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유억불의 시대, 조선에서 왕릉을 지킨 것은 사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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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유억불의 시대, 조선에서 왕릉을 지킨 것은 사찰이었다!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2.12 2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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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릉의 사찰』 | 탁효정 지음 | 도서출판 역사산책 | 2021.11 | 368쪽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릉에는 능의 제사와 능역 보호를 담당한 사찰이 설치되었다. 조선 초기에 재궁(齋宮)으로 불리던 이들 사찰은 조선중기에는 능침사(陵寢寺)로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조포사(造泡寺)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조금씩 역할이 변모해갔다. 조선 왕릉수호사찰은 왕실 불심의 기반과 승군 노동력의 우수성을 활용하려는 국가정책, 그리고 억불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승려들의 노력을 기반으로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왕릉에 절을 세운 것은 불교가 동아시아에 유입될 당시부터 확인된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처음 유입된 한당(漢唐)대부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다. 불교 유입 당시부터 능묘에 사찰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능침사에 동아시아의 공통적인 희원(希願)이 깃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왕릉을 수호했던 사찰을 학술적으로 다룬 첫 번째 연구서 <조선 왕릉의 사찰>(탁효정 지음)이 나왔다. 조선시대는 흔히 숭유억불의 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왕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왕릉에는 능에 묻힌 왕의 극락영생을 빌 뿐 아니라 500여 년간 왕릉의 제사를 돕고 왕릉을 보호·관리하는 사찰들이 설치되었다. 

500년 내내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에 선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을 세웠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내세관은 불교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조선 왕릉이 단순히 유교적 시설물이 아니라 한국인의 내세신앙이 내재된 유불융합의 문화적 산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왕릉수호사찰은 조선의 국가제사권이 박탈되는 1908년까지 지속되었다. 여기에는 조선 왕실의 불심, 능침사의 경제적 효율성, 억불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승려들의 노력 등이 내재돼 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를 관통한 이데올로기는 유교였지만, 왕릉에는 유·불·도의 문화가 혼재돼 있다. 도교에서 비롯된 십이지신상 등이 능묘를 수호했다면, 능을 지키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역할은 원찰(願刹)이 담당했다. 원찰은 선왕(先王)을 추모하고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로, 능침사(陵寢寺)라고도 한다.

능침사는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된 왕실원당이다. 조선중기 사림의 정계 진출 이후 수륙사나 소격서 등의 불교·도교 시설물이 철폐된 후에도 왕릉을 수호한 사찰들은 재궁, 조포사, 원당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존속되었다. 조포사(造泡寺)란 선대왕에게 제사 지낼 때 올릴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다. 

능 인근의 사찰이 원찰로 지정되면 고인의 명복을 비는 제사와 능을 지키는 역할을 했고, 국가로부터 노비, 곡식 등이 지원됐다. 이런 원찰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나, 후기에 이르러 역할이 대폭 축소됐다.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왕릉, 즉 왕과 왕비로 세상을 떠났거나 사후에 추존된 인물들이 묻힌 총 50기 능의 수호사찰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제외했다. 50기의 왕릉에는 대부분 사찰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 중 절 이름이 확인되는 사찰은 62개(재궁명 미상 및 중복 제외)이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왕릉 관련 사찰들을 모두 연구대상에 포함시켜, 조선시대 왕릉수호사찰의 개념과 범주가 어떻게 변모했으며, 왕릉수호사찰의 역할이 시대별로 어떻게 바뀌어갔는지를 살펴보고 있어 주목된다.

 

저자 탁효정은 “조선 불교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것은 조선불교사를 전공하는 동안 늘 품어온 화두이다”라며 “조선불교사 연구는 사료와 현실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관찬사료에는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없애고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 봉쇄하는 등 억불정책 일변도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수승한 명산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불전(佛殿)들이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으며, 수려한 골짜기에는 법 높은 수행자들의 선기(禪氣)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는 관찬사료 속에 나오지 않는 무언가가 그 시대에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가 수천여 년 간 지속돼온 가장 큰 요인은 중생들이 여전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작은 등에 담은 마음들이 지금까지도 한국의 사찰을 밝히고 있듯이, 왕실에서 부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찰들이 왕실원당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 내내 유지된 것으로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저자 탁효정은 안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법보신문 기자, 미디어붓다 기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순천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조선 왕릉의 사찰(역사산책, 2021.11.15.)』 가 있고, 공저로 『회암사와 왕실 문화』, 『대법사지』, 『한국의 대종사들』 등이 있다. 연구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업원의 위치에 관한 재검토」, 「조선시대 봉은사 수륙재의 역사적 전개」, 「조선초기 능침사의 역사적 유래와 특징」, 「19세기 불교계 동향과 송광사의 위상」 외 다수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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