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학 선언』을 통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
상태바
『동아시아 역사학 선언』을 통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
  • 강상규 방송통신대 교수
  • 승인 2021.12.19 22:22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저자에게 듣는다_ 『동아시아 역사학 선언: 근대 동아시아에 나타난 역사적 전환들』 (강상규 지음, 에피스테메, 444쪽, 2021.10)

 

 

* 본서의 문제의식: 이 책은 무엇을 다루는가.

이 책의 제목이 만들어진 경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필자는 국제정치와 외교사를 전공했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정치와 외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우선 한반도는 구조적으로 제국들 사이에 위치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도록 지속된 제국 중국, 근대로 접어든 이후 비기독교 국가로서 유일하게 제국을 건설한 일본, 그리고 20세기 냉전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한 미국과 소련이 해양과 대륙세력으로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다. 그야말로 ‘제국 간 국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을 열심히 살피면 한국이 충분히 보일까? 그럴 리 없다. 본서의 제목이 ‘동아시아’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왜 ‘역사학 선언’일까? 동아시아는 오랜 세월 동일한 문명과 문화적 기반, 공통된 가치를 공유해왔다. 하지만 현재 동아시아 국가들은 과도한 내셔널리즘과 자기중심적 해석에 사로잡혀 서로를 존중하기보다는 배척하고 적대시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러한 문제를 살피려면 ‘단기적인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 그중에서도 지난 200년간 이른바 ‘근대’ 동아시아 전체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이 특별히 중요하다. ‘동아시아 역사학 선언: 근대 동아시아에 나타난 역사적 전환들’이라는 책 제목과 부제에는 이처럼 건조한 구조주의나 자국중심, 일국중심의 역사관을 넘어서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동아시아 근대사’에 나타난 주요한 몇 차례의 전환기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장면들을 포착해 들어간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동아시아의 현재와 과거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구속’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동아시아 역사학’이라는 관점의 유용성: 무엇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가. 

‘동아시아’라는 거울(프레임)을 통해 그것도 ‘전환기’에 주목하여 조명하면 무엇이 어떻게 달리 드러날 수 있을까? 여기서는 본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중에서 다섯 가지의 주요사례(한반도가 경험한 위기들의 성격,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의 동아시아)를 소개해보기로 하겠다. 

우선 첫 번째 사례로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결정적 위기의 순간들을 생각해보자. 일국사나 양국관계사의 관점이 아니라 지난 5백 년 동안 중화질서/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전환기적 맥락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자. 먼저 16세기말 동아시아 해양세력으로 부상한 일본의 센고쿠(戰國)시대가 마무리되던 시점에서 한반도에서 두 차례의 왜란(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발생한다. 그리고 17세기 중엽 중화질서의 패권이 한족(漢族)에서 만주족으로 이동하는 ‘명청교체기’의 시점에서 한반도는 두 차례의 호란(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한다. 한편 19세기 후반 서세동점이 진행되던 시점에서는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 청에서 조선 속국화(屬國化) 작업이 추진되며 조선을 경쟁적으로 압박해 들어오다 얼마 후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발생하며 대한제국은 강점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20세기에는 제국 일본의 길고 긴 전쟁의 패망으로 한반도는 어렵게 해방을 맞이하지만 그것은 반쪽으로 조각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냉전’의 기운이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에서는 3차 세계대전에 가장 근접한 ‘국제전’이 벌어졌으며, 이때 형성된 ‘적대적 분단체제’는 고착화되어 냉전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냉전이 해체되는 탈냉전의 상황에서 세계적인 위기의 초점으로 ‘북핵 문제’가 등장한 것이나 ‘전쟁위기설’의 회오리가 한반도 주변을 유령처럼 불안하게 배회하는 상황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동아시아 정치질서가 급격한 전환기적 국면으로 들어설 때마다 한반도가 어김없이 위기에 노출되는 상관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일국사적 관점이나 양국관계사의 시각만으로는 이런 상관관계를 명증하게 포착하기 어렵다.

