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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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1.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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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 정재윤 지음 | 푸른역사 | 316쪽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백제는 ‘잊힌 왕국’이다. 실제 백제하면 삼천 궁녀, 낙화암, 의자왕, 계백을 떠올린다는 답이 70퍼센트에 가깝다는 조사도 있다. 기껏해야 근초고왕, 성왕, 아직기와 왕인을 더할 따름이다. 만주 등에서 한민족의 기개를 떨친 고구려, 한국사의 뼈대를 이룬 신라와 더불어 한반도의 패권을 다툰 백제에 어울리는 대접은 아니다. 고대 일본에선 ‘구다라 나이(백제 것이 아니다)’ 물건은 별 볼 일 없다는 인식이 퍼졌을 정도였다.

백제 제21대 왕 개로왕의 동생 곤지는 461년 왜로 향한다. 이때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이 동행한다. 일본으로 가는 여정 중 각라도에서 태어나 시마(섬)란 이름이 붙은 소년이 훗날 25대 무령왕이 된다. 곤지가 일본에 간 이유, 시마의 혈연적 부친이 개로왕인지 곤지인지, 시마는 왜 곤지와 떨어져 따로 성장했는지 등을 꼼꼼하게 파고든다. 시마는 규슈 일대에 자리 잡은 유력한 백제계 도왜인 집안 출신의 어머니를 둔 곤지의 서자라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 아스카 지역에서 꽃피운 백제 문화의 유적을 짚는 것은 덤이다.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인 형 곤지를 다시 부른 문주왕의 조치에 따라, 혹은 훗날 동성왕이 된 동생의 귀국에 따라 규슈에서 활동하던 시마 역시 백제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문주왕이 해구에 의해 시해된 후 동생 동성왕의 즉위에 일정 부분 기여한다. 이어 왕권 강화를 추구하며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외면한 동성왕의 견제를 받았으나 전라도 지역에 파견되어 민심을 얻는다. 《삼국사기》에서 “인자하고 너그러워 백성들의 마음이 그를 따랐다”고 평한 대목에 근거한 유추이다. 그 결과 민심을 잃은 동성왕이 중신 백가에게 살해당하자 ‘나라사람들(國人)’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나이 마흔 때 일이다.

왕권을 쥔 무령왕의 위민정책이 돋보인다. 재위 6년(506) 춘궁기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재위 9년(509)에 임나 지역 유민의 호적을 복구하는가 하면, 재위 10년(510) 봄에 국가 주도로 제방을 완비하고 놀고먹는 자들을 몰아 농사를 짓게 했다. 이것이 부국富國을 겨냥한 것이라면 집권하자마자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하고, 재위 12년(512) 임나 4현을 수복하는 등 섬진강 유역을 확보해 일본과 중국을 향하는 물길을 확보한 것은 강병强兵을 지향한 것이라 하겠다. 그 결과 521년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국이 되다)’을 선포하고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영동대장군’의 작을 받으니 이는 당시 고구려 안장왕보다 높은 품계로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인 외교적 개가였다.

지은이는 한·중·일의 사료를 섭렵하고 고고학적 연구를 토대로 무령왕 일대기를 구성했지만 사실史實 자체는 성글다. 망국의 역사를 누가 성실하게 기록했을 것인가. 지은이는 이를 합리적 추론으로 메우는 데 성공한 것으로 읽힌다. 그렇게 해서 무령왕의 이야기를 신화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는 한편, 무령왕릉 발굴품을 살펴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를 지향한 백제 문화에 미래지향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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