향 속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이라고, 세상으로부터의 망각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또한 여행이란 그런 게 아니겠냐고, 자기중심적인 천연덕스러움으로 우겨보는 것이다. 순천만은, 아니 무진은, 그토록 비현실적이다.   
 

                                            우명마을 입구 도로에서 내려다 본 순천만 습지.

순천의 동천과 이사천의 합류지점에서부터 순천만의 갯벌 앞부분까지가 죄다 갈대밭이다. 170만평에 달한다는 갈대밭은 대대동 선착장을 중심으로 가장 많은 군락을 형성하고 있고 데크 산책로가 갈대밭 사이를 가르고 있다. 풍경은, 정지되어 있다. 바람도, 갈대의 흔들림도, 수로의 물도, 시간도, 흐르기를 멈춘 듯하다. 무진교 위에 오른쪽 발을 놓자, 비로소 시간이 스 스 스 준동한다. 서쪽 하늘에서 빛나는 햇빛이 이마를 덥히고, 소금기를 머금은 차가운 겨울바람이 피부를 스친다. 나른한 청량감이다. 손잡은 연인들, 멋쩍게 간격을 둔 남녀, 한 무리의 청년들이 갈대 사이를 걷는다. 아이들은 콩 콩 소리 내며 뛰어간다. 화들짝 놀란 어미가 급히 저어하며 뒤따른다. 석탄 빛의 뻘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뻘이 깊다’라는 말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두려움을 준다. 5천 년도 더 넘은 이 땅에 전 세계의 습지 중 가장 많은 희귀 새들이 산다. 새들이 머무르고 날아가고, 갈대의 땅속줄기는 지금도 습지를 파고들어가고 있다. 바람은 갓털을 단 갈대의 종자를 실어 나른다. 습지와 이름도 모를 수많은 미생물들과 새들과 바람과 갈대와 햇빛이 티끌만한 이기심도 없이 함께 있다. 바람이 불자 갈대들은 일제히 한쪽으로 고개를 꺾으며 저들의 눈부신 목덜미를 드러낸다. 겨울은 그네들의 목덜미를 밟고 돌진해 온다. 

 

             갯골 깊숙이 숨기듯 배를 정박해 두었다.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 배는 보물일 게다. 

순천은 작가 김승옥의 고향이다. 1940년 ‘사상계’에 발표된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순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1967년 개봉된 ‘안개’다. 신성일과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안개’는 매우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남녀의 정사 장면이 가위질 없이 검열을 통과했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그때가 60년대, 텔레비전이 각 가정에 도입되기 시작할 때였고 영상부분에서도 변혁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60년대에 발표된 영화는 무려 1500편에 달했다. 김수용 감독은 자신의 69번째 영화였던 ‘안개’에서 가능한 모든 카메라 기술과 편집을 동원해 문학이 영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을 했다고 한다. ‘문예주의 감독’이라 칭해질 만큼 문학을 사랑했던 감독 김수용과 영화를 사랑했던 작가 김승옥이 만나 ‘한국영화의 표현 영역을 한 단계 높인 영화’라 평가받는 ‘안개’를 만들어 냈다. ‘무진기행’의 배경은 순천이지만 ‘안개’의 촬영은 순천이 아닌 김포에서 이루어졌다. 김수용은 영화를 위해 순천을 찾았지만 순천만은 영화의 중심 공간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고 한다. “순천만은 너무 그림 같아.”  

 

                                 갯일을 나갈 때 몸을 의지하는 뻘배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데크는 갈대밭을 가로질러 전망대가 있는 용산에까지 이른다. 용이 누운듯하다 하여 용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순천만을 조망하는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사진가들이 5대 절경으로 꼽는 순천만의 일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용산을 오르는 발걸음에 조급한 속도가 따라붙는다. 가파른 계단을 열 걸음도 옮기기 전에 턱 하고 숨이 찬다. 능선을 타자 숨소리는 조금 편안해진다. 일각마다 짙어지는 대기의 명도가 나무둥치 사이로 갈마든다. 일제 사격을 기다리는 잠복병들처럼 숲속 곳곳에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다. 모두가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태양이 잠시 구름을 피할 때 마다 수로는 그 곡선을 드러내고, 한 척의 배가 수로에 새긴 긴 포말이 반짝거린다. 감파랗던 하늘이 붉게, 보랏빛으로, 그리고 이윽고 감청을 머금은 먹빛으로 변하는 동안 다양한 음조의 카메라 셔터음들이 불꽃놀이처럼 터져 나온다. 갯벌과 습지는 그보다 먼저 성급히 깊은 뻘에 잠겼다. “이제 끝났네.”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삐그덕 삐그덕 굳은 무릎을 펴며 일어선다. 여기저기 보이지도 않던 곳에서 쑥 하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놀랍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매일 일몰을 기다리고, 맞이하고, 헤어진다.   
  

                   장산둑 아랫길에 들어서면 양쪽에 빼곡한 갈대들이 열어 놓은 길과 하늘이 전부다.

순천에는 남도삼백리 길이 있다. 총 11개 코스가 있는데 제1코스가 순천만 갈대 길이다. 용산전망대, 데크 산책로, 대대포구, 탐조대, 철새쉼터, 장산둑, 장산마을, 우명마을을 거치는 총 길이 16㎞, 5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길이다. 우명마을 입구에서 내려다보이는 순천만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다. 장산마을 일대에서는 오래된 염전터와 갯골에 숨겨놓은 듯 정박되어 있는 배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갯일을 나갈 때 몸을 의지하는 뻘배 등 바닷가 사람들의 생활을 볼 수 있다. 그러다 장산둑 아랫길에 들어서면 양쪽에 빼곡한 갈대들이 열어 놓은 길과 하늘이 전부다. 둑 위로 오르면 바다와 갈대밭과 갯벌이 아래로 펼쳐져 내 키가 훌쩍 자라난 느낌이다. 곧게 뻗은 둑길을 바라보면, 망연해진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기꺼운 신념도 생긴다.

 

                            장산둑 위에 오르면 바다와 갈대밭과 갯벌이 아래로 펼쳐진다. 

겨울날의 어둠은 빠르게 온다. 별들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낮은 집들을 밝힌다. 어두운 산길을 지나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졸음이 온다. 그랬다. 김승옥은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를 섞으면 가장 상쾌한 수면제가 만들어질 것이라 했다. 무진을 벗어나 잠시 잊고 있었던 진세로의 복귀가 무거웠던지, 혹은 무진의 수면제가 제 효과를 발휘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찡그림 없는 졸음임에는 분명하다. 가까운 휴게소에서 잠시 단잠을 잔다. 꿈같은 하루가, 한해가, 지났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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