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여백을 남긴 밀도 있는 아렌트 사상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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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여백을 남긴 밀도 있는 아렌트 사상의 지도
  • 정소라·전남대 철학 박사
  • 승인 2021.12.1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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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_ 『한나 아렌트와 차 한잔: 그의 사상과 만나다』 (김선욱 지음, 한길사, 552쪽, 2021.10)

 

『한나 아렌트와 차 한잔』이라는 친숙한 제목의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한길사’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였다. 평소 존경하는 김선욱 교수님의 이 책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구매를 했고, 받고 나서는 열 일을 제쳐두고 이 책을 자꾸 펼쳐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을 마친 후에 이 책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밀도가 상당히 높으면서도 사유의 여백을 남겨 둔 배려심 깊은 아렌트 사상의 지도”이다. 역시 진정한 고수는 여유롭다. 언성을 높일 필요도, 조급하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지 않아도 그 내공이 드러난다. 저자는 이 책을 “학술적 저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아렌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안내서로 기획”(9)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의 생각이 아렌트의 생각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인다. “아렌트와 차 한잔 나누며 대화”를 해보자는 저자의 권유대로 필자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즐겁게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여유 있는 깊이와 밀도, 술술 읽히는 가독성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필자가 만일 학위논문을 쓰기 전에 이 책을 지도 삼아 먼저 읽었다면 덜 헤맸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지만, 부족한 학위논문을 마친 후에라도 이렇게 서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꼼꼼히 읽고 발표하게 되어 기쁘다. 이 책으로 하여금 초심자들도 아렌트 사상에 오해 없이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두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대중적 안내서의 성격으로 기획되었다 할지라도 이 자체로 이미 아렌트 연구의 큰 기여이자 성과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저자가 배려하고 있는 것처럼 “독자들이 생각하며 읽을 여지”(14)를 남겨두고 있으며, 여러 장과 절로 쪼개져 있어 차를 마시면서 조금씩 혹은 한꺼번에 많이 읽을 수 있게 구성되어있다. 각 절은 여러 부분으로 다시 쪼개져 있는데, 긴 호흡으로 읽을 필요가 없어 가독성을 더욱 높였다. 또한 저자의 생각은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어 아렌트와 저자의 생각이 혼동되는 것도 미연에 방지하고 있으며, 이 책이 “또 하나의 해석”(15)일 수도 있겠다는 겸손한 당부도 잊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이 저자는 바람이라고 말했지만, “아렌트의 원 저술로 나아가는 좋은 사다리”(15)라는 점은 아렌트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 논문을 쓴 필자가 적극적으로 보증할 수 있다.


아렌트 정치사상의 세 시기

저자는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0-12). 첫 번째 시기는 정치의식이 형성되어 『인간의 조건』을 통해 정돈된 정치사상을 제시하기까지의 시기이다(저서들: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라헬 파른하겐: 한 유대인 여성의 삶』,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두 번째 시기는 『인간의 조건』의 여러 주제를 개념적으로 발전시키거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하여 자신의 정치사상을 심화한 시기다(저서들: 『혁명론』, 『과거와 미래 사이』, 『공화국의 위기』). 세 번째 시기와 두 번째 시기는 겹쳐 있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때부터, 『정신의 삶』이라는 저술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은 기간까지이다(저서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임과 판단』, 『정신의 삶』, 『칸트 정치철학 강의』).

저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기로 구분한 것에 대해 아렌트 사상이 발전하는 두 흐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두 번째 시기라고 설명한 방식으로 아렌트의 정치사상이 펼쳐지는 동시에 세 번째 시기라고 설명한 방식의 철학적 사상이 시기적으로 겹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두 흐름이 융합해야 했던 것이 『정신의 삶』이며, 특히 그 3부인 『판단』에서 두 물줄기가 만나야 했다. 아렌트의 죽음은 이 3부를 공백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렌트의 조교였던 로널드 베이너가 강의록 등을 참조하여 만들어낸 유고집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우리는 안타깝게도 『판단』의 얼개를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이러한 아쉬움 때문에 연구자들에게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게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의 전반적인 구조와 내용

