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역사의 ‘발전’이고, 역사 발전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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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역사의 ‘발전’이고, 역사 발전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인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2.19 2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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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프레임에 갇힌 역사, 프레임을 깨는 역사』 (신유아 지음, 혜안, 228쪽, 2021.10)

 

이 책은 역사교사 15년, 교육부 역사교육지원TF 파견교사 경력의 현직 국립대학 역사교육과 교수가 제기하는 우리 역사교과서의 시각과 서술 방향에 대한 진지한 반론이다.

저자 신유아 교수가 이 책에서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현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들이 우리의 시각에서 역사를 본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한계’의 시각들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우리가 도대체 왜 ‘그런’ 의도를 갖고 우리 역사를 보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우리 교과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관점과 의도는, 아무리 보아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 교과서들에서 가장 중시하는 ‘근대’의 시작이 왜 우리와 전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인지, ‘근대화’는 언제부터 세계사의 절대 과업이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역사 발전의 기준을 ‘근대’와의 접근성에 두고 있는 것인지, 우리 역사교과서는 왜 이러한 시각에 매몰되어 우리 역사 곳곳에 ‘한계’를 심어둔 것인지, 이것이 과연 우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제안하는 바다.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우리 역사 속 ‘한계’들의 정체

교과서에서 우리의 역사는 언제나 쇠망을 향해 간다. 그 이유는 모두 ‘내재적’ 한계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지배층 분열이 ‘한계’이고, 부여와 가야는 연맹왕국의 ‘한계’ 때문에 멸망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어들여 대동강 이남의 영토만 확보했다는 ‘한계’가 있고, 신라는 폐쇄적인 골품제의 ‘한계’ 때문에 멸망했다. 조선건국은 역성혁명이라는 ‘한계’가 있고, 성리학적 윤리가 조선 사회의 발전을 막은 ‘한계’이며,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조차도 붕당을 모두 없애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소위 ‘근대’ 시기에 우리가 추진했던 모든 개혁은 심지어 동학농민운동마저도 근대사회에 대한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한 마디로, 우리 역사는 통일을 해도, 나라를 세워도, 개혁을 해도 전부 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역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들이 있어 준 덕분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그것에 실패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한 역사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될 공간이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의 역할이라는 것은 그들이 일본과 체결한 조약 이름 말고는 딱히 나오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근대화’의 성패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은 그 좋은 ‘근대화’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고, ‘근대화’가 도대체 왜 역사의 ‘발전’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저자는 ‘근대’의 출현으로 이전에 존재했던 인류의 모든 역사가 ‘전(前)근대사’로 전락하면서 이런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근대’ 이전에 이미 ‘근대’보다 더 빛나는 역사가 존재하였지만, 그런 ‘old’한 이야기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산물로 치부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마치 태초에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 땅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서양이 ‘근대’를 창안해내기 전에는 우리에게 제대로 된 ‘국가’도, ‘민족’도, ‘혁명’도, 그 어떤 찬란한 ‘문명’의 역사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이 단지 ‘서구중심주의’라 불리는 비교적 최신의 사조(思潮)만의 책임일까? 

잘 생각해 보면, ‘전근대사’에 ‘한계’를 설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쪽이 단지 ‘근대’ 이후 세계사의 주도권을 장악한 서양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때 ‘개발’된 식민사관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입각한 역사관에서도,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역사는 전부 타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역사관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서로 달랐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전근대사’를 공격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일치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경제결정론적 역사관의 영향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역사발전의 동력이라는 이 천재적이고 깜찍한 발상은, 세계사의 주도권을 서양에 넘기는 데 든든한 토대를 제공했다. ‘신석기 혁명’과 ‘산업혁명’은, 그래서 예사로운 작명(作名)처럼 보이지 않는다.   

[펜로즈의 계단] 펜로즈의 계단(Penrose Stairs)은 첫 계단과 마지막 계단이 연결되어 있다. 착시 때문에 첫 계단부터 마지막 계단까지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또는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오르막인줄 알고 올라갔는데, 내리막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을 무턱대고 믿은 우리 역사교과서이다. 

우리 역사교과서는 언제부터인지 조선후기를 서양의 ‘근대’에 가까이 가져가려고 안간힘을 기울여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었다. 문제는 이 역사관이 다소 철지난 1990년 전후, 그러니까 5차 교육과정 시기에 들어와 갑자기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 역사의 ‘발전’은 고려 말에 들어온 이앙법으로부터 설명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부농층의 성장 등 농민계층의 분화를 가져와 곳곳에서 ‘자본주의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설명이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의 ‘근대’가 서양으로부터 이식된 것이 아닌, 우리 내부의 변화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논리가 제공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과연 농법의 변화와 생산력의 증대일까? 

그렇다면 고려 말에 들어온 이앙법이 왜 300년이나 지난 조선 후기에야 널리 확산되었을까? 법으로 금지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지배적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법으로 이앙법을 금지한다고 해서 수백 년이나 얌전히 말을 듣고 있을 사람들인가? 그 많은 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거의 다 찾아내어 농사를 지어대는 통에 토질의 차이가 커서 땅의 절대면적을 단위로 세금을 걷을 수가 없어져서 이미 고려시대에 수세(收稅)를 위한 토지 면적의 계산법을 수확량 기준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나라가 우리나라다. 만약 이앙법이 노동력을 그렇게 획기적으로 감소시켜주는 농법임에 틀림없다면, 수백 년이나 그렇게 묵혀둘 사람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앙법은 교과서 설명대로 봄 가뭄이 심한 우리나라에 적합한 농법이 아니었고, 위험부담이 너무나 큰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그 위험부담을 기꺼이 감수하게 만든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것이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였을 것이다.

조선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이제는 재론의 여지없이 양란이다. 16세기를 조선 중기로 설정해도, 양란 이후는 조선 후기다. 전쟁이 역사 전반에 끼치는 영향이 그만큼 큰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인간의 역사에 끼치는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일까?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도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전쟁에 참여해서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들에게 아무 보상도 해주지 않는 나라는 없다. 그렇게 해서는 국가가 유지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에 참여한 대가를 돈으로 충분히 보상해줄 만큼 부유한 나라는 적어도 전근대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국가가 해줄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이었을까? 돈도 안 들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전 재산, 혹은 생명까지 걸 수 있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스 아테네는 수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무엇을 주었을까? 조선 후기에 신분제가 크게 동요하고 서민 계층이 성장하게 된 것은 정말로 양란 이후 갑작스럽게 늘어난 수리시설과 이로 인해 확산이 가능해진 이앙법 덕분일까? 이제 이런 역사서술에 대해, 한 번쯤 의문이 필요한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역사 발전의 진정한 동력은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신분 상승의 ‘기회’가 늘어난 것이 바로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생산력의 증대도 가능해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소위 ‘주류’ 역사학자들에게는 절대로 용납 받지 못할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사회는 ‘다양한’ 역사 해석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는 더 이상 역사 발전의 동력을 경제적 변화에서 찾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는 인간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고, 역사를 발전하게 만드는 인간의 의지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저자: 신유아 인천대·역사교육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조선전기 체아직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부천여자고등학교, 세종국제고등학교 등에서 역사교사로 근무했고, 2014년에는 교육부 역사교육지원TF에 파견되어 교과서 내용 분석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인천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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