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 접어 나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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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 접어 나빌레라
  • IBS(기초과학연구원)
  • 승인 2021.11.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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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리포트]

 

St. Vitus Cathedral, Muchas window: 예배당을 가득 채운 색유리 그림인 스테인드글라스. 과학자들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하던 중 새로운 반도체 소재를 발견했다. Martin Kozák (위키미디어)

1982년 러시아 과학자들은 예배당을 장식하는 색 유리창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하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구리, 철, 망간과 같은 다양한 금속 화합물을 녹인 다음 유리에 발라 여러 가지 색을 표현해 만든다. 과학자들은 반도체 주요 소재인 카드뮴(Cd) 화합물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반도체의 주요 소재인 ‘양자점(퀀텀닷·quantum dot)’을 발견했다.

 

반도체는 어떻게 빛을 낼까?

반도체는 외부에서 전류나 빛 에너지를 받으면 스스로 빛을 낸다. 예를 들어 LED(발광다이오드)는 외부에서 전류나 빛 에너지를 받았을 때, 전자의 에너지가 얼마나 높아졌다가 다시 떨어지는지 그 변동 폭에 따라 발하는 빛의 색을 결정한다. LED를 구성하는 원소화합물인 비소화갈륨(GaAs)은 빨간색을, 인화비소화갈륨(GaAsP)은 노란색을, 질소화살륨(GaN)은 파란색을 발한다.

물질은 저마다 고유한 에너지 변동 폭이 있다. 하지만 물질 입자크기가 나노 단위로 작아지면, 물질의 이 고유한 에너지 변동 폭이 변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알고 있는 금(Au)덩이는 손톱만 한 크기도, 주먹만 한 크기도 모두 노란색이었다. 하지만 이를 나노 단위로 쪼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빨간 금도 있고 파란 금도 있다. 실제로 금을 나노 단위로 작게 나누면 입자크기에 따라 빨간색(7 나노미터, nm, 1nm=10억분의 1m), 초록색(5nm), 파란색(3nm)을 발한다. 지름이 7nm로 큰 입자는 변동 폭이 줄어들면서 빨간색을, 지름이 2 나노미터로 입자가 작아지면 변동 폭이 커지면서 파란색을 발하는 원리다. 변동 폭이 커지면 외부에서 에너지가 들어왔을 때 전자가 내뿜는 에너지가 더욱 크다는 말이다.

 

양자점은 입자크기가 커질수록 변동 폭이 줄면서 빨간색을 띈다.
양자점은 머리카락 한 가닥의 두께보다 5만 배, 그 보다 더 작은 반도체 입자다. 같은 물질로 만들어진 양자점이라도 크기에 따라 발광하는 색이 다르다. 예를 들어 입자의 크기가 작을수록 파란색(왼쪽), 입자의 크기가 클수록 붉은색(오른쪽)을 발한다. Antipoff(위키미디어)

러시아 과학자들은 머리카락 한 가닥의 굵기보다 5만 배 더 작은 이 나노 크기의 반도체 입자의, 특별한 성질에 주목했다. 크기에 따라 서로 다른 색을 보이는 ‘물질’를 발견한 이 일은, 발광 반도체 역사의 큰 획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될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다.

 

같은 물질인데, 색이 다 다르다니!

원래대로라면 특정한 색을 발하는 반도체를 만들려면 각각 새로운 물질을 찾아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양자점을 발견하면서, 반도체 입자크기만 조절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색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완벽한 총천연색 구현을 꿈꾸는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양자점’은 효자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이렇게 입자크기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현상을 ‘양자 구속 효과(Quantum Confinement Effect)’라고 불렀다.

이를 시작으로 양자점 연구는 1990년에 들어서 활발해졌다. 그러다 1993년, 미국 연구팀이 양자점 크기를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콜로이드 합성법’을 개발했다.

기본 합성법은 매우 간단하다. 흔히 반도체 소재로 사용하는 아연, 카드뮴과 같은 12족 원소와 황, 셀레늄과 같은 16족 원소를 모두 섞어 가열하면 된다. 물론 입자 표면을 안정화하려면 부가 물질도 함께 사용해야 한다. 입자크기가 작을수록 표면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입자 표면 면적이 해당 양자점의 전체 특성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시작으로 과학자들은 양자점 연구에 매달리며 다양한 합성법을 연구했다. 그러다 2015년에 우리나라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연구팀이 갈륨, 인듐과 같은 13족 원소와 인, 비소와 같은 15족 원소를 활용한 새로운 합성법을 개발해 QLED TV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2019년에 삼성전자 연구팀은 양자점 소재의 구조를 개선해 자발광 QLED 소자의 발광 효율 21.4%를 달성하고, 소자 구동 시간을 업계 최고 수준인 100만 시간(휘도 100니트 반감수명 기준)으로 구현한 최신 연구 결과를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했다.

