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 처벌의 어두운 기록, 『연좌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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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 처벌의 어두운 기록, 『연좌안』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12.1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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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㉕_ 연좌 처벌의 어두운 기록, 『연좌안』

 

연좌제와 『연좌안』

근대 형법의 경우 범죄에 대한 형사상 책임을 행위자 자신에게만 묻는 이른바 형사책임 개별화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헌법 제13조 제3항에도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하여 범죄인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묻는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연좌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그때까지 가족이나 주변인의 잘못으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언제든지 형사처벌을 당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조선시대 연좌제의 구체적인 실상을 기록한 자료가 『연좌안(連坐案)』이라는 책자이다.

그럼 『연좌안』은 어떤 책인가? 『연좌안』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4책짜리 필사본 책자이다. 대상 시기는 조선시대 전체는 아니고, 영조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1728년(영조 4)부터 고종대 1886년(고종 23)까지 조선후기 약 150여 년간 연좌된 일가, 가족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기록되어 있다. 누가 만들었을까? 이 책의 작성 주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중대한 정치적 사건과 관리들의 범죄를 맡아 처리했던 의금부(義禁府) 관계자가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는 『연좌안』의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연좌 처벌의 어두운 그림자를 목도할 수 있다.

 

                                                    규장각 소장 『연좌안』의 표지
『연좌안』의 본문. 내용 중에 영조 때 난을 일으킨 이인좌(李麟佐)의 네 아들이 함경도 지역의 관노(官奴)로 함께 배속되는 처벌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

 

“난신, 역적을 칠 때에는 당여(黨與)를 먼저 다스려야”

앞서 이야기한 대로 조선시대에는 역모나 반란, 작변(作變)과 같은 국사범에 해당하는 정치적 사건, 그리고  부인의 남편 시해 사건 등과 같이 중대한 강상윤리 위반 범죄에 대해 연좌법을 적용하여 가족들을 함께 처벌했다. 특히 대역죄를 범한 경우 가장 가혹한 연좌제가 적용되었는데, 범인의 16세 이상 부자(父子)는 모조리 함께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가족들과 15세 이하의 아들은 살려주는 대신 노비로 삼았다. 가족의 재산 또한 몰수하였다. 사극에 등장하는 이른바 ‘멸문(滅門)의 화’는 이와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연좌제 적용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1416년(태종 16) 사간원 관리들은 “대역(大逆)은 천지(天地)에서도 용납하지 않고, 죄가 친척에까지 미치는 것은 경계를 보이자는 까닭”이라고 언급하며 대역죄인을 처벌할 때 연좌제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즉위 초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관리들을 역모로 처단하는 와중에서 대사헌 신석조(辛碩祖) 또한 죄가 중한데 벌이 가벼우면 악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할 수가 없다고 지적하며 ‘난신(亂臣)을 죽이고 역적(逆賊)을 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당여(黨與)를 다스린다’는 『춘추(春秋)』의 문장을 가져와 난신, 역적의 무리에 대한 연좌제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왕조사회 최고의 통치자인 왕권에 대한 도전은 국법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가까운 혈연 가족에게 연대책임을 부과함으로써 범죄 행위에 대한 경고 및 통제를 위해 강력한 연좌 처벌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다. 이렇게 연좌제는 조선시대 내내 정당화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황사영 가족

『연좌안』을 들여다보면 각 죄인별로 성명, 죄명, 처형 일자를 먼저 밝힌 다음 이에 연좌된 인물들의 연좌 처벌 내역을 적었다. 여기에는 유배지, 죄인과의 관계, 성명, 처벌 내용, 처벌 일자, 사망 일자 등이 기재되어 있는데, 연좌된 인물들은 주로 위노(爲奴), 위비(爲婢), 안치(安置) 등 유배지에서 노비로 배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복권된 경우 연좌된 자들의 성명 아래 복권된 날짜·사유를 적어 넣는 등 연좌 이후의 조처 등도 추가로 확인할 수 있다. 

