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도 ‘채송화 리더십’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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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도 ‘채송화 리더십’이 필요하다
  • 권수영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 승인 2021.12.26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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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대한민국 청년들이 모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요즘 여러 대선후보들은 청년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버선발로 달려간다. 선대위원장으로 청년을 영입했다면서 홍보를 펼치다가, 모두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주기도 했다. 대학에서 청년세대를 자주 접해 온 교수들은 이 모습이 참 씁쓸하다. 

나는 정치지도자들이 정말 청년들의 속마음을 알려면 어떤 행보를 해야 할까 생각에 잠기곤 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일단 기자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을 자주, 은밀하게 만나야 한다. 만약 카메라가 없는 곳이라면, 적어도 즉석에서 그럴싸한 정책을 공표할 필요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심으로 경청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 MZ 세대들끼리 나누는 메시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최근 나는 그 곳에서 이들이 선망하고 갈구하는 리더십의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일명 ‘채송화 리더십’이었다. 채송화는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한 드라마에 등장했던 여자 주인공 이름이다. 채송화는 한 종합병원 신경의과 분야에서 일하는 임상 교수로 나온다. 그의 어떤 점이 젊은 세대로부터 닮고 싶은 리더, 따르고 싶은 리더로 만드는 걸까?

무엇보다 ‘채송화 리더십’은 리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제5공화국 시절, 모든 채널마다 뉴스의 첫 장면은 대통령의 근황을 전하는 것이 대원칙이었던 시절을 떠올려보라. 그래도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는가? 내가 보기에 정치지도자들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늘 리더 자신이 돋보이는 일에 그야말로 진심이다. 보통 선거마다 어느 후보든지 홍보 전략에 가장 많은 돈을 쓴다. 

드라마에서 채송화 교수는 어느 날 독일에서 온 유명 음악가의 수술을 맡게 된다. 이 VIP 환자의 모친은 진상 캐릭터로 나온다. 수술을 앞두고 의료 스태프에게 온갖 불만을 퍼붓는다. 수술 전 환자를 보러간 채송화 교수를 향해서도 “수술할 교수가 왜 나타나질 않느냐“면서 호통을 친다. 빙그레 웃으면서 채송화는 자신이 수술 집도의 교수라고 소개하자, 환자의 모친은 그만 당황하고 머리를 숙이게 된다.  

채송화 리더십은 여기서부터 그 빛을 발한다. 그는 레지던트 전공의들을 괴롭혔던 환자 보호자를 향해 상처 입은 스태프의 자존감을 세워주기 시작한다. 자신만 의사가 아니라, 레지던트들도 다 전공의이고, 여러 해 수련 받아온 훌륭한 의사라는 점을 강조한다. 리더로 인해 주위에 있는 이들이 갑자기 빛이 나는 순간이다. 채송화 리더십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장면에서 채송화 교수는 함께 수술을 도왔던 스태프들에게 연신 전화를 걸어댄다. 특정 일자에 시간 약속을 잡으려 하는데, 통 쉽지가 않다. 채송화 교수에게 어떤 일인지 물어도 중요하지 않다며 말하지 않는다.

병원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채송화 교수가 어려운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독일의 유명 방송국에서 집도의인 채송화 교수를 인터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개인으로도 영광이지만, 병원 홍보에도 엄청난 호재다. 그런데 머지않아, 뜻밖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채송화 교수가 인터뷰 약속을 전격 취소했다는 것. 수술을 함께 도왔던 전공의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이유를 물었다. 채송화 교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너희들이 시간 안 된다고 했잖아? 다 같이 고생했는데, 어떻게 나 혼자 인터뷰를 해? 그래서 취소했어.” 

채송화 리더십의 온기가 사람들 마음에 뜨겁게 전달되는 순간이다. 그를 따르던 전공의들뿐 아니라, 드라마를 보았던 젊은 세대가 채송화 리더십을 외치게 된 놀라운 장면이었다. 이제 우리 정치 지도자들도 말로만이 아니라, 공감의 행동으로 기죽은 청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리더로 변신할 수는 없을까? 비호감 선거라는 오명 속에서 정말 ‘채송화 리더십’이 보고프다.


권수영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상담코칭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Ph.D.(종교와 심리학 전공)를 받았다. 2020년 3월부터 전국의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들의 정신건강 모니터링을 위한 <연세대 가습기살균제 보건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나쁜 감정은 나쁘지 않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아이 마음이 이런 줄 알았더라면』, 『치유하는 인간』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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