저자는 서문에서 “아렌트를 이해하려고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렌트를 정치적 사유의 깊이로 끌어들인 근본 경험들”(9)이라고 말한다. 이 경험들은 아렌트의 젊은 시절의 삶과 생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다소 잘못 오해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저자는 이 책의 순서가 아렌트 사상의 형성과 발전의 흐름을 따르지는 않으며, 아렌트 정치사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부분을 앞에 배치했다고 설명한다(13). 총 11장과 부록으로 구성된 이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장은 아렌트의 정치 개념을 이해하는 내용이다. 2장은 정치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3장은 아렌트 정치사상의 핵심인 정치적 자유 개념과 그와 연관된 주제들인 법, 혁명, 시민불복종 등을 다루고 있다. 4장에서는 아렌트의 주제를 바탕으로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고민하게 되는 행복, 혁명, 팩트, 프라이버시, 용서 등을 다루고 있다. 5장에서는 아렌트 정치사상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판단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김선욱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부터 다뤄지고 있는 가장 전문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렌트가 직접 다루지 못하고 과제로 남긴 문제에 대한 발전적 해석이 담겨 있다.

6장부터 10장까지는 유대인으로서 아렌트가 고민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선 6장은 반셈주의(반유대주의)의 등장과 그에 대응하는 시온주의에 관해 다루었다. 7장은 아렌트가 유대인이 어떤 모습으로 과거를 지내왔고, 또 미래는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를 사유한 부분이 담겨 있다. 8장은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토대를 만들어준 반셈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논의를 다루고 있다. 9장은 아렌트가 설명하는 나치 전체주의의 여러 특징과 요소들을 가급적 아렌트 원전을 중심으로 안내하고 있다. 10장에서는 아이히만 재판과 관련하여 살펴볼 부분들과 악의 평범성 개념의 의의를 짚고 있다.

11장에는 뉴스쿨에서 지금도 강의하고 있는 리처드 J. 번스타인, 아렌트의 마지막 조교이자 아렌트 유고 출판을 주도해온 제롬 콘과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개인적으로 필자에게는 아주 유익하고 반가운 자료가 아닐 수 없었는데, 저자가 직접 인터뷰해서 대화를 녹음하고 정리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독자에게 아렌트를 좀더 가깝게 느끼게 해주고자 했다는 저자의 친절함이 여실히 잘 드러났던 대목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록에는 아렌트가 박사학위논문을 발전시켜 출간하려고 했지만 미완으로 남은 것을 후대의 편집자가 정리해 출간한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정리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들이 그 중요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게 다루어져 있는 편인데, 그 이유는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 책이 아렌트의 정치사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아렌트의 관심이 정치보다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있었고, 이 같은 관심이 변화한 것이 ‘홀로코스트’의 실존적 위기에 직면한 정치 현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 책이 아렌트의 지적 여정의 출발점을 안내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와의 대화와 필자의 단상들

이 책 11장 대화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제롬 콘의 말은 아렌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강의에 아주 진지했고 항상 긴장된 상태였습니다. 아렌트는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도록 이끕니다. 아렌트는 가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염려하지 마세요. 당신이 세상에 나타내고 싶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세요. 그게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만들어줍니다.” (437)

그녀는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을 존중하며, 각자가 그 개성을 드러낼 때 세상이 혼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조금 더 낫게 해준다고 독려했다. 이 말은 우리들이 각자 다른 개성을 애써 교정하거나 획일화시키지 않아도 좋다는 위로로 들리기도 한다. 만약 이 다름에서 심각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의견의 충돌이 모든 경우에 비극인 것은 아니다. 갈등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인간사에서 필연적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가 미래지향적인 논의가 될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는 늘 순탄하거나 소통적이지는 않다(28). 하지만 ‘진리’가 대화를 종료시키고 협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에 비해, ‘의견’은 대화와 타협으로 길을 찾게 한다(66). 모두에게 공통된 사실(팩트)을 중심으로 다양한 관점이 반영된 의견을 매개로 삼아 대화하고, 좋은 의견을 발견하는 것은 곧 ‘정치의 예술’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66). 이것은 물론 의사소통의 긍정적인 모습이다. 개인 간의 의견은 다를 수도 있고 그 차이가 끝내 극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68). 그리고 공동체의 리더가 독단에 사로잡힌다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며, 자기주장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게 될 지도 모른다(67). 아렌트는 이 대화가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며, 쌍방이 함께 하고 서로 배우는 것이어야 한다고 알려준다.  

