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에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원문이 살아나는 역설의 번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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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원문이 살아나는 역설의 번역론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2.07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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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의 모험: 원문을 죽여야 원문이 사는 역설의 번역론 |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302쪽

 

《번역의 모험》은 오랫동안 번역 현장에 몸담으며 한국어의 개성을 살리는 독창적인 번역론을 모색해 온 저자의 숙련과 통찰이 담긴 책으로 ‘문턱이 낮은 한국어’로 옮기는 법을 다룬다.

저자가 말하는 문턱이 낮은 글이란 독자가 편히 ‘정주행’하도록 돕는 글이다. 즉 문장에 담긴 뜻이 금방 와닿지 않는 모호한 대목에서 독자가 읽기를 멈추거나 다시 뜻을 살피려고 ‘역주행’하지 않게끔 하는 글이다. 이 책은 명료하고 간결한 우리말 문장을 짓는 데 요긴한 원칙을 ‘쉼표’ ‘모으기’ ‘찌르기’ ‘흘려보내기’ ‘맞추기’ ‘낮추기’ ‘살리기’라는 주제로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짚어준다. 남발되는 쉼표 탓에 문장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문장부호를 적절히 사용하는 법, 가까이 있어야 할 말을 모으고 멀리 두어야 할 말을 떼어놓아서 문장의 모호함을 없애는 법, ‘주연’을 압도하는 문장 속 ‘조연’을 슬쩍 흘려보내 주제어를 명확히 드러내는 법을 알려준다.

서양에서 쉼표는 기독교 시대가 열리면서 등장했다. 신의 말을 정확히 옮겨야 한다고 믿었던 기독교인은 오해의 여지없이 뜻을 정확히 담아내려고 문장부호에 기댔고, 그 덕분에 글의 문턱이 낮아져 글을 눈으로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어의 띄어쓰기는 모든 단어를 붙여 써서 뜻이 모호해진 글의 문턱을 낮추려 했던 조선 후기 서양 선교사들의 주도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글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탄생한 ‘쉼표’와 ‘띄어쓰기’가 오늘날에는 왜 되레 글의 문턱을 높이는 주범이 되었을까?

저자는 쉼표까지 그대로 살리는 번역의 영향을 받아 한국어 문장을 쓸 때에도 기계적으로 쉼표를 찍는 사례가 많아진 현실을 지적하며 과도한 쉼표와 띄어쓰기 사용이 글의 문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현행 맞춤법에 따르면 ‘싶어 하다’는 띄어 써야 하지만 ‘싫어하다’는 붙여써야 한다. ‘글솜씨’와 ‘말솜씨’는 붙여 써야 하지만 ‘요리솜씨’와 ‘노래솜씨’는 띄어 써야 한다. 이렇듯 예외에 예외가 겹치면서 띄어쓰기 자체가 족쇄가 되어 글쓰기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입말을 그대로 옮긴 글로 마음을 사로잡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말하듯이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태초에 있었던 것은 말이지 글이 아니다. 말하듯 쓰면 문장은 저절로 깨끗해진다.

번역은 말과 말을 잇는 일이다. 다시 말해 원문과 번역어를 연결하는 일이다. 이때 원문에 충실할 것이냐 번역어에 충실할 것이냐는 번역가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다. 저자는 원문을 엄격하게 따라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번역자가 사소한 대목까지 옮겨놓으면 독자가 고통스러워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원문에 무작정 끌려가지 않으면서 원문을 생생하게 살리기 위해 필요한 번역 원칙이 무엇인지 자세히 다룬다. 주제가 무엇인지 찔러주는 역할을 하는 주제조사를 아껴 써야 하는 이유,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서도 운율을 더해 문장의 박자감을 살리는 법, 한국어에 없는 완료 시제를 우리말 부사어로 표현하는 법을 알려준다.

 

2018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보고서 「4차산업혁명시대의 신(新)직업」에서는 인공지능이 발달하여 위험해진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로 통·번역가를 꼽고 있다. 과학 논문이나 사건 보도 기사처럼 문장 구성이 정형화돼 해석의 폭이 좁은 글은 기계번역으로 대체하기가 쉽고, 기계가 사람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저자는 장래의 번역가들에게 번역의 앞날을 길게 바라볼 것을 조언한다. 번역가는 단순히 이 말을 저 말로 옮기는 좁은 의미의 번역가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현실을 말로 제대로 담아내는 넓은 의미의 번역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10년 전에 한 번역과 1년 전에 한 번역이 달라지는 것. 조금씩이라도 나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정진하는 것. 그것이 번역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번역가의 덕목이다.

이 책은 문턱이 낮은 한국어를 추구한다. 문턱이 낮은 글 덕분에 독자는 자원을 그만큼 덜 수 있지만 역자는 자원을 더 들여야 문턱이 낮은 글을 지어낼 수 있다. 궁리를 더 해야 하니까. 하지만 자동번역의 시대에 번역가가 자기 직업의 존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키는 길은 번역에 더 공을 들이는 길 말고는 없다.

이 책의 특징은 현실 한국어에서 출발한 번역, 문턱을 낮추는 한국어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딱딱한 번역체 문장이 아닌 한국 독자들이 편히 읽을 수 있는 단정하고 간결한 번역문 짓는 법을 열한 개의 주제를 통해 명쾌하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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