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미디어 속 문학의 경계를 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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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미디어 속 문학의 경계를 탐사하다
  • 배정상  연세대·국문학
  • 승인 2021.12.12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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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근대 미디어와 한국문학의 경계』(배정상 지음, 소명출판, 485쪽, 2021.10)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대재앙의 시대에 우리는 그동안 견고했던 오래된 경계들이 무화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국가, 지역, 언어, 세대 간 장벽들이 희미해지고, 뉴미디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들이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OTT(Over The Top)라 부르는 인터넷 기반의 미디어 플랫폼은 기존의 TV와 극장을 대체하여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오징어게임>을 비롯한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 열풍은 이러한 OTT라고 부르는 뉴미디어 테크놀로지의 가공할 위력을 실감케 한다. 방송사의 각종 규제와 자본의 압박에서 벗어난 한국의 드라마가 표현의 자유와 창의적 개성을 맘껏 뽐낼 수 있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당분간 세계적 유행이 될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 책은 한국의 근대문학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겨난 근대의 미디어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이루어진 것임을 구체적으로 실증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근대의 문학이 신문과 잡지, 책 등 새로운 활자 미디어를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문학은 존재했지만, 그것은 방각본이나 필사본, 또는 낭독이나 구술, 가창 등의 방식으로 향유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문학은 대량 생산과 복제가 가능한 출판·인쇄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활자 미디어를 기반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신문과 잡지, 책 등은 나름의 미디어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근대문학은 각기 다른 미디어적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각 미디어의 발행목적, 언어표기, 독자전략, 체제변화, 지면배치, 삽화활용, 광고전략 등은 근대문학을 더욱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만세보』에 연재된 이인직의 「혈의루」와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광수 「무정」 

한편, 이 책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다양한 문학적 텍스트들을 다루고 있다. 근대 시기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위대한 작가들과 작품 이외에도 수많은 무명의 작가들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존재한다. 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문학이 되지 못했던 경계적 글쓰기, 언론·출판·문단의 경계에서 활동했던 무명의 작가들,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지만 문학사 기술에서 배제되었던 대중문학 등이 이 책의 주된 관심사가 된다. 이러한 시도는 오랫동안 지속된 ‘정전(正典)’ 중심의 문학사를 반성하고, 근대문학의 다층적 성격을 입체적으로 다루기 위한 나름의 전략인 셈이다. 또한 원본 텍스트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 방법은 텍스트가 놓인 자리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한편, 이 시기 문학을 당대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제가 된다. 결국 이 책은 문학의 경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근대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1부는 1910년 이전 근대 초기 미디어와 다양한 서사 양식의 존재 양상에 대한 연구이다. 여기에서는 최초의 근대적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에 나타난 서사적 글쓰기,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체제 변화와 소설란의 형성, 근대 초기 신문에 나타난 토론체 서사 양식, 여성 구국 영웅 잔다르크의 일대기를 소설로 번역한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초창기 출판사인 ‘서포’의 소설 출판과 소설광고의 상품화 전략 등을 다루고, 이를 통해 근대문학의 형성 과정에 있어 미디어의 역할과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다. 오랫동안 문학연구의 대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다양한 서사 양식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이것이 근대 세계로의 진입과 독립국가로서의 생존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고투의 산물이었던 점을 드러낸 것은 중요한 소득이다.

2부는 1910년 이후 근대 신문과 신문연재소설에 관한 연구이다. 재조선 일본인 발행 신문 『조선신문』의 한글판의 발굴과 영인을 통해 신소설 작가 최찬식의 필명과 작품을 확정하고, 여기에 수록된 연재소설의 특징과 의미에 대해 다루었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해조의 판소리 산정 작품, 신문 기자이자 작가로 활동했던 남상일과 박용환의 문학 활동, 최서해가 죽기 전 남긴 유일한 신문연재장편소설 「호외시대」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최찬식에 관한 문학사적 공백을 메우고, 신소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한 문학사에 기록되지 않은 남상일, 박용환 두 명의 무명작가를 발굴하고, 1920년대 문학담당계층의 한 면모를 밝힐 수 있었다. 최서해의 신문연재장편소설 「호외시대」를 미디어적 특성을 중심으로 다루고, 신경향파와는 다른 최서해 문학의 또 다른 특징을 제시한 것도 나름의 성과이다.

 

   딱지본 대중소설의 대표 작가 철혼 박준표의 작품들. 『사랑의 꿈』, 『월미도』, 『비행의 미인』, 『강명화의 설음』

3부는 식민지 서적출판문화 속 딱지본 대중소설에 관한 연구이다. 근대의 대중소설인 딱지본은 오랫동안 문학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식민지 서적출판문화의 장으로 시야를 확장하여 딱지본 대중소설의 특질과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다. 특히, 시류에 편승한 다수의 실용서적 및 다양한 유형의 딱지본 대중소설을 저술한 철혼 박준표, 직접 출판사를 설립하여 다양한 문학적 저술을 시도한 출판인 송완식, 언론·출판·문단 사이에 위치한 경계인이자 ‘사회소설’ 연작을 딱지본 대중소설의 장에서 실험한 녹동 최연택을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딱지본 대중소설 작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복원하고자 했다. 또한 주로 고급문예에서 사용되던 일인칭 시점이 딱지본 대중소설에서도 시도되었음을 제시하고, 딱지본 대중소설이 꽤나 다양한 내용과 주제, 기법을 포괄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연구는 한국 대중문학의 형성 과정을 탐색하기 위한 본격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얼마 전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를 보고 크게 감동 받은 적이 있다. 임금이 계신 도성 밖 머나 먼 유배지에서, ‘주자가 힘이 센’ 시대에 물고기 도감을 만들고자 했던 정약전의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그것이 비록 하찮은 물고기일지언정, 현실 속 구체적 대상에 대한 약전의 응시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어쩌면 정전 중심의 문학사의 경계를 탐사하는 일은 정약전과 같은 인물을 소중히 들여다보는 것, 또는 물고기 도감을 만드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라진 무명의 작가들과 그들의 문학을 복원하는 일은 한국 근대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경계의 자리에 닿기를, 또 그 너머를 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배정상  연세대(미래캠)·국문학 

연세학교 미래캠퍼스 국어국문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건국대, 강원대 등에서 강의했고, 성균관대학교 박사후연구원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는 『이해조 문학 연구』, 『애루몽』(편저), 『제국신문과 근대』(공저), 『창의적 글쓰기와 말하기』(공저) 등이 있다. 지금까지 근대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한국문학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최근에는 근대 서적출판문화와 대중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문학사에서 소외되었던 작가와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이를 통해 한국 대중문학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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