아렌트는 사실 즉, 팩트에 대해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치적 의견의 형성과 정치적 판단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141). 아렌트의 시대에 거짓을 사실처럼 늘어놓는 것은 나쁜 정치가의 행위 또는 사악한 정치적 동기에서 유발된 것으로 여길 뿐 심각하게 다룰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시대에 대두된 탈진실(post-truth)의 문제는 양상이 매우 심각해 보인다. 이것은 인간사의 갈등 상황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생각하는 의사소통의 좋은 방향은 최소한 사실에 대해서는 검증하고 공유할 수 있는 상태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합리적 믿음뿐만 아니라 합리적 의심을 통해 팩트와 믿음 등을 잘 점검하고 교정하며, 다른 한편으로 현실을 더 나은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146). 이 모든 노력에서 사실과 진실은 중요한 토대가 된다. 물론 이 노력은 정치가나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 즉 우리 모두의 몫이다. 

특히 필자에게 ‘정치적 용서’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 책이 좋은 가이드가 되었다. 필자는 학위 논문에서 『인간의 조건』에 드러난 용서 개념이 기독교적일 뿐만 아니라 나이브한 것으로 지적한 바 있는데, 저자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용서가 우정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는 기독교적 기원과 거리를 두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164-65). 용서가 사랑이 아니라 우정과 연관된다는 점은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용서는 새로운 시작과 연결된다(166). 아렌트는 절대악, 즉 나치의 전체주의의 체제를 용서해야만 새로운 시작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절대악은 극복의 대상이지 화해와 용서의 대상은 아니다. 절대악은 그것을 “극복”한 후에라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아렌트는 ‘정치적 용서’는 개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간사라는 좀 더 넓은 맥락에서 기능하는 것으로 명백히 이해하고 있다(166). 아렌트는 물론 이와 같은 용서 개념을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에서 배웠지만, 이를 기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 예수’의 가르침에서 정치적 의미를 추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수에게서 ‘진정한 정치적 경험’(authentic political experiences)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판단의 특성에 대해서 시민의 정치적 판단이 곧 정치가의 의견으로 연결되고 전환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번스타인의 주장처럼 관찰자의 판단이 과거지향적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200). 이는 최근 필자가 아이리스 영의 통찰을 통해 ‘정치적 책임’ 문제를 숙고하는 가운데 생긴 변화이기도 하다. 영은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아이리스 매리언 영 지음, 허라금 외 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8)이라는 책의 3장에서 “죄와 책임: 한나 아렌트 읽기와 부분적 비판”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아렌트의 「조직화된 범죄와 보편적 책임」과 「집단적 책임」에서 분석되는 죄에 대한 판단과 책임 개념이 과거지향적으로 보이지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미래지향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고 논의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처럼 일어난 사건에 대한 판단은 곧 미래를 향한 의견과 연동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해석은 영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관찰자의 판단은 행위자의 판단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과거를 단죄하는 것을 넘어 미래의 행위를 더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와의 대화는 역시 예상한 것처럼 즐거웠다. 또한 저자의 안내는 전문적이면서도 친절했다. 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을 사다리 삼아 앞으로 더욱 성실하고 즐겁게 학문적 여정을 해나가리라 다짐해본다. 다시 한번 좋은 책을 써 주신 김선욱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정소라·전남대 철학 박사

시민자유대학 나람인문교실 강사
‘인문학으로 영화 읽기’ 활동가
puhamsor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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