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현 단계 남한정치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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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현 단계 남한정치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2.06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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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

■ 저자 인터뷰_ 신철하 강원대 교수, 『에코아나키: 통일이행기 한국문학의 해석적 모험』 (한양대학교출판부, 2021.11.15, 456쪽)

 

90일 남짓 남은 한국 대통령 선거는 이제 서서히 소음의 데시벨이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현저하게 질적으로 추락한 한국정치는 다시 한번 한국의 근미래 비전에 대한 중차대한 갈림길에 들어선 느낌이다. 미국의 트럼프를 거치면서 민낯이 드러난 세계정치의 파국을 향한 여러 징후들과 조짐은 현 시점이 오히려 다시 한번 어떤 거대한 세기의 전환점이라는 징후를 오늘의 남한 사회에도 강하게 입력시킨다. 이와 같은 정황 속에서 문학과 정치, 국가와 자본주의, 에코아나키라고 호명한 꼬뮌의 한 형태로서의 한국 지역자치의 새로운 구성을 향한 발언, 남한의 현 단계를 식민지 잔여태로 규정하고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분단체제와 분단자본주의를 개량적으로 수용한 한국문학사를 실패한 문학사라고 과감하게 선언한 저서가 나왔다.

이 책은 문학평론가 신철하 교수가 15년 이상 구상 집필한 것으로 한국문학, 문화, 정치, 미학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와 새로운 기획을 내포하고 있다. 신 교수는 최근 ‘잡종적 글쓰기’를 통해 한국 근대 200년의 지적 유산을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실험에 착수했으며, 그 하위 범주인 한국문학사 100년의 집적을, 나아가 기록의 그것(들)을 해체-재구성하는 모험의 시간을 함께 공부해 오고 있다. 한국의 현재태를 ‘잔여적 식민지’로 규정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이 ‘무위(無爲)’를 매개로 생태아나키를 지향해야 한다는, 남한의 포스트분단체제와 정치의 미적 재구성에 대한 연구의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그의 속내를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이메일로 그를 만났다.

 

▲ 이 저술이 보여주는 낯선 개념어(들), 기술 방식의 생경함, 가령 ‘한국문학사는 실패한 문학사다’라는 선언적 발언 등에서 느껴지는 호기어린 표현과 함께 문학과 정치, 나아가 미학과 정치의 테제는 기자가 경험해온 한국 담론장에서는 매우 낯설고 이질적이기까지 한 정서와 풍경이다. 일전에 한국영화론 『봉인된 시간: 이창동 혹은 반시대적 고찰』(2020)에서도 느꼈던 현 단계 지식장에 대한 일종의 태클, 나아가 어퍼컷을 날리는 느낌, 한편으로는 야유나 단절같은 정서까지도 이번 책의 어떤 문맥 속에는 엿보이는 듯한데, 이를 포함하여 저술의 내밀한 목소리를 먼저 듣고 싶다.

☞ “대답에 앞서 이 책의 전개과정에서 함께한 시간과 몇몇 기억들을 특별한 사진으로 남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깊습니다. 특히 “세월호”를 전후로 한 산더미 같은 말들의 과잉, 오염된 언어의 집적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국가(주의), 정확하게 남한의 ‘병영국가주의’와 여기서 파생된 ‘분단자본주의’에 대한 잡다한 문제들을 더 명징하게 인식하는 외적 계기가 되었고, 그것을 통해 다른 부수적인 문제들까지도 이런저런 고민을 떨쳐내고 과감하게 저술 편목화 과정에 기입할 수 있었는데요. 편목 자체에도 여러 비약과 은유적 개념어로 인해 난해하다거나 혼란을 느낄 독자들이 많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것은 그러나 저의 정확한 의도가 개입돼 있습니다.