두 번째 사례로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나타난 서양의 충격과 한・중・일 삼국의 위기상황으로 넘어가보자. 서양 제국주의 앞에서 세 나라의 운명이 극적으로 갈리는 순간을 일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은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화문명/동아시아 문명이라는 거울(프레임)이 가지는 유용성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거대한 대세로 밀려오는 서양의 충격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서양보다 더욱 강한 물리력을 소지하고 외압을 물리칠 수 있든지 아니면 기존의 고유한 질서를 지탱하던 패러다임을 포기하고 서양이 제시하는 새로운 문명기준에 입각한 변화를 빠르게 수용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처럼 외부의 압력을 거부하는 힘을 갖추는 데는 한・중・일 세 나라 모두 실패했으며, 변화에 적응하는 후자의 경우는 일본만이 성공할 수 있었다. 기존의 중화문명/동아시아 문명이라는 의식이 강할수록 새로운 문명기준으로 갈아타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화문명의 중심이 아닌 주변 혹은 사실상 외부에 놓여 있던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용하기에 상대적으로 훨씬 유리한 입장에 서있었다는 데는 반론이 존재하기 어렵다. 본서가 19세기 동아시아의 전환기적 상황을 ‘동아시아 문명기준의 역전’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해 들어가는 것은 이런 측면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세 번째 사례로 제국 일본의 전쟁으로 눈을 돌려보자.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청일전쟁이후 진행된 일본의 연속되는 전쟁은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50년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1889년 일본제국헌법의 선포와 제국의회의 설립 이후 체제를 정비한 제국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일으키며 본격적인 제국주의로 나선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1914~1918), 시베리아 출병(1918~1922),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부터 1937년 중일전면전쟁, 나아가 아시아 태평양전쟁(1941~1945)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전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50년의 시간 동안 제국 일본은 전쟁 중이었거나 사실상 준전시체제 상황이었던 것이다.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50년 전쟁’이라는 거울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그동안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프레임과 일국사적인 관점으로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포착될 수 없었던 다음과 같은 측면들이 보다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첫째, 청일전쟁 이후 연속적으로 진행된 제국 일본의 50년간의 궤적의 전체그림과 아울러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제국 일본의 억압 아래 놓이게 되는 유동적인 과정을 연속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둘째, 일본제국주의가 ‘서양제국주의에 대항하면서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논리로 전쟁을 확대해나가는 맥락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와 서양제국주의 상호 간의 영향 관계를 함께 포착하기가 용이해진다. 셋째, 일본의 패전과 항복 이후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의 전후 맥락을 기존의 설명방식보다 훨씬 더 연속적이면서도 계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네 번째 사례는 냉전의 도래에 따른 한・중・일의 상황이다. 세계대전의 종식과 냉전의 형성에 입각한 기존의 설명방식으로는 한・중・일의 역사가 파편화된 퍼즐조각처럼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시선을 견지하면서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50년 전쟁’이라는 관점을 견지하게 되면 “패전국 일본이 분할되지 않고 한반도가 분할 점령되는 점, 한반도에서 국제전이 전개되면서 ‘적대적 분단체제’가 고착되는 양상, 중국의 내전 종식이후 양안관계라는 사실상 ‘두 개의 중국’이 형성된 것, 평화헌법과 미일동맹에 바탕을 둔 일본의 전후체제가 성립하는 경위”들이 각각 다른 파편화된 퍼즐 조각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냉전의 세계사와 동아시아의 맥락 위에서 새롭게 시야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를 ‘동아시아 전후체제’라고 명명한다. ‘동아시아 전후체제’는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체제’, 사실상 ‘두 개의 중국’체제, 일본의 전후체제를 세 개의 축으로 삼는다. 동아시아 전후체제가 형성되는 구체적인 계기는 역설적으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었고, 동아시아 전후체제를 지탱하는 핵심기반이 되는 국제적인 근간이 된 조약은 ‘미국의 주도하에 제국 일본의 해체를 국제적으로 선언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체결, 1952년 4월 발효)이었다. 이들은 서로가 다른 세계를 지향하고 있고 서로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섯 번째 사례는 글로벌 냉전이 끝난 뒤 21세기 ‘지금, 여기’ 한・중・일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보자. 지구적 차원의 냉전이 끝난 지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70여 년 전 성립한 ‘동아시아 전후체제’는 여전히 지속된 채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면밀히 보면 언젠가부터 세계사적 차원에서 나타난 ‘근대문명의 복합위기’와 함께 ‘동아시아 전후체제’가 한계상황에 이르렀다는 징후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이를 ‘임계점에 도달한 동아시아 전후체제’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상황은 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과 닮은 면이 적지 않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의미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20세기 전반의 불행한 유럽의 전철을 되밟을 것인지, 아니면 20세기 후반의 유럽처럼 협력의 동반자로 나아갈 것인지, 혹은 20세기 유럽과는 다른 고유한 제3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 기로에 서있다. 이는 그만큼 동아시아 시민들의 인식과 선택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국민국가 체제하에서 당연시했던 내셔널리즘의 유용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느 국가의 일방적 주도나 자국중심의 발상과 같은 ‘근대적 문제 해결방식’으로는 동아시아 문제의 평화적 해법 마련이 곤란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본서가 ‘근대적 해법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 사족: 본서는 누구를 독자로 상정하고 있는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이 ‘재미있는’ 학술서를 쓰는 것이었다. 필자가 30여 년간 미로 속에서 헤매면서 찾아간 길을 일반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완주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한국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시민들이 공감하며 납득할 수 있는 글이 되게 하고 싶었다. 독자들이 누구나 읽고 사유하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생각의 근육’, ‘지혜의 근육’이 키워질 수 있도록 책 전체의 구성과 각 장의 서술방식을 꼼꼼하게 조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이 동아시아 근대사를 복기(復棋)하고 단순히 요약정리하기 위한 의도에서 쓰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아시아 국가들이 현재 겪고 있는 심각한 역사적 불화와 혐오, 다양한 갈등을 풀어내는 ‘공통의 언어’를 발견하기 위한 지적 탐색이자 학문적 도전이라고 의미 부여될 수 있기 바란다. 이 책의 표지는 호수에 비친 어느 가을 저녁노을 사진이다. 일상 속 색채의 신비한 변화는 필자가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지 못하면 사라지고 만다. 이 책은 근대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전환들을 과연 필자가 의도한 만큼 얼마나 성공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것일까. 


강상규 방송통신대·동아시아 정치사상 및 외교사

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장,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 총합문화연구과에서 국제관계론 분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과 일본의 건강하고 의미 있는 소통과 상생의 길, 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해석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다중거울』, 『조선정치사의 발견』, 『근현대 일본정치사』, 『근현대 한일관계와 국제사회』, 『현대일본정치의 이해』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한유빈 2021-12-20 00:41:07
존경하는 강교수님 책이 참 반갑습니다. 동아시아 역사를 통해 우리를 발견하는 새롭고도 광활한 관점을 열어주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강상규 교수님의 대장정인, 동아시아 시리즈가 계속되기를 기대합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