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선 연구자…「연구자 권리선언」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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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선 연구자…「연구자 권리선언」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1.1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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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연구자 권리선언의 의의와 향후과제 토론회’ (사진 제공=연구자 권리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연구자의 안정적인 연구 환경 조성과 법적 기반 마련을 위한 ‘연구자 권리선언의 의의와 향후과제 토론회’가 16일(화)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5간담회의실에서 열렸다.

토론회는 ‘연구자 권리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주관하고, 심상정 의원(정의당), 강민정 의원(열린민주당), 유기홍 의원, 윤영덕, 강득구 의원(이상 더불어민주당)이 공동 주최했다.

이날 토론회는 배성인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사회를 맡았으며, 강내희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이 ‘연구자의 권리를 위한 자유의 횃불 ― 아마기와 커먼즈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기조 발제를 진행했다. 이어 박정원 교수노조 위원장, 박중렬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 김직수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원, 대학원생노조 이우창 외부정책자문위원, 민교협 박치현 회원,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김어진 조합원 등이 토론에 참여했다.

행사를 주관한 공대위는 “수많은 연구자가 양극화된 노동시장과 신분제적 위계 구조 속에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고, 대학과 학문의 위기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학술적 연구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고 연구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토론회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강내희 이사장은 발제문을 통해 “우리나라 연구개발(R&D) 지출 총액은 세계 5위 수준이고 지출 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2위 수준”이라며 “그러나 연구자의 연구환경, 일자리, 복지 등 실상은 열악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강 이사장은 “이번 연구자 권리선언 운동이 연구자의 권익을 지키고 연구환경 변화를 이끄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고 밝혔다. [강내희 이사장의 발제문 요약: 아래 참조]

 

▶ 이어 토론에 나선 교수노조 박정원 위원장은 “최근 5년간 신임교수 절반은 비정년트랙 교원(계약임용제 교원)이라는 통계도 있다”며 교원의 불안정한 신분상 구조를 지적하며 교수사회가 연대하여 건강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위원장은 연구자의 권리보장 방안으로 “△첫째, 고등교육이 완전 무상화되어야 한다. △둘째, 연구자들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호봉제정년트랙 전임교원 연봉제정년트랙 전임교원-비정년트랙 전임교원-비정규직 교원으로 되어 있는 교수계층화 질서가 해체되어야 한다. △넷째, 호봉제정년트랙 전임교원들이 앞장서서 교수/연구자의 서열화를 해체해야 한다. △다섯째, 연구자들이 단결해서 대응해야 한다.”를 제시했다.

비정규교수노조 박중렬 위원장은 “연구자의 권리를 확보하고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선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고등교육법상 같은 교원인 강사의 제대로 된 연구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현재의 연구 여건 하에서 연구자로서의 대학 강사의 권리를 확대하고, 연구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으로 “△등재(후보) 학술지 게재 논문의 연구비 전면 지급 △이공계 대학 강사의 실험실 사용 권리 보장 △예술계 대학 강사의 공연·전시·발표 활동 지원 △교육연구비와 학생지도비 지급”을 제시했다.

