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임금님과 극장정치, 실종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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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임금님과 극장정치, 실종된 미래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
  • 승인 2021.12.1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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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택 칼럼]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을 만들어주겠다는 거짓말쟁이와 임금의 헛된 욕망이 빚어낸 누드쇼가 천진난만한 아이에 의해서 한순간에 폭로되는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은 다양한 상황에서 기시감을 들게 해준다는 점에서 진정한 고전이 아닌가 싶다. 대선이 이제 채 석 달도 남지 않았는데, 요즘 부쩍 그런 기시감 드는 건 나만의 일은 아닌 듯싶다. 내년 3월에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데 세간에서 말하듯 유권자들은 도덕성만 놓고 보면 최상은커녕 차악을 뽑아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논평이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불세출의 위인을 뽑는 것도 아니고 나라의 운명을 통째로 맡길 위대한 영도자를 선출하는 것도 아니다. 히틀러에서 박정희, 전두환, 두테르테, 푸틴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거로 뽑힌 지도자들인 것을 보면, 국민의 선택이 항상 위대한 것도 아니다. 우리 국민은 부자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BBK로 온갖 의혹을 받고 결국에는 영어의 몸이 된 전직 대통령도 선택했고, 전직 독재자의 환영 속에 그 따님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가 촛불로 그을린 바 있다. 이런 것을 다 겪고도 다시 도덕성 공격이 선거의 거의 유일한 쟁점인 현 상황을 보면 결국 우리사회는 그간 발전한 것이 아니라 퇴보했다고 봐야 한다. 보수도 아닌 진보가 집권하는 동안 보여준 내로남불형 도덕성은 결국 민심을 돌아서게 하여 현 정부에서 임용된 공직자가 야당의 대선후보가 되는 코미디마저 발생했으니 말이다. 

이 와중에 양쪽 후보의 도덕성을 둘러싼 진실게임보다 더 볼썽사나운 점은 소속 정당의 의원들이나 선거팀에 소속된 먹물들이 터진 입이라고 궤변으로 이를 옹호하고 방어하는 짓거리이다. 대선이 끝나면 각종 인사의 전리품이 기다리고 있고, 대선 이후 곧 총선이 있으니 공천이라는 어마무시한 관문을 통과해야 할 정치인은 그 어떤 광대 짓거리도 해야 하는 판국이라지만 검은 것을 검다하지 않는 무모한 용기에 감동할 만큼 국민이 바보천치도 아니고,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그 언행 하나하나가 구토만 유발할 뿐이다. 한때 무비판적 지지자들 빼고는 되도록 시민의 선거 참여를 포기하게 하는 정치적 무관심이야말로 어느 정당의 전략이라고 했는데, 이대로 가면 거대 정당 모두 그런 전략을 세워야 할 판이다. 

그래도 선거는 해야 하니 공약도 나오는데 말그대로 찌라시 수준이다. 엊그제만 해도 코로나19 발발로 문명의 전환에 상응하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대비하자던 자들이 지금 대선을 앞두고 내놓는 공약을 보면 선거를 정말 쉽게 치르려는구나 하는 불쾌감마저 든다. 바야흐로 자본주의의 대전환 시기에 국가와 사회, 시장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와 철학, 비전은 없고, 그냥 되는 대로 취약계층을 돈으로 사겠다는 공약(空約)만 쏟아낼 뿐이다. 조금만 정책과 예산을 아는 사람들은 안다. 천문학적 비용을 예산으로 확보해도 상당부분 관리비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수조 짜리 정책을 내놓아봐야 비전과 철학이 없으면 결국 중앙이든, 지방이든 관리비와 인건비, 그리고 거기에 빨대 꽂고 용역사업과 평가를 하는 각종 연구기관/교수의 판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IMF 위기때 고용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쓰고도 ‘비정규 천국’을 만든 나라가 아닌가! 도덕성이 부실하면 정책이라도 온전해야 하는데, 거대 양당이 쏟아내는 정책이라는 걸 보면 찌라시 수준의 극장정치를 연상하게 한다. 

