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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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 승인 2020.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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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연애편지 말미에 ‘당신의 히스클리프로부터’라고 쓸 정도로 우리세대는 문학 혹은 세계문학세대였다. 물론 7, 80년대는 책 말고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취미로 그쳤어야 했던 문학을 놓지 못해 전공으로 학위까지 받고 이제는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니 이따금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더 이상 문학이 삶의 일부가 아니고 수업 시간에 작품을 인용하기 어려운 대학 강의실 상황에서 ‘과연 나는 학생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지난해 말 불문학 관련 학회에서 ‘장르문학’을 주제로 상당히 유명세가 있는 소설가 한 사람과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학술대회에서 문학사와 강단에서 다루는 작품이 아닌 이른바 대중문학을 주제로 발표와 토론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발표자로 나선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이 장르문학으로 평가받는 것에 불편함을 드러내면서 이 시대에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것 자체에 무슨 의미를 둘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아가 웹 소설을 쓰는 사람은 많은 경우 생계가 가능할 정도로 수입이 있다고도 했다. 사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세계문학전집을 읽지 않은 세대여도, 전통적인 문학수업을 받지 않고서도 글을 ‘잘 쓴다’고 한다.

한편으로 보면 언제부터인가 문학의 존재방식이 바뀌었고 글을 소비하는 방식 또한 달라졌는데 자신만 그 변화를 모르고 있었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줄리앙 소렐이 누구인지 모르는 학생들에게, 이른바 배경지식 없이 수업하는 것이 오래된 현실에서 그들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전공자의 이기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젊은 세대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문학을 소비하고 자신의 글을 그들의 문법에 맞게 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웹 소설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학 전공자로서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은 적이 거의 없었다. 학생들과의 공감과 소통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문학을 소비하는 방식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임승훈 작가
▲ 임승훈 작가

지난해 가을 문학행사에서 젊은 작가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젊은 세대가 이 시대에도 소설을 쓰고 또 쓰는 일을 가지고 고민한다는 사실에 반가우면서도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임승훈의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문학동네)는 그날 만남에서 얻은 소설이다. 젊은 작가답게 글에 나타나 있는 삶의 방식은 자유롭고 생각과 행동에도 거침이 없었다. 8개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첫 구절이다. 「졸피뎀과 나」는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로, 「초여름」은 “내가 목을 매단 지 삼 일이 지났다”로 시작된다. 카프카의 『변신』의 첫 구절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를 연상시킨다. 소설의 시작이 강렬한 만큼 작가적 상상력에도 한계가 없다. 이승우 작가도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남천의 바닷가에 “키가 거의 이백 미터쯤 되어 보이는” 야자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는 식물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현실 밖의 세계를 말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반면에 임승훈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있다. 작가와 동명의 주인공은 목을 매달았다가 깨어보니 외계인들의 수술대에 누워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외계인에 의해 개조되어 죽으면 다른 행성에서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죽으려고 목까지 매달았고 죽어서도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어머니에게는 전화로 자신이 ‘이상 문학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상 문학상은 부활을 믿는 주인공에게보다는 어머니 세대에게 더 큰 의미가 있는 상일 것이다.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의 등장인물들은 “이번 생은 틀렸어”라고 말하면서 인생을 리셋하고 싶어 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텔레비전 앞의 아버지들은 무능해보이고, 젊은 시인은 이념은 없지만 ‘위로받기 위해’ 촛불시위에 나서기도 하며, ‘꼰대’라면 진보든 보수든 다 싫다.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는 학생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척했던 나는 벌써 ‘꼰대’ 대열에 합류했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세대와 과거의 문학을 통해 소통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였다는 생각도 든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인데 말이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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