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근태 고문 사실을 폭로한 인재근의 영문 성명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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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근태 고문 사실을 폭로한 인재근의 영문 성명서 공개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12.28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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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 서거 10주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한석희)은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 서거 10주기를 맞아 남편 김근태의 고문 사실을 최초로 폭로한 인재근의 영문 성명서를 12월 28일 공개한다. 1985년 9월 26일 김근태로부터 고문 사실을 전해 들은 부인 인재근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에서 김근태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이 자료는 인재근의 폭로 내용에 근거해 영문으로 작성돼 미국 사회에 유포된 것이다. 

1985년 8월 24일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았던 김근태는 구류 마지막 날인 9월 4일 새벽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9월 20일까지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그의 가족과 동지들은 초조해졌다. 부인 인재근은 언젠가는 조사받는 곳에서 검찰로 이송될 것이라 예측하고 검찰청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이러한 예측이 적중해 9월 26일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극적으로 김근태와 마주치게 됐다. 5층에서 4층으로 내려가는 1분여 동안 두 사람을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이때 김근태는 고문 사실을 인재근에게 알렸다. 김근태는 훗날 ‘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 같은 것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고문 사실을 알게 된 인재근은 기독교회관으로 찾아가 자신이 김근태로부터 들은 사실을 알렸다. 이를 통해 김근태에 대한 야만적인 고문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 내용이 미국에 있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1983년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 시기 설립한 단체)에 전해져 미국 사회에도 알려졌다.

이날 공개한 사료는 미국 사회에 한국의 열악한 인권 현실을 알리게 된 사료이다. 1985년 김근태 고문 사실은 미국 사회에도 많이 알려졌으며, 이는 미국 사회에서 한국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조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근태는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이 자료는 김근태 고문 사실이 미국 사회에 알려진 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김대중이 2차 미국 망명 기간 중인 1983년 설립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전두환 정권의 각종 문제점을 미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렸고, 이를 통해 한국 민주화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미국 사회에 형성되도록 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김근태 고문과 관련해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큰 성과를 거둬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고 있던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 큰 부담을 줬다.

 

[공개 자료 내용(전문 번역)]

 

한국에서 온 문서

1985년 9월 27일
김근태의 아내 인재근

 

제 남편이 경찰의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 의장을 지냈고 현재 이 단체의 자문 역할을 하고 있는 김근태의 부인입니다. 

남편은 9월 4일 오전 5시 30분, 경찰의 대공수사국 요원들에게 끌려가서 7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습니다. 20여 일 동안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조급해진 저는 검찰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가 9월 26일, 오후 2시 30분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검찰직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는 걷기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많이 다쳤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심합니다, 너무 심하게 맞았어요." 그는 계속해서 9월 4일부터 20일까지 약 10번의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단단히 묶인 그의 몸을 향한 전기 충격, 고추와 소금 등을 넣은 물을 삼키도록 강요당하는 등의 물고문은 한 번에 5시간에서 7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이 기간 동안 전혀 잠을 잘 수 없었고, 고문을 당한 날에는 음식 또한 얻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고문에 그의 건강이 악화된 관계로 고문 시간은 3시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검찰청사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남편으로부터 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대기실에서 나는 남편의 발뒤꿈치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낯익은 발뒤꿈치가 너무 심하게 부서져서 내 가슴을 울렸습니다. 비록 저는 제 눈으로 남편의 몸을 볼 수는 없었지만(남편이 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의 팔꿈치 주변에는 상처가 가득하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은 9월 20일에서 26일 사이에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아마 제가 남편을 만났을 때 전보다 상태가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피투성이인 고문실에서 어떤 일을 겪어야 했는지 신은 알고 계시겠죠!

저를 두려움과 분노에 떨게 만든 것은 남편에게 간신히 전달한 옷들 중에서 속옷이 한 벌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남편의 속옷이 피로 얼룩진 것이 확실합니다. 이제 저는 왜 제 남편이 검찰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는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왜 그것들을 감옥으로 데려가야 했는지요. 

공식적으로 등록된 이 잔인한 폭력배 집단이 어떻게 우리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이 끔찍한 고문를 실행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누가 "대한민국"을 법아래 있는 국가로 지칭할 수 있을까요? 무고한 사람들을 조종하고 고문을 통해 범죄를 만들어 내는 수사기관 들이야말로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남편이 겪는 고통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한국 국민들에게 심각한 위협이자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 폭력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7살짜리 아들에게 이 무서운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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