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혼불'의 문학적 공간 … 전북 남원 옛 서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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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혼불'의 문학적 공간 … 전북 남원 옛 서도역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1.12.06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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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 전북 남원 옛 서도역

 

옛 서도역. 1932년에 준공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 역사로 최명희의 대하소설인 ‘혼불’의 주요 배경이다.<br>
옛 서도역. 1932년에 준공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 역사로 최명희의 대하소설인 ‘혼불’의 주요 배경이다.

마을 입구에 어엿이 서 있는 것은 제법 큰 정미소였다. 열린 문으로 수레차가 능숙하게 후진해 나와 도로를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본다. 많이 보아왔다, 빈 정미소. 그것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작은 마을의 흥성과 망쇠의 모뉴먼트로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현재 운영 중인 단정한 정미소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가 있다. 수레차가 천천히 가로지른 길을 또한 천천히 걷듯 달린다. 보건소와 양옥집들, 담벼락에 그려진 소소한 벽화들을 본다. 그리고 ‘혼불숭어리들름터’라고 적힌 방문자센터가 있다.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느슨히 걸린 플랜카드에 ‘마을 농산물 로컬마켓’이라 적혀 있고 내부는 어둡다. 그 맞은편으로 고목의 가지 끝에 매달린 기차역이 보인다. 사람도, 기적도 없다. 

 

옛 서도역의 수동 선로 변환기. 이 외에도 완목신호기 등의 철도관련 시설이 남이 있다.

역사(驛舍)는 거무튀튀한 더께가 묻어 있는 목재 단층의 기와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역사라 한다. 출입문의 차양지붕 위에 ‘서도역’이라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역사 옆으로 근래에 칠을 한 듯한 하얀 건물이 나란하다. 화장실, 직원휴게소, 창고 등이 있던 곳이다. 앞마당에는 이끼를 두른 거대한 둥치의 벚나무가 수형 곱게 서 있다. 역사 내부는 텅 비었고 깨끗하다. 이리방면, 여수방면으로 나뉜 열차 시간표, 매표창구, 긴 벤치, 창으로 깊이 파고든 햇살이 전부다. 창 너머로 녹슨 철로와 수동 선로 변환기가 사진처럼 걸려 있다. 개찰구를 빠져 나가면 철길은 먼 곳으로 사라진다.

 

                       남쪽 여수 방향의 철길. 늘어선 벚나무들은 전라선 완공 당시 식재된 것이라 한다.
                   철길 너머로 서촌마을이 보인다. 역 주변 일대가 모두 서촌이며 원래는 역촌이라 했다.

서도역은 남원 매전면의 서도리(書道里)에 자리한다. 서도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서원리(書院里)와 도촌리(道村里)를 병합해 만든 이름이다. 서도리의 자연마을로는 노봉리, 수촌리, 서촌리가 있다. 서촌리는 서도역이 소재하는 마을이라 원래 역촌이라 했다가 1960년대에 서촌으로 바뀌었다. 허허들판에 기차 레일이 깔린 것은 1931년, 전라선(당시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되었을 때다. 역사는 그 이듬해인 1932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서도역은 지난 2002년 고속철 개통에 따라 전라선을 옮기면서 폐역이 되었다. 그리고 2006년 지역주민과 사회단체의 보존 건의를 남원시가 받아들이면서 영상촬영장으로 거듭났다. 영화 ‘동주’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등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북쪽 이리 방향의 철길. 오른쪽 관사 건물이 영화 동주의 촬영지다.