『연좌안』 속에 가슴 아픈 사연이 없는 사건이 있겠는가마는 그중 비극적인 사례로 황사영(黃嗣永) 가족들의 수난을 들 수 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로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자 북경의 프랑스 주교에게 프랑스 군함과 군대의 동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작성했던 인물이다. 

 

황사영 백서. 제천 배론성지에 복원해놓은 황사영 토굴 안에 전시되어 있다. 백서 원본은 로마교황청에서 보관 중이다.
배론성지 내 황사영 토굴. 황사영이 숨어 지내며 「백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토굴 주변 모습이다. 사진은 지난달 필자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생들이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며, 왼쪽에 황사영 토굴 표시가 보인다.

결국 1801년(순조 1) 9월 제천의 배론에 은신 중이던 그는 체포된 후 대역죄인으로 몰려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으며 그의 가산은 전부 몰수되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그의 부인 정난주(본명 정명혜)는 제주도, 겨우 두 살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의 노비로 배속되었다. 조정에서 황사영 가족을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 셈이다.

여기서 잠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난주는 두 살 난 아들 황경한을 품에 안고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추자도에 이르자, 이곳에서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아들을 추자도에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나뿐인 아들이 역적의 자손으로 자라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뱃사공에게 아들이 죽어 수장했다는 거짓 보고를 간청한 것이다. 결국 허락을 받은 정난주는 추자도 서남단 언덕에 어린 아들을 내려놓은 채 제주도로 향했고, 언덕에 홀로 놓여 있던 어린 아들은 추자도 예초리에 사는 뱃사공 오상선이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전해오는 전설은 모자의 비극적 이별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와전된 이야기이다. 『연좌안』에서 보듯이 황사영 모자, 황사영 어머니는 이미 다른 섬에 보내도록 하는 처분이 확정된 상태였다. 어떤 이별을 했든 조정에서 황사영 가족에 내린 처분이 가혹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난주 묘소. 황사영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정난주는 1801년 추자도의 두 살배기 아들과 떨어져 제주 대정읍 모슬포에 유폐되어 1838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함께 처형된 홍경래 부부

그런데 1811년(순조 11) 평안도에서 난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 가족의 경우 더욱 강력한 연좌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용강 출신의 홍경래는 세도정치의 난맥과 세금 수취의 문란으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산의 다복동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쟁을 개시한 지 4개월 만에 최후의 항전을 치루던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농민들의 저항은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마지막 전투를 지휘한 평안병사 박기풍의 보고서에 따르면 정주성에서 반란군 2,983명을 체포한 것으로 나온다. 이 중 여자 842명과 열 살 이하 사내아이 22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1,917명은 정부군이 진을 친 곳에서 목을 베어 처형했다고 한다. 무려 2천 명에 달하는 봉기군을 가차 없이 처단할 만큼 정부의 홍경래 난에 대한 대처가 강경했다.

 

1872년 평안도 정주지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지 70여 년 뒤 모습이며, 지도 중간에 봉기군의 마지막 항쟁지인 정주성이 그려져 있다. 규장각 소장.

그래서인지 『연좌안』에 나오는 홍경래 가족들에 대한 처벌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홍경래가 가슴에 정부군의 총탄을 맞아 죽은 후, 그의 부인 최여인과 동생 홍정래 또한 참수되었다. 홍경래가 ‘거병역괴(擧兵逆魁)’, 즉 병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킨 역모의 수괴라는 이유에서다. 조선에서 연좌된 여성은 좀처럼 처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은 후 병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킨 자는 형제와 처첩까지 사형에 처하도록 연좌법이 강화되었는데, 홍경래의 부인과 동생이 이 조항에 의거하여 처형된 것이다.
 
이외에도 홍경래의 11세 아들은 제주도의 관노로 배속되었고 세 명의 조카 또한 각각 흑산도, 고금도, 추자도로 유배되는 수난을 당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 네 명은 십 년 뒤에 모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좀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연좌된 네 명이 같은 해에 죽었음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난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홍경래의 가족뿐만 아니라 동생 가족 모두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연좌제로 인해 조선시대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고통을 당한 것일까? 『연좌안』 기록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연좌 처벌의 실상을 좀더 상세히 밝혀낼 필요가 있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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