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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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 승인 2021.12.06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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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너의 별을 따라가거라!
행복하게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널 정확히 본 거라면,
넌 영광의 하늘에 닿을 것이다(「지옥편」, 15곡 55~57행)

 

   짐작하겠지만 『신곡 La Divina Commedia』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서사시 형식을 취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일단 읽어내기만 한다면 오래오래, 아니 평생 품어 되뇌는 책이 될 것이다. 만약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면 반드시 서점에서 사고야 말 책이다. 심지어 눈에 매우 잘 띄는 곳에 두고 거듭거듭 읽을 책이다. 라임의 구조를 맞추는 서사 언어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단테가 쓴 원본을 읽고 싶어, 마침내는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일을 버킷리스트에 기꺼이 추가할 책이다.

   살면서 더러 더러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잘 살고 있나, 하는 생각에 빠지는. 원하는 목표를 향하여 치열하게 치닫다가도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일까, 하는 생각. 그 길이 맞지 않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나, 하는 생각. 그럴 때 나를 살펴주고 또 사유를 확장시켜주는 책이 바로 『신곡』이다. 그래서 나는 『신곡』을 참으로 좋아한다.
   흥미롭게도 ‘신곡’이라는 책의 제목과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이 단테의 본명이다. 그의 본명은 두란테, Durante, 참고 견디는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지옥 같은 삶을 살았지만, 참고 견뎠던 사람, 단테! 그래서 살아 있었으나 지옥으로 갔던 사람,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 책을 섬세하게 읽는 과정 가운데 하나가 저자와 대화하는 방식을 택하는 일이다. 『신곡』이 창작된 1321년, 그러니까 꼭 700년 전의 단테를 오늘로 소환한다면, 그는 과연 우리와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아니, 대화를 나누기 전에 그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지옥편」 1곡 1~3행)

   『신곡』을 펼치자마자 만나는 내용이다. 보자마자 든 생각, 이는 바로 나의 이야기! 실존주의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불안하다. 이러한 실존적 고뇌를 부추기는 것은 단테에게 다가온 표범과 사자와 암 늑대로 상징되는 탐욕과 권력욕과 애욕 들이다.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는 단테를 부드러운 미소로 손을 잡고 비밀의 장소로, 지하세계로 이끈 이는 그의 롤 모델인 베르길리우스! 무려 1,300년의 시간을 무화시키면서 만난 두 사람. 여기서 그 유명한 대사 ‘Non uomo, uomo gia fui’, 사람은 아니나 전에는 사람이었다(「지옥편」 1곡 67행), 떠올린다. 이탈리아에 가면 한 번쯤은 써먹는 유명한 대사. 
   여기서 베르길리우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

네가 이 숲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다른 길로 가야 한다(「지옥편」 2곡 32행)

   그러니까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나려면 나아갈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쿵, 마음에 와 닿은 대목이다. 때로는 어두운 숲 속에 놓여도 숲 바깥을 알지 못하니 감히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나의 모습을 아프게 꼬집은 때문일까. 다행인 것은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길을 찾은 것처럼 나도 단테를 읽으며 순탄하지는 않지만 삶의 또 다른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단테의 손을 베르길리우스가 잡아주고, 나의 손을 단테가 잡아주고. 베르길리우스와 여행을 떠난 단테처럼, 단테와의 여행이라면 나도 연옥과 천국 이전에 지옥이 있더라도, 기꺼이!

 

                                   Dante Domenico di Michelino Duomo Florence (출처: Wikipedia)

