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따위’와 시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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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따위’와 시의 목소리
  • 김승희 서강대 명예교수·국문학/시인
  • 승인 2020.02.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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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

가끔 젊은 시인들의 산문을 읽는다. 젊은 시인들은 “시는 정말 쓸모없고 무용한가?” 라는 주제를 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패권주의적 광신의 시대에 시인은 왜 이런 쓸모없는 시를 쓰는가? 라는 질문에 상처를 받고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다. 마치 피고인석에 서 있는 것처럼 무언가 쓸모 있고 유용한 대답을 해야 한다는 쓸쓸한 의무감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런 질문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많은 시대는 위기와 불안의 시대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질문을 통해 변화와 새로운 생성의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지극히 긍정적 상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없는 시대는 지극히 불건강하고 불길한 시대인 것이다. 정말 시인은 그런 질문에 꼭 대답을 해야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관점에서 문학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작품은 작가의 자기표현이라는 표현론적 관점이고 둘째, 작품은 사회상의 반영이라는 반영론적 관점이고 셋째, 작품의 언어와 형식 그 자체가 지닌 미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존재론적 관점, 넷째가 효용론적 관점이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은 바로 이 네 번째 관점에 속하는 것으로 독자의 감동에서 생성되는 깊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자각하게 하고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기에 효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갈등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정서적 정화를 주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교훈이라는 말은 약간 진부하여 거부감이 드니 성찰과 자기반성이라고 하는 게 더 좋겠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문학의 이런 효용론적 가치가 막강한 권력의 힘과 황금이라는 실재하는 힘을 크게 이길 것 같지는 않다.

지난여름부터 우리 사회는 극단적 진영(陣營) 논리에 빠져 진실이 실종되어 버린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실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절대 반지를 가진 절대강자가 곧 진영이기에 진영은 언제나 이기고 언제나 쓸모가 있다.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 같은 것은 없기에 망설임이나 고뇌 없이 오직 극렬행동으로 직진한다. 이런 진영과 진영의 칼 소리 나는 부딪침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로 무서운 최저 낙원이다. 그런 가운데 진실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커간다. 그렇다. 슬프지만 시는 바로 그런 ‘진실 따위’를 아파하고 견인하며 시의 목소리는 진영보다는 ‘진실 따위’에서 울려 퍼진다.

1934년에 시인 이상은 <오감도 시제1호>에서 13인의 아해들이 무서운 기세로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는 폐쇄사회에서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그렇게만 존재할 수 있다고 썼다.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라는 이분법적 패거리주의의 공포를 그는 노래했다. 진영과 진영이 막다른 골목에서 부딪치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회. 13인의 아해가 죽기 살기로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그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마침내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라는 마지막 시구(詩句)를 통해 패거리주의의 맹목적 질주를 해체하고 자아 해방을 아이러니로 노래한다. 오직 인간만이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다. 비로소 우리는 까마귀가 내려다보고 있는 공포스런 풍경 속의 맹목적, 집단적 질주에서 벗어나 자기 해방과 개인의 자유를 향하게 된다. 죽기 살기로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그 공포의 이분법에서 한발자국 비켜나도 된다는 것이다. 벗어나야 개인이 보인다는 것이다. 위대한 시의 힘은 이렇게 어느 시대에나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시는 변화의 언어이기에 대안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을 주어서 우리의 존재에 변화와 도약을 일으킨다. 시를 읽어가는 동안 시는 우리의 정체성에 균열을 가해서 우리를 변화시킨다. 집단적 사고에 사로잡힌 마비와 강박을 버리고 막힌 존재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주술을 일으키는 것이 시의 힘 - 그것만으로는 여직 대답이 부족할까?      
   

김승희 서강대 명예교수·국문학/시인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같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등이 있으며, 산문집 『33세의 팡세』,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 그리고 학술서로 『이상 시 연구』, 『코라 기호학과 한국시』, 『애도와 우울(증)의 현대시』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1990), 올해의 예술상(2006)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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