‘한국(근대)문학(사)’ 나아가 문학(사) 전체를 실패로 전제하기 때문에 여기서 파생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퇴폐적, 퇴행적 저항과 안티를 생각해야 했는데, 새로운 개념의 제시가 가져올 유사한 징후들에 대한 면밀하고 깊은 보호막이 필요했던 거죠. 이를 위해 이 책이 원래 지금 원고보다 500매 이상 더 많은 내용이 포함돼 있었는데, 그것을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생략하는 모험을(?) 시도했어요. 은유적 함의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의 핵심 개념어는 책에 드러난 ‘에코아나키’나 ‘통일이행기’, ‘이중구속’, ‘식민지 잔여태’가 아니고 ‘무위(無爲)’인데요. 이를 정확하게 한 챕터로 분리시키고 초딩식으로 설명을 추가하려던 기획을 들어내는 대신 ‘아리랑’과 ‘미륵신앙’에 내재된 무위의 다이나믹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했죠. 무위는 원래 노자와 스피노자를 자연주의와 충동(혹은 정동affectus)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보다 정확하게 그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는 판단이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인민의 일상과 인민봉기 과정에 기입한 인물은 최시형(崔時亨)입니다. 그의 ‘현묘무위(玄妙無爲)’는 노자의 ‘무위’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를 역동적으로 수렴해 일상에 구현한 혁명의 이념적 코어였던 거죠. 저는 바로 그 부분을 이 책 에코아나키에 기입하려고 전력투구했던 거구요.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이런 음모의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 이 책에는 여러 장치들이 설계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만 말한다면, 전개과정에서 행갈이를 의도적으로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 절, 소제목 등도 처음에는 없던 것을 억지로 추가하고 단락도 약간 현실과 타협하는 쪽으로 구획한 곳이 있는데, 다시 말해 원래는 시작부터 끝까지 통째로 행갈이와 편목을 만들지 않고자 했어요. 설명이 길어질 수 있는데, 독서의 끝없는 미끄러짐, 유예를 시도함으로써 읽기의 실존적 지연과 불편함과 과도한 불신과 마침내 어떤 식민지 잔여태의 언어에 감염된 독자에게는 짜증을 유발하려고 했던 것이 일차적 목적이며, 남한 사회 전체에 깊고 음험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식민지 잔여태의 언어프레임에 스크래치를 내고자 한 것이 궁극 의도였습니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묻고 싶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한국문학사는 실패한 문학사다’라는 심텀(symptom)과 이 책이 의도하는 구체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 “김현의 ‘문학만이’ 같은 뉘앙스가 한때 문학아이돌에게(?) 병든 의식을 주입하고 그것에 열광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그 발언은 명백히 문학의 특권화이거나 지극한 편견이고 마침내 허위입니다. 문학은 ‘문학만이’에 갇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곰팡내 나는 골방의 작가로 알고 있는 카프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작가’(질 들뢰즈)였듯이 더 좋은 문학은 일상을 가장 정확하고 세밀하고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처절한 정치적 행위입니다. 문학과 정치는 그런 면에서 분리될 수 없는 거죠. 이 연장선상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 돌출되는데요. 가령 일본의 근대가 ‘분열증의 근대’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면 우리의 식민지 잔여태가 이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도 우리 문학은 미적으로 훌륭하게 추론하게 될 듯합니다.

중국의 근대 역시 분열의 근대인 일본을 흉내 낸 ‘짝퉁근대’죠. 그리고 오늘의 중국 비조 이념인 마오주의의 핵심가치는 노자의 미적 정치이념을 골간으로 합니다. 그 점에서 현 중국의 시진핑 정치는 또 다른 짝퉁정치인데요. 그것은 마오주의 노선을 벗어나 노골적인 정치투쟁과 유사파시즘을 골간으로 하는 공자주의에 더 기울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천안문 앞에 내건 마오의 초상은 사실 기만과 가짜인거죠. 

그런데, 일본의 왜곡된 근대를 강점기에 수혈받은 식민지 잔여태와 분단체제의 언어에 감염돼 있는 남한의 현재를 상정할 때, 그리고 이를 언어로 구성한 문학을 생각해봐야 하는데요.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전후 최대의 작가로 평가되는 최인훈과 『광장』을 예로 들 수 있는데요. 이 소설이 60년대 가장 핵심적인 어젠다를 미적으로 형식화했고 그만큼 중요한 문제의식을 내장하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광장』은 실패한 소설입니다. 왜 그런지를 에코아나키에서 기술하고 있는데요. 우선 ‘명준’의 사라짐의 의식이 지극히 단순하고 편협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가령 제가 이 책의 “비평과 생태” 장에서 제시한 텍스트 <시>(이창동)에서 ‘사라짐’의 그것과 비교해 봐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사라짐의 단순성을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수차례 개작을 시도하는데, 이 시도가 또한 김현의 장황한 레토릭과 별개로 이 소설의 치명적 패착을 더 명확하게 증거할 뿐입니다. 한국문학사의 실패는 단순히 문학사 자체의 실패만이 아니라 식민지 잔여태로서의 현 단계 담론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위에 기초한 분단체제이후의 체제구성, 나아가 ‘국가이후의 국가’ 구성에 대한 기획으로 에코아나키, 나아가 마을 꼬뮌을 상정한 것은 이 과정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최적의 대안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거죠.”