북쪽으로 향하는 철길 가에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짧은 터널을 만든다. 그 옆으로 두 채의 집이 있다. 역장관사와 역무원관사다. 역장관사는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하숙집으로 쓰였다. 남쪽의 철길 가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전라선 완공 당시 식재된 것이라 한다. 역사 앞마당의 벚나무도 같은 시기가 아닐까 싶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이 철길 사이에 앉아 마음으로 애원했다. ‘오지마. 오지마라.’ 그날 고애신은 왔고, 이제 기찻길은 이리로도 여수로도 가지 않는다. 그것은 가다가 만다. 저기까지, 또 저기까지. 옛날 서도역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이웃한 순창 사람들도 서도역으로 와 열차를 타곤 했단다. 역전 거리에는 가겟집이 즐비했고 두 개나 있던 이발소는 명절 때가 되면 한나절씩 기다려야 할 만큼 벅적거렸다고 한다. 휑한 역전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자그마한 서도교회 옆으로 관사 건물의 이면이 나란하다. 그들 맞은편으로 난 언덕진 길 위에 새로운 서도역이 있다. 새로운 서도역은 지어진지 2년만인 2004년에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고, 2008년 7월 1일 역무원이 철수했다. 

 

역전거리.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서도역이 나온다. 교회 뒤로 관사가 이어지며 길 끝에서 우회전하면 노봉마을로 향한다.

서도역은 드라마와 영화로 유명해졌지만 이미 훨씬 전에 최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지로 알려져 있던 곳이다. ‘혼불’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매안이씨 양반집안의 3대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작품은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몰락하는 양반과 신분 상승을 꿈꾸는 상인의 갈등을 축으로 당대 남원 반가의 풍속과 언어가 생생하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원고는 전체 4만 6천장. 그 배경이 서도리의 자연마을인 노봉마을이며 원고의 첫 장면이 서도역에서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서도역은 ‘정거장’ 혹은 ‘매안역(梅岸驛)’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주인공 허효원이 열아홉에 완행열차를 타고 시집을 오는 장면에서 이 역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청호저수지. 둑길에 짧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줄지은 솟대들이 동쪽을 바라본다.

서도역에서 노봉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수풀 우거진 낮은 언덕이 팔을 길게 뻗어 감춰 놓았다. 그 언덕 아래를 돌아 들어가면 노적봉 기슭에 자리한 노봉마을이 있다. 노봉마을은 삭령최씨가 500년간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작가 최명희의 고향이다. 사람들은 노봉마을을 ‘혼불마을’이라 부른다. 소설에서 노봉마을은 매안마을로 나온다. 마을 안쪽에는 종부 3대인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이 살던 곳으로 묘사된 종택이 있다. 그리고 마을을 비스듬히 굽어보는 한 뼘 높은 자리에 ‘혼불 문학관’이 있다. 2004년 10월에 문을 연 문학관은 유품 전시실과 집필실인 작가의 방, 주제 전시실 등 최명희의 문학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취들로 채워져 있다. 문학관 옆에는 청호저수지가 있다. 소설에서 청암부인이 가뭄에 대비해 팠다고 묘사한 못이다. 실제 청호저수지는 최명희의 집안에서 100년 전에 만든 것이라 한다. 둑길에 짧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줄지은 솟대들이 동쪽을 바라본다. 

‘혼불’은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17년 동안 쓰여졌다. 긴 시간 집필에만 매달렸던 최명희는 결국 난소암으로 쓰러졌다. 사람들은 최명희가 칩거해 있던 서울 청담동 성보아파트를 ‘성보암’이라 불렀다. 성보암에서 최명희는 도를 닦는 스님이었다. 마지막 탈고 4개월 동안 그녀는 자리에 눕지도 않았다고 한다. 1998년 12월 11일 결국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쉰 한 살이었다. 쓰는 길, 서도(書道). 그 이름 참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말했다. ‘제 고향 땅의 모국어에 의지하여 문장 하나를 세우고, 그 문장 하나에 의지하여 한 세계를 세워보려고 합니다. 한없이 고단한 길이겠지만, 이 길의 끝에 이르면 저는, 저의 삶과, 저 자신이, 서로 깊은 이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혼불’은 10권으로 일단 마무리되었지만 그녀는 더 쓰겠다고 했다고 한다. 몌별인가, 소매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안타까운 이별. 어떤 고단한 길을, 어떤 안타까운 이별을, 서도에서 생각한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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