   제일 마음을 옥죄는 것이 「지옥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차고 넘치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심. 지옥은 동심원 모양으로 9개로 이루어져 있다. 림보, 애욕, 탐욕, 낭비와 인색, 분노, 이교도, 폭력, 사기와 위조, 배신의 지옥들. 이 아홉 개의 지옥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곳이 림보 지옥이다. 림보limbo는 가장자리라는 뜻인데, 영어에서 ‘I’m in the Limbo‘는 상황이 모호해서 어떠한 결정도 내리기 어렵다는 관용구. 무엇보다 림보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까닭은 저명한 예술가나 작가들, 철학자, 수학자, 의사 들이 모두 그곳에 붕, 떠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도 림보에 있다니!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던 사후 세계 가운데 하나인 파르나소스Parnasos,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대개 죽은 후 간다는 파르나소스가 『신곡』에서는 지옥의 일부라는 사실도 놀랍다. 지옥 불구덩이를 살짝 비껴나 있는 파르나소스. 그렇다면 예술이나 인문학으로는 인간 삶의 길을 밝혀줄 수 없다는 말인가. 이른바 인문학, 문학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무척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단테를 소환하여 꼭 물어보고 싶은 대목이다. 아니, 베르길리우스에게 물어봐야 하나.
   9개의 지옥의 밑바닥에서 별을 우러러보며 단테는 연옥으로 들어간다. 「연옥편」은 낯설다. 연옥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이다. 지옥의 형벌도 받지 않고 천국의 영광도 누리지 못하는 곳.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불로 단련 받는 곳. 그렇다면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 연옥인가. 이 연옥에는 7개의 산, 연옥의 산이 있는데 교만, 질투, 분노, 나태, 인색, 탐식, 음욕들로 꾸려져 있다. 그곳에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연옥편」, 2곡 132행), 가고자 하나 갈 곳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희망을 가졌으나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순례자처럼 연옥의 산을 오른다. 그 속에 나의 얼굴도 보이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마음이 어수선하다. 
   「연옥편」 끝부분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사라진다. 대신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는데, 그 천사는 단테가 평생 사랑해마지 않은 베아트리체. 단 두 번 만난 그녀를 단테는 운명처럼 사랑했는데, 천국의 문 앞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단테를 데리고 천국으로 간다. 「천국편」에는 온통 별과 빛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라고 부탁한다. 여기서 천국에서 드리는 단테의 마지막 기도는 의미심장하다.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길 수 있도록/ 당신의 영광의 단 한 순간 불티라도/ 
             포착할 정도의 힘을 나의 혀에 주소서(「천국편」 70~72행)

   『신곡』은 찬란히 빛나는 별들이 무수히 많은 천국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작품을 골몰하여 읽다보면 유난히 ‘별’이 우리 마음을 헤집는다. 「지옥편」의 마지막 행은 “그렇게 해서 밖으로 나와 별들을 다시 보았다.”(34곡 139행)로 끝나고, 「연옥편」의 마지막 행은 “별들에게 올라갈 열망을 가다듬었다.”(33곡 145행)로 끝난다. 「천국편」의 마지막 부분을 보자.

            여기서 나의 환상은 힘을 잃었다. 하지만/ 내 소망과 의지는 이미, 일정하게/ 돌아가는 
         바퀴처럼,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이끌고 있었다(33곡 142~145행).

   별을 곳곳에 배치한 것은 단테의 의도가 아닌가 한다. 지옥의 입구에 씌진 글귀,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지옥편」 3곡 9행), 그러니까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이다. 곧, “별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이 지옥인 셈이다(“한숨과 울음과 고통의 비명들이/ 별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처음 들은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지옥편」 3곡 22~24행). 아름답고도 멋진 메타포다. 
   단테에게 별이 희망의 메타포라는 것은 그의 경구 Aforismo에서도 확인된다. 인간 세상에는 에덴동산의 중요한 것들이 다 없어졌는데, 딱 3개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꽃과 아이와 별이 그것이다. 천상의 즐거움, 행복, 희망을 주는 것이 우리에게 아직 3개나 있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니까 애정을 가지고 별을 볼 줄만 안다면, 희망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테의 인문학적 사유를 엿본다. 별이 있고 없고의 문제보다 그 별을 볼 줄 아는 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중요해서이다. 단테를 소환해서 대화를 나눈다면 그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보라”라고 말할 것 같다. 윤동주 시인도 소환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도 함께 낭송할 것 같다. 그럼, 우린, 맑은 날, 밤하늘의 별을 꼭 보는 걸로!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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