사회공공연구원 김직수 연구원은 ‘지식생산체제의 변화와 노동권으로서 연구자의 권리’에 대해 발표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물론 이른바 재야 연구기관에서도 지식생산 방식은 이미 개별화되어 있는 것으로 진단한 김 연구원은 연구자 사회 또는 연구자 공동체라는 것이 만일 존재한다면, 연구자의 권리는 우선 다른 연구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에 의해 성립된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대학과 연구자 사회는 의외로 전근대적이라며,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며 노동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연구노동자, 지식노동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연구자들의 노동이 착취되는 현실은 ‘인건비의 구조적 보장 부재’에 따른 문제 이전에 연구자들 자신의 노동자 의식 및 그에 따른 노동권 인식 부재에 의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 김 연구원은 연구자들의 이른바 ‘생산성’과 무관하게 모든 연구자들에게 보편적으로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한, 기본적인 생활 보장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 ‘대학원생 입장에서 연구자 권리선언 활용하기’에 대해 발표를 이어나간 대학원생 노조 이우창 외부정책자문위원은 「연구자 권리선언」의 힘은, 우리가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는, 이것을 어떤 종류의 장치와 연결하고 접속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날 것이라 강조했다. 이 위원은 권리선언 9조 “국가의 책무” 항목에 주목하여 “△첫째, 한국 학술연구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국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여러 국가기구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식적인 경로를 확충해야 한다. △셋째, 국가기구와 대화하는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이와 함께 이 위원은 급격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학문후속세대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첫째, 우리는 대학원생이 어떤 문제를 겪으며, 어떤 해법이 필요한지 조사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학술 관련 정책을 고민하고 결정하는 자리에 젊은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20~30대부터 학술행정 및 정책 관련 경험을 쌓는 연구자 풀을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교협 박치현 연구원은 ‘제대로 학문할 권리: 단지 연구자 생존용인가?’란 주제의 토론을 통해 연구자의 삶을 가시화하기 위해선 정확한 실태조사와 함께 국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등교육을 둘러싼 가장 시급한 문제로 기초학문·인문사회분야의 지나치게 적은 연구비, 인문사회 기초학문 박사 및 학문후속세대들의 불안정한 고용과 저임금 노동으로 인한 정상적인 사회적 삶과 연구 기능의 상실, 기초학문 탐구의 ‘수월성’ 몰락과 실용학문의 득세를 꼽은 박 연구원은 더 이상 대학이 연구와 교육의 터전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학 중심 패러다임을 넘어서 연구자의 고용과 학문 발전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국회와 정부가 그려야 할 밑그림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투 트랙으로 먼저, 비정규 교수/박사/대학원생들의 연구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처우개선을 통한 ‘연구안전망’의 구축 필요성을 내세웠다. 구체적 방안으로 그는 ‘새 강사법’의 제대로 된 시행, ‘국가박사제’ 실시, 강사에서 해고되거나 국가박사를 하지 못한 강사들에게는 (대학이 아닌) 지자체와 결합하여 인문학 대중화 사업과 유사하지만 구별되는 ‘평생고등교육사업’ 실시 등을 제시했다.

다음으로 학문의 수월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프랑스의 콜레주 드 프랑스 모델을 검토하여 수용하며, 사회과학은 국립 기초사회과학 연구원을 설치하고, 인문학은 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확대하거나 기초사회과학 연구원을 기초 인문사회과학 연구원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마지막으로, 비정규교수노조 김어진 조합원은 가장 열악한 처지인 여성 연구자로서 어려운 삶을 말하며 연구환경 개선을 강조했다. 그는 연구생태계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다며, 불안정하고 취약한 환경에 놓인 연구자들에게 그저 노력하고 연구실적을 더 쌓으라는 주문만 되풀이하는 것은 학문후속세대가 연구를 그만두고 연구자의 길을 포기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연구공간과 장비·비품 등 연구 강의를 위한 각종 여건 문제를 비롯해 비정규직 연구자가 직면하는 연구환경에서의 불평등과 제약을 꼬집은 김 조합원은 (특히 여성) 비정규직 연구자에게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지속가능한 연구환경이 보장될 수 있도록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대학으로의 전면적 개편이 절실하다며,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정책적, 제도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OECD 국가 중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은 만큼 우리나라에서 대학의 역할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대학 연구자의 고용구조 양극화 문제, 대학 강사 강의료 미지급 등 연구자 권리 보호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이번 토론회를 바탕으로 모든 연구자가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법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래 강내희 이사장의 발제를 요약했다.

 연구자 권리선언문 및 해제문 보기 

 

■ 강내희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연구자의 권리를 위한 자유의 횃불 ― 아마기와 커먼즈의 회복”

           강내희 이사장

► R&D 규모 세계 5위, GDP 대비 세계 2위

명목 GDP 기준 세계 10위의 경제 규모를 지닌 한국은 2019년 기준 연구개발비는 지출 총액으로 5위, 집약도 즉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지출 비율은 세계 2위로 연구와 개발에 엄청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연구자의 실상은?

하지만 연구자들의 처지는 열악하다. 석·박사 학위 취득자는 급증하여 올해 역대 최초로 1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나 연구자를 위한 일자리 부족으로 그들을 수용하고 지원할 기반이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구조가 고착되어 연구자의 신분도 불안정하다. 대학원생들의 처지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연구자들의 다수는 ‘프리케리아트’(precariat)가 되었다. 대학과 연구소에서 연구 노동에 대한 수요는 큰 폭으로 늘어났지만 안정적인 연구직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크게 줄어들어 비정규직 교수와 연구원들이 증폭한 결과다. 한국의 연구자 대다수는 이런 불안정 노동과 불확실한 미래의 희생자가 되었다.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도 많은 부분이 오늘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연구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분야보다는 기업 쪽으로 많이 흘러간다. 결국 연구자가 겪는 삶의 어려움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는 한국의 연구개발비 규모와 대비된다.

