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올해는 맞고 작년에는 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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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올해는 맞고 작년에는 틀립니다
  •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
  • 승인 2022.01.01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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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영 칼럼]

교수님, 기원후 이천년 하고도 스물두 번째 새해입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선배들이 그랬듯이, 이 새해에 새 꿈을 꿉니다. 이조차 안하면 인생에 송구해서요. 작년에는 나라 안팎이 참 뒤숭숭했지요. 선조들의 흑사병 역사가 현생 지구 공동체 거주민들의 일상이 되어, 코로나19 역병과 2년 연속 분투했고요. 게다가 한반도 남녘 우리네는 대선을 앞두고 못 볼 것, 못 들을 것을 많이 보고 들었습니다. 옛적 요임금 때 허유는 왕위를 양위해준다는 말에 귀를 씻었다는데, 우리 귀는 국가 수장되려는 출마자들의 픽션급 스토리텔링으로 웬만한 충격에 내성을 키웠습니다. 

올해는 작년과 다르기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기’ 바랍니다. 소시민인 저는 소확행을 꿈꿉니다. 길을 걷다가 들꽃을 보면 고개 숙여 풋풋한 향기를 맡는 행복, 종종 하늘과 별, 구름과 바람의 운행을 느끼는 자유 같은 거요. 연구실에 가득한 문헌 속 지식과 진실에 경탄해도, 이는 단순히 두뇌에 저장될 뿐 삶에 체화되지 않았음에도 마치 이를 실천하며 사는 양 착각하여 입으로만 반복하는 지식인으로 전락하지 않겠다는 꿈같은 거요. 매일 만나는 한 생명, 한 생명의 존귀함을 알고 공감하고픈 꿈 말입니다.

소싯적에 진리를 찾겠다고 문학과 철학과 종교문헌들을 뒤지다가 중학교를 등지고 입산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사는지 이유를 알아야만 살리라고 결심했던 단식 나흘째에 나름 깨달았다고 생각했지요. 폴짝폴짝 기뻐 뛰면서 산등성이 잡초와 나뭇잎들이 온통 바람에 나부끼며 외치는 생명의 환희, 반짝이는 개울물의 ‘생의 찬미’를 더불어 누렸는데, 어느새 현생에 뒤덮인 인공조명들에 눈과 마음이 흐려져 자연이 노래하는 생명의 기쁨을 거의 잊고 지냈습니다. 미련한 업적중심 일중독자 지식인 바보로 살았습니다. 

길 헤매다 만난 어느 기독교인의 인생관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사흘간 지상에 온 여행객이고 머무는 곳은 각기 달라 더러는 혹한이나 폭우 속 길가 노숙자로, 소수는 궁전이나 7성급 호텔, 대부분은 텐트에서 지낸답니다. 그 중 재산가도 있어 소유물을 영구보존 가능한 다이아몬드로 인식해 후사를 위해 아끼지만 실상 재산은 집안 가득 쌓인 쇠고기 같아서 일시적 소유만 가능하기에 이웃과 나누는 것 외에는 바른 사용법이 없고, 시간이 되면 우리는 떠난다고요. 누구에게나 타고난 고난과 역경을 감소, 소멸시킬 기회가 계속 주어지건만, 흔히들 되레 악화시키는 선택을 하며 산다고 합니다. 

교수가 누리는 특혜가 큽니다. 생명의 각양각색 만화경처럼 빛나는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직업적 특혜에 감사하고, 매일같이 제자들과 동료 교직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진데요, 더 결함 많은 제가 그들의 부족함을 때로 불평하면서 한 번뿐인 욜로(YOLO)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군 입대, 생활고, 인생고로 휴학하는 학생들과 밥 한 끼라도 꼭 나누겠다고 마음먹고도, 시시때때로 서류와 문헌을 1순위로 삼는 어리석은 선생이었습니다. 그래도 학령인구 감소로 타격 입은 지방사립대에 재직하다보니, 학생 한명, 한명의 귀함을 빨리 절감하게 됨에 감사합니다. 

옳고 그름, 정의와 평등은 드물고 사회적 신분 차별과 불공정이 현저한 사회라고 낙담하는 제자들에게 제가 물려받은 사회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은 사회를 물려주는 선배임이 부끄럽습니다. 전에 거주했던 나라에서처럼 종종 산책길에 반갑게 인사했던 동네 아저씨가 상원의원임을 아는 데 1~2년 걸리고, 허름한 셔츠 차림으로 낡은 트럭을 몰던 이웃동네 할아버지가 세계 1백대 부호인 자선가임을 아는데 2~3년 걸렸던 그런 사회를 물려주길 꿈꿉니다. 대통령이 누구이고, 장관과 국회의원, 부호들이 누구인지 별로 관심 없이 살만한 사회 말입니다. 그런 사회 형성이 먼저 태어난 우리들의 몫이니 함께 세워야지요. 정치적 방법보다는 교육적 방법으로요.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세상을 위해서요.

살면서 서로 같은 상황과 형편에 처했어도 엇비슷한 경험을 통해 어떤 이는 최선의 것을, 어떤 이는 최악의 것을 배우더군요. 역경을 통해 최선의 것을 배운 이가 교육자, 종교인, 사회 지도자, 국가 수장이 되는 사회를 꿈꿉니다. 고난 중에 자기 안에서 최악의 속성들을 꺼낸 이가 이를 숨기는 탁월한 위선적 능력을 발휘해 교육, 종교, 경제, 정치 지도자가 되는 나라만은 막고 싶습니다. 그럴듯한 말과 태도로 위장하는 지도자들을 꿰뚫어보며, 바른 사회를 세우는 교육과 훈련의 힘을 믿어봅니다. 이마저 믿지 못하면, 올해라도 교수를 그만두고 연구에 전념하거나 교육계 외 직종으로 바꿔야 할 터이니. 지난 수십 년마냥 정초에 꿈을 꿉니다.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미국 델라웨어대학(University of Delaware)에서 미술사 석사와 박사 학위 취득. 국립 스미소니언박물관 Fellow와 국제학술자문위원, 미국 국립인문진흥재단(NEH)과 루스(Luce)재단 Fellow, 중국 연변대학 객좌교수, 일본 동지사대학 국제대학원 강의교수를 거쳤으며, 국내에서 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원광대 평생교육원장, 대외협력처장, 국제교류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원광대 조형예술디자인대학 미술과 교수로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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