 

▲ 대안 개념으로서의 ‘통일이행기’란?

☞ “조금 유치한 작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요. 다른 뾰족한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행기는 분단체제에서 통일시대로 나아가는 시간적 직선 개념 속에서의 매개개념 정도로 이해할 가능성이 많은데요, 그런 시대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일부 미시적으로 포함돼 있긴 해요. 그러나 여기서 통일이행기는 정확하게 운동의 성격을 내포한 분단과 통일, 전쟁과 평화, 과거와 근미래를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기획한 독자적 체제 가능성까지를 내포한 아포리아적 개념입니다. 미적 레짐으로서의 아포리아는 데리다가 ‘결정불가능한 것의 유령’으로 통칭하듯, ‘길-없음’의 상태를 지칭합니다. 

‘결정불가능한 것의 시험은 결코 통과되거나 극복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결정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specter),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어 있고 깃들여’ 있습니다. 이것의 유령성은 ‘결정의 정당성, 사실은 결정의 사건 자체를 우리에게 보증하는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전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 증명을 겨우 할당받게 되는 거죠. 이런 연유로 근대와 포스트근대, 분단과 분단이후, 전쟁과 평화, 증오와 사랑, 과거와 미래, 인간과 짐승의 대립적 긴장에 이중 구속돼 있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주요한 정조는 내면의 분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분열증의 현실을 통해 현 단계 우리의 삶이 분별하기 힘든 과상승(verstiegenheir)의 상태에 있다는 것 또한 직시가능하게 됩니다. 저는 이 과상승의 분열적 엔트로피 상태를 통일이행기로 이 책에 기입하고자 했습니다. 위기와 불안을 상시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통일이행기는 그런 면에서 운동의 성격이 강한 지속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 이 책의 소제목대로 질문하면 ‘왜 노자인가’, 그것이 ‘왜 정치적 실천인가’란 궁금증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것 같다.

☞ “사실, 노자는 무위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벽이었죠. 논어에도 등장하긴 하지만, 여러 논란의 한가운데서도 노자의 언어가 지닌 고전 읽기의 쥬이상스(jouissance)는 논어를 훨씬 넘어서죠. 그 핵심에 에로스가 있었고, 나아가 ‘에로스로 구성하는 정치(혹은 국가)’를 보았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탕진해야 했습니다. 노자 81개 텍스트는 시작도 끝도 없는 독립된 책이면서 리좀적으로 맥락화된 서사이기도 합니다. 이를 전략적으로 독파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획이 있어야 했습니다. 사실 에코아나키의 구성이 시작도 끝도 없는 텍스트로 최초에 기획되었던 것도 그 영향이 약간 있습니다. 후에 많은 부분 현실의 검열에 의해 수정되고 삭제되었지만요. 

노자를 제가 읽는 주요한 포인트는 첫째, 81개의 텍스트를 에로스와 정치의 주체로 읽기 위한 주제어 에로스를 재명명화한 문제, 둘째, 해체-재구조화를 거쳐 81개의 텍스트를 주제로 서사화하는 과정. 셋째, 무위와 무위자연의 재맥락화 과정이 그것인데요. 노자를 정독하는 과정에서 그의 무위와 무위자연이 현묘(玄妙)를 매개로 스피노자의 ‘신즉자연’(deus sive natura)과 맥락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무위자연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위인데요. 그 무위는 현묘를 매개로 거느림으로써, 스피노자의 신즉자연에서 파생한 정동, 혹은 충동의 코나투스와 호흡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최시형은 최제우의 무위를 현묘무위로 재개념화하는데요, 바로 최시형의 인민봉기 핵심이념이자 에너지가 현묘무위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노자의 독서가 정치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인 이유였던 거죠.”