► 연구자 권리선언

연구자 일자리의 부족, 연구 환경의 악화, 연구자의 신분 불안정, 노동의 불안정과 사회적 보험으로부터의 배제, 그에 따른 삶의 불확실성 증가 등이 현실이 됨에 따라 연구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집단적 노력 중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은 노동조합의 결성과 최근 연구자들이 제창하고 나선 ‘권리선언’이다.

연구자 권리선언은 연구자들의 인권선언으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담겨있다. 정규직 교수이든 비정규직 교수이든, 정규직 연구원이든 비정규직 연구원이든, 교수든 대학원생이든, 나아가서 대학과 연구소라는 제도권에 속하든 독립 연구자처럼 제도권 외부에 있든 상관없이 지식을 생산하는 이는 모두 연구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는 인식, 연구자들 상호 간에도 동등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 연구자들도 다른 사회구성원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기본권을 누려야 한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최근에 연구비 풍년 속에서도 연구자들의 삶의 조건이 열악해진 것은 노동생산성의 발전과 함께 노동자들을 상대적 과잉인구로 내모는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 지식생산 부문에서 반영되어 나타난 현상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한국의 연구자들이 권리선언의 형태로 자신들의 인권선언을 제창하고 나선 것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당연하고 정당한 반응이요 대응이라 할 수 있다.

► 공통 결핍의 시대와 신자유주의적 금융화

신자유주의는 ‘공통 결핍’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일반 대중이 자신들의 삶에 필요한 자연적·사회적 자원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결핍증상을 겪고 있다. ‘포기 세대’의 등장, 자조적 태도의 만연, 혐오 현상의 팽배, 불평등 타파보다는 개인적 성공에 집착하는 ‘공정 지상주의’의 확산 등이 그 대표적인 증상이다.

‘공통 결핍’ 상황은 신자유주의적 지배의 강화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배의 결과 나타난 현상 하나가 과두 독점이다. 과두 세력의 지배는 최근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함께 금융화가 진행되면서 새롭게 형성되었다. 금융화는 이자 낳는 자본의 운동이 강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자산시장의 비대화는 그에 상응하는 부채 증대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즉, 부의 축적은 부채의 축적과 병행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권리선언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연구 환경이 악화한 것도 한국 경제의 성장이 부채의 성장과 더불어 일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연구자들의 상황이 악화한 것도 이런 부채 증가와 함께한 현상이다. 연구개발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늘어났는데도 연구자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진 것은 국부의 증가는 인민의 궁핍화라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공식이 작용한 결과이지만, 신자유주의적 금융화 국면에서 그 궁핍은 무엇보다 부채에 허덕이는 삶으로 구체화한다.

► 청동기 문명의 빚 탕감—아마기 전통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공통 결핍’의 극복은 공통 자원의 더 많은 확보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의 공통 자원이 더 많아질 때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삶의 기반이 더욱 넓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연구자 권리선언은 한국 연구자들이 자신의 ‘아마기’ 찾기에 나서는 운동으로도 전개될 필요가 있다. 연구자를 위한 ‘아마기’의 회복은 지식인으로서 연구자를 위한 커먼즈의 구축에 속한다. 이런 운동은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부채를 탕감하는 노력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약 2400〜1600년 시기의 근동 지역에서는 제왕들이 관례상으로 빚진 사람들을 구제하는 빚 탕감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청동기 제왕들은 경제적 ‘질서와 정의’를 선포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부채 속박, 토지 몰수 등을 주기적으로 취소하고 그들의 빚을 없애주는 관례를 통해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한 통치 방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 ‘경제적 정의’ 또는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얻은 자유를 가리키는 말이 ‘amagi/amargi’와 ‘nig.šiša’(수메르어), ‘misharum’(바빌로니아어), ‘andurarum’ (아시리아어), ‘shudutu’(후르리어) 등이었다.