당장 MZ세대를 정치판에 소환하는 방식만 해도 도대체 이들을 들러리 세워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서유럽의 30대 정치인은 10대 후반부터 정치활동을 하면서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대학입시 전에 그런 교육을 하면 종북과 좌빨을 들먹이며 이데올로기 비판을 서슴지 않던 분들도 이제 표가 궁해지니 취업이 안 돼 분노하는 청년,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 낙담한 청년을 앞세우고 이들을 동참시킨 플랫폼 정치를 하겠단다. 그런데 소위 ‘이대남’으로 대표되는 청년을 앞세워 무슨 정치를 하겠다는 건지 도대체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포퓰리즘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도덕성으로 상처입은 후보들끼리 피를 흘리는 동안 되지도 않는 포퓰리즘적 정책에 환호해야 하는 국민의 모습은 흡사 로마시대의 콜로세움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집나간 정치는 결국 우리사회 미래의 실종으로 귀결된다. 4차산업혁명위원회라는 물신주의 정책에서 보듯 미래지향적 정책이라는 것이 온통 기술맹목적이다. 탄소중립·수소경제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적 삶의 욕망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하지 않은 채 기술적 가능성 혹은 명목론적 담론이 이 논의를 가로지르고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현실을 떠나면 조롱거리가 된다. 파리 기후협약을 앞장서서 서명하고도 우리나라가 기후 악당국가의 오명을 듣고 조롱거리가 된지 엊그제인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든다면 기우일까?

대선에 대한 기대가 크든 작든 선거는 치러져야 하고, 헌법으로 공화국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 한 현재 상태로 시민은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어느 정당의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 의원내각제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후보는 특정한 정책을 대변하는 진영의 후보이다. 그런데 정치 대신 정쟁만 해댄 탓인지 거대정당의 정책이 거의 보이질 보인다. 5년 단임 정부의 한계를 뻔히 아는 정치인들이 선거만 되면 흡사 건국이라도 하듯 백화점식 정책을 나열하고 그중 당선자와 가까운 학자 몇몇은 설계자의 칭호를 듣는다. 몇 차례 정권교체를 하다 보니 이런 일 또한 ‘극장정치’의 일부임은 분명해졌다. 대체로 인수위를 지나면 설계자의 부실은 만천하에 드러나지만(정권말기에는 심지어 스스로 이를 부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발생한다!), 이를 수습하는 건 기존 정책의 맥락도 잘 알고, 실행 가능한 범위도 잘 알고, 인수위에서 준비된 자료로 당선자와 권력 점령군을 사로잡는 공무원들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이 아무리 큰소리를 쳐봐야 이들은 안다. 그것이 공갈포임을. 적당히 분위기 띄워주고 설계도면 바꿔주고, 연말에 예산편성 잘해주면 정치인들은 그걸로 끝이고, 언론에서 말장난이나 열심히 하면 된다.

한때는 지식인들도 해외 사례를 열심히 베껴와 복지국가 설계라도 열심히 하더니 이제는 밑천도 드러나서 이전만큼 날선 쟁론도 없는 듯하다. 과거의 관행을 보건대 어차피 대선 마지막에 가면 영혼 없이 만든 정책들을 서로 베껴대서 엇비슷한 전화번호 책 두께의 거들떠보지도 않는 정책자료집이 나올 거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이러니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관두고서라도 앞으로 5년은 어찌할까 심히 우려된다. 우리사회는 정치인의 리더십이 없어 나라가 흔들릴 수는 있어도 무너질 정도로 허약한 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 실종되면 한국에서도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민주화 이후에도 박정희 개발주의의 환영이 너울거리는 것은 정치의 부실 때문이 아니던가? 

대선판에 나선 후보들이 이제라도 극장정치는 제발 던져버리고, 앙상한 철학과 비전이라도 보여주길 바란다. 그래도 유권자들이 뭔가는 근거를 가지고 투표를 하게끔 해줘야 하지 않나? 겨울 날씨만큼 대선이 스산하게 느껴진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비판사회학회에서 발간하는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한국이론사회학회 부회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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