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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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 류웅재 한양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 승인 2021.11.2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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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대학지성>으로부터 원고를 청탁받고 어떤 주제로 어떤 글감을 골라 독자들과 대화할지에 관해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보통 신문이나 계간지 등에서 비슷한 부탁을 받으면 큰 고민 없이 직업의식의 발로에서, 혹은 약간의 나태함과 타성에 젖어 제 전공인 미디어나 언론, 대중문화 등에 대한 글을 안전하게 쓰는 행로를 선택하곤 했습니다. 이번 역시 그럴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용기를 내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대학의 위기론이 도처에서 봇물 터지듯 운위된 지도 꽤 시간이 흘러 이제 그 기표는 하나의 클리셰처럼 쓰입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대학 내 인문학의 위기, 학령인구의 감소에 따른 지방대 소멸, 그로 인한 지역의 위기 담론들이 언론과 대학 내부자들의 목소리로 진지하게 발화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의 상황은 우리 대학 구성원들이 분명하게 촉지하고 있듯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최근 대학을 둘러싼 학문의 자유, 절대 권력에 맞서는 날카롭게 벼린 빛나는 사유와 재기발랄한 언어들, 다양한 차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면서도 공동체를 지탱하게 하는 무수한 개인들의 말의 창발성은 그 어느 때보다 위축된 상황입니다.

특히, 단일하고 협애한 세계관과 그를 둘러싸고 확대 재생산되는 프로파간다적 언어들이 다른 그것들을 압도하는 가운데 현저하게 득세하는 상황에서, 대학이 생산하는 지식의 기능과 쓰임새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자본의 도구화가 되고 있고, 또 그 정도나 양상 역시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는다는 세설에서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이비 지식인들의 현대사회에 대한 긍정적 전망, 이를테면 풍요를 운운하는 이야기는 진실일 수 없다고 일갈했습니다. 또한 그러한 지식인들의 계책은 사람에 따라, 체념이나 개혁주의 등, 지배 계급에 의해 주입된 가치 체계가 얼마만큼 그들의 객관적 지성을 흐려 놓는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종국적으로 지식인의 근본적인 목적, 혹은 사회적 역할은 인간의 해방, 보편화, 즉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는 이야기, 일련의 거대담론은 더 이상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유효한 전망을 투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들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주류적 담론으로 등장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런 시대적 문맥에서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인간의 해방이나 인간성의 회복에 대해 광범위하게 합의된 공론이나 권위를 획득한 학문적 견해를 구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우리 자신들이 어느새 이런 이야기들을 무의식적으로, 혹은 누적된 피로감으로 인해 짐짓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물론 인간 해방이나 보편성의 정치,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나 단일한 모범 답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에 대한 사유나 욕망을 멈추는 순간, 사회과학(자)의 존재 준거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더욱이 사회 변화에 대한 의지와 이를 위한 전향적 시각을 지닌 젊고 전도유망한 연구자들이 대학이나 기업, 정부출연 혹은 지자체 연구소라는 안정된 직장에 안착하기 위해 이러한 열정이나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과학이나 기술진보가 빠르게 추동하는 사회 변화에 조응하는 과학적, 객관적, 중립적으로 보이는 연구에 대한 지향과 전문성의 확장은 시대적 우세종이거나 연구자로서의 커리어 개발과 관련한 현명한 전략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다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조언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참여, 개방, 공유를 전제로 하는 스마트한 이용자나 지속가능한 네트워크 사회, 플랫폼이 약속하는 밝은 전망의 이면에 이것들을 겨냥하거나 활용하는 대자적 기표들, 일례로 물신화한 기술 이데올로기, 감시사회, 무임금 노동, 지속불가능함을 지속가능하게 하려는 정동자본주의, 혐오와 편 가르기, 알고리즘 등의 문제가 짝패처럼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이제 과거처럼 학문을 수행하기 위해 성직이나 학위가 꼭 필요한 시대는 아닙니다. 또, 과거 대학의 권위나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일조한 개별 지식체계나 분과 학문으로 촘촘하게 구획화된 대학의 전공 제도가 최근 복수, 다중, 마이크로 전공 등의 제도를 통해 이른바 학문의 융합과 통섭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시대, 지식 생산 패러다임이 빠르고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오늘날, 역설적으로 사람이 대면으로 만나고 소통하며, 소중한 지식과 경험이 아날로그적으로 교통 및 공유되는 오프라인, 바꿔 말해 직접성과 물질성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과학의 과학과 기술 진보가 약속하는 떠들썩한 소문 이면의 환영과 음모를 밝히고 그 방향과 속도를 제어하는 일, 이를 위한 딸깍발이의 삐딱함, 정곡을 찌르는 모호함, 관성을 거부하는 까칠함, 어떤 국면의 도래가 영속적이거나 안정적인 상황 변화를 의미하지 않음에 대한 날카롭고 비타협적 자각, 이를 위한 지속가능한 변화와 쇄신이 더욱 필요한 때가 아닌가 여깁니다.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나의 전문 분야와 직업의 세계에서 필요한 지식과 스킬을 몸에 익히고 유용한 정보를 가능한 많이 획득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자 일종의 직업윤리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것은 인간과 사회, 자신과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진지하고 쉼 없는 고민과 성찰, 고독한 자기 갱신의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이는 대체로 번거로운 감정의 소모와 대책 없(어 보이)는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몸과 마음 씀 없이 사회과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라고 자부하거나 실질적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성취해 내기는 어려운 일일 듯합니다. 그건 마치 사랑이나 영혼 없는 전문인이면서 무언가 결핍되거나 탈색되어 있는 기능인, 혹은 업자의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류웅재 한양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한대신문 편집인 겸 주간, 한대교육방송국 주간, 한국방송학회 총무이사, 기획이사, 연구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장, 한국언론정보학회 기획이사로 일하고 있다. 주 연구 주제는 방송 영상,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이론, 문화산업, 문화정책, 문화연구, 국제커뮤니케이션이다. 저서로 <미디어 담론 연구>, <한류에서 교류로>(공저), <고어텍스와 소나무>(공저), <작은 문화콘텐츠 만들기>(공저), 역서로 <마르크스, TV를 켜다>(공역)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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