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노동자’를 해방시킬 새로운 인간과학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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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노동자’를 해방시킬 새로운 인간과학을 시작하자
  • 조관자 서울대·일본사상사
  • 승인 2020.02.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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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2019년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노조 설립을 위한 설문조사가 두 차례 실시되었다. 헌법재판소가 대학교수의 노조 설립 가능성을 인정한 후, ‘지식 노동자’로서 단결권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에서 찬밥 신세인 연구소 전임교수이자 인문학자인 필자에게 노조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았다. 교수노조의 명분이 인공지능 시대와 지식사회의 진화 발전에 역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지식’을 가공하여 서비스하고, 로봇이 ‘노동’을 대신하는 사회가 도래한다. 미래에도 교수가 ‘지식 노동자’에 머문다면 그 설 자리는 마땅히 사라질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빼앗길 일자리를 되찾고자 단결해야 한다면 얼마나 궁색하고 초라한가? 인간을 단순하고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문명의 도구는 고마울 뿐이다. 지식을 공유하고 집성하는 그 학습 능력은 인류사의 새로운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 그렇다면 AI의 지배력에 대한 공포 심리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우리 스스로가 ‘내 먹고 살 일자리’에 얽매인 채,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상생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까닭은 아닐까?

독서와 수양, 천하태평을 위한 정치를 본분으로 삼던 유교적 사대부들에게 노동은 머슴들이 대행해 주는 일과였다. 인간다움의 가치는 노동으로 얻는 게 아니었다. 노동을 일상의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는 하위 수단으로 보는 견해는 아렌트 『인간의 조건』에서도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의 노예노동과 시민정치를 연구하면서 인간의 활동에서 노동과 공적 행위를 구분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와 충돌했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다른 동물과 인간 종(種)을 구별하는 근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현대의 자동화 기술로 확장될 노동자의 자유가 공적 의미를 상실한 채 삿된 욕망에 집착할 문제까지 염려했다. 스스로를 노동자로 규정한 인간이 ‘노동해방’ 이후 새롭게 찾아낼 ‘인간의 조건’은 마르크스도 밝히지 못했다. 그 실제 모순은 자칭 진보 지식인들이 자식의 스펙 쌓기에 학술 활동과 인맥을 이용했던 사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노동하는 인간’관이 팽배해졌다. 경제성장의 과실 분배에 대한 불만은 임금인상과 복지정책을 요구했다. 풍요로운 소비가 노동 소외를 극복할 줄 알았다. 청년 실업을 걱정하는 사회담론도 ‘노동’과 ‘임금’을 중시하는 사회 통념에서 부풀었다. 하지만 모두가 ‘금수저와 흙수저’를 타령하는 사이에, ‘노동하는 인간’은 과학의 힘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취업을 갈망하는 젊은이들도 노동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의 원인을 바로 진단하고 해법을 찾는 것이 교수의 본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으로 존엄할 수 있는지부터 새로 밝혀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간과학과 새로운 인간관에서 출발하는 복지사회의 설계가 절실하다.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환경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일 수 있다. 말문을 튼 아이가 “이게 뭐야?” 질문을 던질 때부터 인간은 과학자가 된다. 다만 기존 논리와 상식이 주입되면서 과학적 상상력이 거세된다. 마찬가지로 기존 지식의 체계를 수호하려는 아카데미즘이나 지식 전수를 위한 교수법은 아카데미쿠스의 미래 가능성을 차단하기 십상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지적 완고함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철벽 심리가 전문가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지식의 탄생과 융합의 무한 가능성을 막고 있지 않는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지식 진화의 산물이다.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면 그 해법을 연구하여 해결하는 것이 청년과 지식인의 할 일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만큼 할 일이 있을진대 일자리 타령이 가당할까?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한다면 사람들이 환영한다. 문제는 실력 여하에 달려 있다. 질량이 우수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람이 에너지다. 서로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 상생이다. 나와 내 조직이 먹고 살 궁리만 한다면 사회와 인류의 에너지를 나누어 받을 수 없다.

실제 유튜브에서는 저마다 실력자들이 발신하는 정보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서 늘어난다. BTS가 SNS 활동에 힘입어 월드 스타로 성장했듯이, 누구나 재주와 노력을 합하면 세계와 소통할 가능성이 확장되고 있다. 유명 블로거와 유튜버가 살아가는 모습이나 메시지에서 새로운 인간과학이 이미 펼쳐지고 있다. 아카데미쿠스가 ‘지식 노동자’에서 벗어나 지식의 융합과 진리 탐구에 진정 눈을 뜬다면, 대학 밖에서도 새로운 지혜를 구하고 더 많은 대중과 호흡할 기회를 찾게 될 것이다.


조관자 서울대·일본사상사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에서 학술 박사를 취득했다. 일본 중부대학에서 가르쳤으며, 2010년부터 서울대 일본연구소에 재직 중이다. 한국일본사상사학회 부회장과 『일본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 『일본 내셔널리즘의 사상사』, 『植民地朝鮮/帝日本の文化連環』, 편저로 『탈 전후 일본의 사상과 감성』, 『일본, 상실의 시대를 넘어서』, 공저로 『知識人から考える公共性』, 『岩波講座 「アジア太平洋戦争」 第3巻, 動員抵抗』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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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나 2020-02-18 12:06:58
글을 읽어보니 원리적이며 근본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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