 
▲ 한국의 근미래 문학(미학)과 정치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며, 그렇다면 한국의 근미래는 어떤 체제비전을 모델로 해야 하는가? 

☞ “한국의 [서구식] 의회정치는, 한국의 대학이 거의 사망선고를 받아놓은 말기암 환자와 같은 상태인 것처럼, 명백히 한계에 봉착해 있습니다. 일반의 평가와 달리 한국정치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생명줄을 연장하고 있는 것은 지역자치입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아류 정치인과 뜨내기 지식장에서 사용하는 지방자치란 표현은 정확하게 토착왜구화된 식민지 잔여태로서의 오염된 언어의 한 표본이다. 지방은 서울의 하위개념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한 위계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자치라고 기표해야 정확하다) 남한 지역자치는 당시 열세에 있던 당의 정치인 김대중이 단식투쟁까지 가는 극한의 협상을 통해 획득한 주요한 성과로 평가되는데요. 시행 26년차에 이르고 있지만, 뿌리깊이 상존하는 부패, 부조리의 만연과 고질적인 무능, 무엇보다 상습적인 정치적 기회주의가 뒤엉켜 절반의 실패로 평가되는 현 지역자치를 질적으로 도약가능하게 하는 변혁의 키는 지역자치장과 의원을 현재 정당으로부터 완전 분리하여 ‘주민추천제’로 전환하는 일과 함께 예산편성과 재분배를 면밀하게 조율하는 생활입법의 주민참여를 명문화하는 일입니다. 

이는 지금 당장 가능하며 획기적으로 한국 정치를 변화시킬 핵심 모멘텀이죠. 나는 이 문제의 중심에 문학이 자리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최인훈의 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매우 순도 높은 정치적 언어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문학은 이 문제에서 진일보한 한 사유의 전개를 목도할 수 있는데요. 『로기완을 만났다』(조해진)의 완성도나 문학적 밀도는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작가가 기획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미학적 사건은 무의식적 영역에 자리할 가능성까지 있습니다. 소설 속 1987년 5월1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 제7작업반에서 태어난 ‘로기완’이 제3지대로의 이동 과정에서 보여준 한 실존과 실존의 연민과 연대, 가족과 가족의 연민과 연대, 마을과 마을의 연민과 연대의 사슬을 이루는 정조를 나는 ‘병영국가주의 해체’의 주요한 미적 사건으로 읽고 싶은 거죠. 그 미적 충격이 ‘국가이후의 국가’를 구성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테제의 정초가 될 수 있습니다. 정치의 본질이 의견의 불일치라는 측면에서 나아가 미적 정치의 재구성이 영구문화혁명을 정초할 가장 강력한 토대라는 점에서, 이 소설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미적 기획은 기존의 잡다한 문제의식 외에도 정치와 문학의 핵심문맥에서 재평가할 가치가 있죠. 

위에 예시한 두 명제, 그러니까 남한 지역자치의 단계적 해체와 재조직화, 미적 열망으로서의 병영국가주의 해체는 남한 현 단계 정치에서 새롭게 시도해볼 ‘협의체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나 ‘소국적 연방제아나키(란다우어)’를 모델로 한 한반도중립국화의 정치체를 정초하기 위한 주요한 수순처럼 보입니다. 나는 그 궁극을 ‘에코아나키’로 포획한 것인데요. 이는 현 남한 인민의 역량만으로도 충분히 실현가능하며, 그렇다는 면에서 지역자치 재구조화 과정에서 정치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문학은 이 과정에 가장 핵심적 가치를 인민에게 질적으로 웅숭깊게 드러내게 되어 있는데요. 전환기의 사회와 삶에서 여전히 문학이 혁명적 발화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매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저자: 신철하 강원대 영화서사/비평이론   

『자연과생태』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강원대 영상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봉인된 시간』(2020), 『노자와 에로스』(2016), 『사랑의 파문』(2016), 『이미지와 욕망』(2012), 『미완의 시대와 문학』(2007), 『역사의 천사』(2001), 『한국 근대문학의 이상과 현실』(2000), 『문학과 디스토피아』(199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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