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디드로, 『배우에 관한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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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디드로, 『배우에 관한 역설』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
  • 승인 2021.11.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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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18세기 인문학자 드니 디드로와 장 자크 루소를 소개할 때 철학, 문학, 예술 등 당대의 모든 지식 영역에서 활동한 전방위적 지식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된다. 계몽사상의 시대가 학문의 전문성과 분화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시기라고 간주해도 두 사람이 각 영역에서 보여준 지식의 깊이를 고려하면 그들이 이룬 학문적, 예술적 성과는 놀라운 것이다. 그들이 참여한 『백과전서』가 당대의 사상을 집대성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두 사상가의 활동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다만 디드로의 저작은 루소에 비해 학문 영역이 혼재되어 있고 철학과 미학, 문학 등의 주제를 대화체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들이 그의 사상체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디드로는 프랑수아 부셰의 도발적인 그림, <갈색 머리 오달리스크>에 대해 “이 사람은 진실 말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혹평을 한 살롱 혹은 미술비평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예술에 민중을 교육하는 성스러운 사명을 부여한” 계몽사상가의 눈에 “방종과 나쁜 풍속”을 찬양한 부셰의 그림이 탐탁지 않게 여겨진 것은 당연했다. 반면에 『배우에 관한 역설』(문학과 지성사, 주미사 옮김)은 연극에서 요구하는 연기론이며 굳이 장르를 정한다면 문학과 미학에 속하는 저술이다. 이 책은 철학자 혹은 미학자가 들려주는 연기론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고 고전극에서의 이상적인 연기와 현대의 연극 혹은 영화에서의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하고 싶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디드로의 여러 저작에서처럼 1과 2라는 사람의 대화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연기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들지만 대화체 형식의 구성은 오히려 독자의 궁금증과 몰입을 유발하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

드니 디드로(1713-1784) (사진: 위키백과)

성급한 독자라면 뛰어난 배우의 조건에 대해 알고 싶은 조급증을 낼 텐데 디드로는 “미신적인 사람들이 믿음을 믿는 것처럼 감성적인 사람들은 느낌을 믿겠죠.”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말로 운을 뗀다. 디드로는 두 사람의 대화를 완성해가면서 무대에서의 ‘감성’의 역할을 지적한다. 즉 “극도의 감성은 시시한 배우들을 만들고…, 뛰어난 배우를 만드는 것은 감성의 전적인 결여”임을 분명히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가 ‘혼신의 연기’로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몰입하고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 마치 그 인물이 된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이중의 자아에 혼란을 느끼는 것을 연기자의 덕목으로 알았던 독자에게는 조금 혼란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디드로는 “배우의 눈물은 그의 머리에서 나온다.”는 말로 무대에서의 감성의 객관화 혹은 거리두기를 강조한다. 쉽게 말하면 배우는 감성이 아닌 머리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80년대까지 우리 영화를 스스로 낮추어 방화(邦畫)로 (단어 자체는 자국 영화라는 뜻일 뿐인데 말이다) 부르던 시절에는 배우들에게 감성의 과잉이 넘쳐났던 것이 사실이다. 관객들이 배우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니 말이다.

디드로는 감성의 객관화와 거리두기에 대해 적절한 비유를 통해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 시인이 친구나 애인이 죽자마자 시를 쓴다는 것은 위선이고 그런 재능을 즐기는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 고통의 시간이 지나 감정이 가라앉고 나서야 지난 추억을 반추하며 마침내 펜을 들 수 있게 된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도 딸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가 13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시집을 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연기자도 감성의 거리두기가 이루어졌을 때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디드로는 “감성은 무대 위에서나 사회 속에서도 해롭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여전히 일대일 대화를 통해 이른바 ‘위대한 배우의 조건’에 대해 설득하듯이 때로는 단호하게 그러면서도 차츰차츰 들려주기 때문에 독자는 『배우에 관한 역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성급한 독자를 위해 요약하자면 위대한 배우는 현상의 관찰자이고 어떤 성격도 갖고 있지 않아야 하며 그가 실제 화를 낼 때보다 그 격분을 연기할 때 관객들은 더 공감한다. 이를 위해서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잘 모방된 열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연기론을 정리하면서 디드로가 말하는 “사회에서 인간이란 위대한 배우”라는 지적은 더 의미심장하다. 사회 속 인간은 느끼지 않은 것을 말해야 하고 더 많은 역할을 모방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보다 훨씬 더한 극한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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