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준비' 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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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 준비생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
  • 승인 2021.12.26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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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한 학기 수업을 마칠 때면, ‘이 과목에서 한 학기 동안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정리해보라’고 학생들에게 요구한다. ‘공부한 것이 없으면, 수업을 다시 들어야 할 것’이라는 협박 때문인지 학생들은 경험과 실재의 구별,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변증법, 입법자와 해석자, 설명적 비판 같은,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개념들을 동원하며 응답한다.

‘수업부담이 너무 크다’는 학생들의 항변은 선생 노릇을 시작한 때부터 듣던 것으로, ‘한 학기 수업에서 1천 페이지(그래 봐야, 책 서너 권 분량이다)는 읽고 써야 할 것 아니냐’고 구슬려 왔다. ‘이런 기초적이고 반성적인 공부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스펙 쌓기의 절박함을 앞설 수는 없다’고 호소하는 학생을 ‘대학이 무엇 하는 곳이냐’는 반문으로 윽박지르면서도, 속으로는 현실의 무게를 모두 학생들에게 떠넘기는 무책임과 무기력을 자책해 왔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취업준비준비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느냐’고 한 학생이 다시 물으며 (‘취준생’이 아니라) ‘취준준생’이라는 신조어를 알려준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근래 4년 만에 순탄하게 졸업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휴학한다며 인사하려 찾아온 학생에게 계획을 물으면 하나같이 ‘스펙을 쌓기 위해 서울(!)에 가서 학원에 등록하고 공부할 것’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스펙’을 쌓으며 준비한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 이외에는 취업 지옥을 헤쳐나갈 방편이 없는 것이다. ‘서울의 유수한 대학들에서는 취업 준비에 필요한 프로그램들도 제공하고 있지만, 등록금이 싼 탓인지 우리 대학에는 그런 것도 없다’고 학생들은 하소연한다. 지방(!)대학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마련하기에는 돈도 부족하려니와, 무엇보다 ‘전문가’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휴학 기간은 대부분 1년을 넘는데, 그동안 소용될 학원비와 생활비를 먼저 마련하는 ‘취업 준비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준준생을 거쳐야 하고 휴학기간은 두 배로 늘어난다. 청년의 불안정 노동은 그렇게 확산하고 지속한다. 

이런 사정은 언뜻 사회적 약자로서 청년세대에 대한 ‘세대 차별’로 보이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청년 배제’를 규탄하고 ‘청년 대표’를 호출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청년의 이런 극심한 불안정에 관심을 갖고 해소를 호언하는 것은 필요하고 권장할 일이더라도, 청년을 호명하며 세대를 편 가르는 전략들은 (세대 편 가르기를 넘어 심지어 노골적으로 청년 여성과 청년 남성을 편 가르는 전략까지 등장했다) 오히려 상황을 호도하고 사태를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청년 모두가 노동시장에서 불안정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장년이나 노년 모두가 사회적으로 안정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다. 청년을 불안정 노동으로 내모는 것은 기성세대가 아니라 고삐 풀린 이윤추구와 시장전제주의이며, 기성세대조차도 그 압박에서, 압박의 정도에서는 차이가 있고 그 차이도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벗어나 있지 않다. 후보자들은 너나없이 ‘공정’을 약속하지만, 그 귀결은 기껏해야 ‘불안정의 공정’이나 ‘공정한 불안정’일 수밖에 없고 그것조차 제한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대통령 후보는 ‘회사의 매출을 올리고 회사에 돈이 되는 걸 학생들이 배워왔느냐’고 다그치며 ‘학교에서 이걸 잘 가르쳐서 공급해줘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후보는 대학이 돈이 되는 걸 잘 가르쳐서 ‘공급’하면 즉각 회사들이 안정 노동의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그래서 취준생과 취준준생이 사라질 것으로 믿는 모양이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믿지만, 소비를 위해서는 수요가 아니라 ‘유효수요’가 필요하며, 이 때문에 복지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대학이 돈이 되는 걸 가르쳐야 한다’고 훈계하는 정치권력에게 승자독식의 시장전제주의를 제어하며 안정 노동에 대한 유효수요를 창출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것이다. ‘돈이 되는 걸’ 가르쳐야 하는 대학에서 ‘기초적이고 반성적인 공부’는 쓸모없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방해가 되는 지적 사기나 허영일 것이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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