빚 탕감은 시간이 갈수록 과두 세력의 등장 속에 타기의 대상이 된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라는 관념은 로마에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빚 탕감에 나선 쪽은 왕권을 탐하는 것으로, 그런 쪽을 제재하고 제거한 쪽은 공화국 또는 민주주의를 수호한 것으로 포장되곤 했지만, 사실 그것은 과두제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것이 허드슨의 지적이다. 로마 이후의 세계사는 과두제의 승리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 기억은 사라지고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자유란 무엇보다도 빚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점은 철저하게 잊혀버렸다. 이것은 그리스-로마 문명이 서양의 전통으로 확립되고 근대화 과정에서 세계의 서구화 또는 서양 전통의 세계화가 이루어진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세계가 자본주의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근대사회에서는 자유의 지배적 의미는 빚 탕감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된다. 자유는 이제 근대 국가로서 성립한 미국에서 통용되는 자유, 부르주아적인 자유로 철저한 개념 전환을 겪었다.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횃불은 아마기의 도래를 알리는 횃불에 기원을 두고 있다. 청동기의 제왕들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전면적인 빚 탕감을 할 때면 횃불을 올려 그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그것이 올라가는 날은 빚으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 아마기와 커먼즈

오늘날이야말로 ‘아마기’의 회복이 너무나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아마기의 회복을 위해 횃불을 들자는 주장을 해도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다고 여겨진다. 아마기의 횃불, 자유의 횃불을 들자는 주장은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어떤 질서를 창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조상이 불평등한 권력관계 아래서도—왜냐하면 고대 제국들은 제왕과 사제의 지배가 관철된 불평등 계급사회였으므로—구현되고 있던 관행을 새로운 형태로 복원하자는 것이다.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들자고 할 때, 추구해야 할 자유는 경제적 자유이되 부르주아적인 경제적 자유는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그 자유는 남에게 가난을 덮어씌우는 부당한 권력 행사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부당하게 짊어진 ‘가난과 부채로부터의 자유’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자의 권리도 이 후자의 자유에 대한 권리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연구자들 다수는 ‘공통 결핍’의 상황에서 온갖 연구 자원의 결여와 빈곤, 부채 속에서 프리케리아트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을 위한 아마기의 횃불이 타올라 각종 결핍으로부터 연구자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변혁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빚질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고 그들이 유죄라고 보는 경향이 지금 사회적 구조로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을 공통 결핍에 빠뜨리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책임을 개인적 책임으로 전가하고, 사람들이 겪는 고난과 가난과 결여를 모두 ‘내 죄’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패하거나 가난해진 것, 대중이 공통 결핍의 상태에 놓인 것이 그들의 잘못이거나 책임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 부가 자본 축적의 형태로 생산됨에 따라, 대중은 그 부를 과두 세력에게 착취당하고 수탈당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유적 존재로서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의 공통 기반을 소수에게 빼앗긴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우리 것을 되찾을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우리가 자연의 환경과 산물, 사회적 생산물을 공통의 삶을 위한 기반으로 누릴 권리에 속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커먼즈에 대한 권리가 있다. 연구자 권리선언은 우리가 연구자로서 누려야 할 커먼즈에 대한 정당한 권리의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커먼즈는 아마기와 상통하는 개념이다. 아마기는 ‘어머니에게 돌아감’ 또는 백지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어떤 자연 상태를 가리킨다. 커먼즈 역시 그 원형적 모습이 숲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사유재산의 지배가 작동하기 이전에 공통으로 자기 것이라 여긴 자연에 속한다. 연구자의 권리선언은 이 자연상태, 백지상태, 아마기, 커먼즈 등에 대한 권리선언인 셈이다. 연구자들이 권리선언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도 커먼즈가 계속 빈약해지고, 부채가 사상 최대 수준으로 늘어나 아마기의 ‘백지상태’가 사실상 소멸함에 따라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 데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 할 수 있다.

► 기본소득+

아마기의 자유는 일상의 자유가 되어야 한다. 아마기 상태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데, 그렇게 하는 유력한 방안의 하나를 연구자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기본소득의 제도화에서 찾고 싶다.

기본소득은 자산조사와 노동 강제 없이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액수의 소득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제도화하면 연구자들도 그에 따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서 갖는 지분, 사회적 배당금(social dividend)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본소득으로 연구자들이 기본적인 삶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수령 액수가 충분해야 하겠지만, 얼마만큼의 보장을 받을 수 있는가는 집단적 노력과 투쟁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자유, 즉 국부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대중이 내몰리게 되는 궁핍함과 빚짐으로부터의 자유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자유의 횃불을 들자는 것은 그런 점에서 금융화 등을 통해 연구자와 노동하는 다른 대중을 공통 궁핍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적 지배를 혁파하자는 것이면서,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을 해체하여 새로운 사회적 체계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전환하는 일은 물론 당장 일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연구자의 권리선언 운동이 연구자들의 권익을 지키는 데 이바지하면서 오늘날 적합한 커먼즈와 아마기를 회복하는 데 공헌한다면, 그런 변화를 앞당기는 데에도 큰 보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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