 

디스플레이, 이제 종이처럼 접을 수 있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의 QLED는 어떨까? 어느새 ‘접는 디스플레이 시대’가 도래했다. 2021년, 디스플레이를 안쪽으로 접는 인폴딩(in-folding) 방식 스마트폰은 물론, 조개처럼 위아래로 접을 수 있는 클램셸(Clamshell) 방식까지 접는(폴더블·foldable) 스마트폰이 연일 화제였다. 한국 대표로 삼성전자가 갤럭시 ‘플립’ 시리즈를 선보이며 이 시장에 앞장섰고, 미국에서는 모토로라 ‘레이저(RAZR)’로, 중국에서는 화웨이 ‘메이트Xs’로 맞섰다. 디스플레이를 ‘접거나 말아서(롤러블·rollable)’ 형태를 변형하는 전자기기가 상용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왼쪽) 조개처럼 위아래로 접을 수 있는 클램셸(Clamshell) 방식 스마트폰 / (오른쪽) 디스플레이를 안쪽으로 접는 인폴딩(in-folding) 방식 스마트폰 (위키미디어)

‘접는 것’에 집중한 국내 연구자들이 디스플레이를 종이접기처럼 자유자재로 접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지난 9월 24일, 기초과학연구원(IBS) 김대형 나노입자연구단 부연구단장(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과 현택환 단장(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 공동연구팀은 디스플레이를 종이처럼 자유롭게 접을 수 있는 양자점 디스플레이인 3차원 QLED 개발에 성공하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일렉트로닉스’에 논문을 발표했다.

QLED는 액정화면과 다르게 스스로 빛을 내므로 빛을 쏴주는 광원이 필요 없어 디스플레이를 얇게 제작할 수 있다. IBS 나노입자연구단도 2015년에 머리카락 두께의 약 30분의 1 수준인 3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미터) 두께의 아주 얇은 QLED 디스플레이를 개발한 경험(DOI: 10.1038/ncomms8149)이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종이접기처럼 디스플레이를 원하는 모양으로 접을 수 있는 3차원 QLED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종이접기에서 ‘접는 선’을 미리 만들어 종이를 쉽게 접을 수 있는 것처럼, 연구팀은 QLED 표면의 일부분을 이산화탄소 레이저로 깎아서(식각)★ QLED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접히도록 했다. 깎인 부분이 주변보다 두께가 더 얇아져 힘을 가하면 쉽게 변형할 수 있는 원리를 이용했다.

★ 이산화탄소 레이저로 깎는 방식(식각): 이 방식은 화학반응으로 QLED 표면에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물질을 제거하는 표면가공법 중 하나다. 연구팀이 사용한 방식은 QLED 표면에 붙은 에폭시 박막을 부분적으로 벗겨내는 '선택적 레이저 식각 공정'이다. 이때 QLED와 에폭시 박막 사이에는 은과 알루미늄 합금으로 구성된 얇은 식각 방지층이 있다. 덕분에 레이저 공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QLED 내부 손상을 막을 수 있다.

 

연구팀이 이번에 개발한 3차원 QLED 디스플레이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든 모습. 2차원 디스플레이를 종이접기와 같은 방식으로 접어 완벽한 3차원 형태를 이루고 있다. IBS 제공

이렇게 QLED를 정밀하게 깎아 디스플레이를 반듯하게 접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위 사진과 같이 이 QLED로 비행기나 나비, 사면체와 육면체와 같은 다양한 3차원 모양을 띤 디스플레이를 만들었다.

특히 피라미드를 닮은 사면체 QLED는 평면(2차원)과 입체(3차원)를 자유롭게 오가도록 변형할 수 있었다. 이는 64개의 픽셀로 구성해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로 자유자재로 접을 수 있는 디스플레이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연구팀은 실제로 QLED를 500번 이상 접었다 펴면서 내구성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모서리 부분을 포함한 모든 화면이 잘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김대형 부연구단장은 "앞으로 더 복잡한 형태인 QLED 디스플레이 제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현택환 단장은 "전자 종이나 신문, 태블릿과 같이 작은 크기의 디스플레이가 필요한 곳에 유용하게 사용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고이 접어 나빌레라”

조지훈 시인이 1939년에 발표한 시 ‘승무’의 첫 구절은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로 시작한다. 여기서 ‘나빌레라’는 ‘나비’와 옛 문체에서 쓰이던 용언 활용형 ‘-ㄹ레라’라는 어미가 더해져 ‘나비 같다’는 의미다. 이 시는 승려가 추는 춤인 승무를 묘사하며 쓴 시인데,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 나비와 같이 가뿐하게 날아오르는 모습과 닮았다는 함축적인 뜻을 담았다. QLED 디스플레이도 ‘고이 접혀’ 나비처럼 가뿐하게 날아오를 날이 머지않았다.

 

[출처] IBS(기초과학연구원) 포스트 | IBS 나노입자 연구단 시리즈 | 2020. 11. 26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830589&memberNo=3757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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