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에서 잔혹으로, 생식에서 감염으로
상태바
공포에서 잔혹으로, 생식에서 감염으로
  • 이규원 서울대·인문의학
  • 승인 2020.02.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책을 말하다_ 『죽음의 철학』 (에가와 다카오 지음, 이규원 옮김, 그린비, 2019. 12)
 

스피노자에 빙의된 아르토(Antonin Artaud). 그의 들숨과 날숨에, 그리고 읽기와 쓰기에 스피노자의 영혼이 서려 있다. 누가 이토록 ‘잔혹한’ 주술을 걸었는가. 희대의 철인(哲人=鐵人) 혹은 불온의 동의어, 바로 에가와 다카오(강천隆男)다.

들뢰즈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릿쿄대학(立教大学)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특히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철학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면서 철학적 사유의 본질을 탐구해왔다. ‘모랄’을 강력히 비판하고 하나의 ‘에티카’를 형성하는 그의 일관된 과제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들뢰즈 철학 연구로 평가받는 『존재와 차이: 들뢰즈의 선험적 경험론』(이규원 옮김, 그린비, 2019)에서 천명되고 개시되었다. 그리고 존재자의 존재 조건을 재구성하는 ‘반-효과화론’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다시 써내려는 급진적인 시도가 본서 『죽음의 철학』에서 이루어진다.

▲ [그림 1] 『죽음의 철학』 원서(河出書房新社, 2005) 표지에 삽입된 그림.
▲ 『죽음의 철학』 원서(河出書房新社, 2005) 표지에 삽입된 그림.

외부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것은 반드시 외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처럼 신체가 사체로 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체성을 유지하며 전혀 다른 본성으로 변화하는 것도 죽음으로 봐야 한다. 죽음은 삶의 결여가 아니며, 삶과 마찬가지로 실재성(‘비-삶’)을 갖기 때문이다. 신의 심판과 결별하기 위해 오늘날 실천철학은 존재의 방식에 의한 본질의 변형을 요청한다. 이때 본질의 변형, 즉 다른 신체로의 변화는 따라서 하나의 ‘죽음’이며, ‘죽음의 철학’을 필요로 한다.

스피노자가 유아기의 신체는 가장 많은 것에 유능한 다른 신체를 욕망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와 더불어 “죽음의 관념을 일그러뜨리고 죽음 그 자체를 구부림”으로써 “신체의 불사를 전달하는 죽음”을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의 분열증화를 의미하며, 죽음의 철학은 곧 ‘잔혹의 철학’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존재의 공포에서 본질의 지복을 향하는 평민의 문제” 즉 공포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친다. 여기서 사유의 장(場)을 ‘영원의 상’ 아래에서 “연속변형의 상” 아래로 이행할 필요가 생겨난다.

그래서 에가와는 아르토를 주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르토야말로 “존재의 무능력에 따른 인간 본질의 변형이라는 난민의 문제” 즉 잔혹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죽음(자살)이란 생식이 아닌 ‘감염’에 의한 탄생을 선택하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을 변형하는 전염병, ‘불사에 이르는 병’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는 “참다운 신체의 투사”, ‘분신’의 형성이며,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면 ‘반-효과화’를 통해 유능한 다른 신체 즉 ‘탈기관체’로 인간을 재구성하기다. 

▲ 『죽음의 철학』 번역서(그린비, 2019) 표지에 삽입된 그림. 원작은 아르토의 1946년 작 「참된 신체의 투사(La projection du veritable corps)」(퐁피두센터 소장). 말년의 작품으로 분신, 탈기관체, 반-효과화, 욕망기계, 배치 등 많은 개념을 읽어낼 수 있다.
▲ 『죽음의 철학』 번역서(그린비, 2019) 표지에 삽입된 그림. 원작은 아르토의 1946년 작 「참된 신체의 투사(La projection du veritable corps)」(퐁피두센터 소장). 말년의 작품으로 분신, 탈기관체, 반-효과화, 욕망기계, 배치 등 많은 개념을 읽어낼 수 있다.

이제 에가와는 말한다. 본질은 ‘본질의 변형’이며, 존재 즉 ‘존재의 방식’에 포함되어 있다고. 존재에는 자신의 본성조차 변형시켜버리는 혁명적인 힘이 내재해 있는 것이라고. 그 자신이 확장시킨 들뢰즈의 원리에 따라 아르토의 손을 빌려 써내려간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죽음의 철학’으로 화함으로써 ‘생(生)의 철학’을 보완하는 동시에 그 이면에 숨어 있던 독자적이고 불가결한 문제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본서는 두께가 얇은 편이지만 좀처럼 빨리 읽히지는 않는다. 전작 『존재와 차이』와 마찬가지로 철학하기 자체의 외곬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까닭에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불친절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스피노자와 아르토의 간극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 물론 옮긴이의 탓이 가장 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에가와의 글은 의도와 용어를 한번 파악하고 나면 갑자기 의미가 분명해지는 매력이 있다. 비록 아직 서구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비교해 손색없는 그의 성과는 분명 서로 활발히 토론하고 지적 자극을 주고받는 일본 사상계의 풍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뿔뿔이 흩어져 수입과 저작(詛嚼)에 급급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다.


이규원 서울대·인문의학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과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에서 일본의학사에 관한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 교실과 교토대학 의학부에서 근세·근대일본의학사를, 소운서원에서 근대일본철학 및 현대프랑스철학을 연구하는 한편, 건국대학교에서 질병사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과학과 가설』(공역), 『존재와 차이: 들뢰즈의 선험적 경험론』, 『정의의 아이디어』, 『현대미술 들뢰즈·가타리와 마주치다』(공역), 『죽음의 철학』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