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전통을 횡단하는 신유물론…물질적 전회로 신선한 사유를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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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전통을 횡단하는 신유물론…물질적 전회로 신선한 사유를 창조하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1.15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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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유물론: 인터뷰와 지도제작 | 릭 돌피언·이리스 반 데어 튠 지음 |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328쪽

 

이 책은 우리 시대의 탁월한 철학자들의 공동 저작이다. 편저자와 인터뷰에 응한 철학자들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철학의 첨단에 있는 인물들로 평가된다. 책은 모두 2부로 나뉘어진다. 1부는 신유물론의 최초 세대인 로지 브라이도티, 마누엘 데란다, 카렌 바라드, 사변적 유물론자인 퀑탱 메이야수와의 인터뷰를 담고 있으며, 2부는 편저자인 릭 돌피언, 이리스 반 데어 튠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논문들은 신유물론의 횡단적 방법론, 성차에 대한 입장을 추출해냄으로써, 그리고 신유물론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결과들을 전개함으로써 현대사상 안에 신유물론의 전통을 정립한다.

1부 ‘인터뷰들’에서 편저자가 만난 철학자 네 명의 사상적 결은 다소 상이하다. 브라이도티는 들뢰즈의 ‘생성의 철학’을 페미니즘적으로 재전유하면서 생태-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틀어놓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바라드와 메이야수, 데란다의 경우 존재론의 방향이 주관심사이다. 물론 바라드는 어떤 철학적 지향이 인식론이나 존재론이라는 분과적 잣대로 분할불가능하다면서, ‘존재-인식론’을 전개하는데, 이는 바라드의 ‘간-행’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편저자는 바라드의 이 개념을 책의 기조로 삼은 듯하다. 메이야수는 명시적으로 들뢰즈의 철학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들뢰즈의 철학은 그가 설정한 ‘상관주의’라는 비판의 그물에 걸린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데란다에게 들뢰즈는 잠재성의 철학자로서 신유물론의 진정한 구루이다. 그에 따르면 신유물론은 물질을 개체화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의 잠재적 역량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이 네 사람에게 ‘물질’ 또는 ‘유물론’이란 소박하고 고대적인 판본으로서의 ‘질료’도 아니고 ‘원자’도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생동하고, 때로는 힘의 흐름으로 우리 곁에 존속하는 진정한 객체로서 인간의 인식과 지성의 지배력을 빠져 달아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본체다.

2부 ‘지도제작’에서 편저자들의 글은 앞선 네 사람과의 인터뷰와 더불어 어떤 입장을 수립하기 위한 분투를 완연하게 담고 있다. 이는 각 장의 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필자들은 2부의 ‘서론: 사유의 새로운 전통’에서 신유물론이 어째서 새로운 사유의 조건들을 창출하는지에 대해 논한다. 이들은 신유물론을 통해 주로 반대자들이 헛되게 조작해내는 조잡한 유물론적 견해를 밀쳐두고 새로운 유물론으로서의 ‘자연문화존재론’을 옹호한다. 즉 인간중심주의에 침윤된 언어학주의와 더불어 인간과 자연을 가르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5장~8장은 이러한 기조에 입각하여 논의가 전개된다. 

이 책은 독자에게 제시되는 역사가 아니라, 신유물론이라고 지칭되는 이 유물론이 어떻게 바로 이 순간 과학과 인문학 안에서 작동하는지에 대한 ‘지도 그리기’(mapping)라고 할 수 있다. 1부의 인터뷰들은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기보다 간-행(intra-action)이다. 간-행이란 원자론적 형이상학을 질적으로 전환하며 중요한 점은 물질들 사이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터뷰어나 인터뷰이 또는 심지어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충분한 인터뷰 당사자의 작품도 아니라, 그 인터뷰가 우리를 고무시킴에 마땅한 어떤 행위 자체를 야기했다는 지향적 의미이다. 신유물론은 그러한 행위들 안에서 스스로를 표명하기 때문이다. 편저자는 1부에서 드러난 개개의 질문들과 대답들 그리고 2부의 각 장들 사이에 강한 연결지점들을 만들어 이것을 강조했다. 

신유물론은 이원론을 질적으로 전환하는 횡단적 문화이론이다. 신유물론적 맥락에서 횡단성은 비범주적이고 비결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횡단성은 모든 이분법적 구별들을 가로지름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또다른 이분법적 응결조차 피해가고자 한다. 그렇다면 횡단성은 언제나 횡단선 자체를 가로질러가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더 빨리, 먼저, 도래해야 한다. 횡단성은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것을 죽이거나 소멸시킨다기보다, 그것의 역능을 자기화하면서 새로운 것을 생성시킨다. 그러므로 신유물론과 관련하여 이 개념은 그 실천적 역량을 확장하기 위한 조건을 교육하고 정치적으로 고무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신유물론은 ‘횡단-유물론’이다. 첫째로 신유물론은 학제들 간의 횡단이다. 그것은 페미니즘과 과학, 기술, 미디어, 문화연구들을 가로지른다. 둘째, 신유물론은 아카데믹한 주류 인식론을 존재론과 횡단시킴으로써 새로운 소수전통을 복원한다. 주류 학계의 권위를 탈영토화함으써 신유물론은 초월론과 이원론 둘 모두를 탈구시킨다. 셋째, 신유물론은 과타리의 횡단성이 함축하고 있는 미시정치적 방법론을 수용한다. 이것은 ‘비판’이라는 방법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계보학적인 지식에 근거하는 실천철학이다.

신유물론은 페미니즘, 철학적 존재론, 기술과학철학 등의 분야에서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면서 20세기 말에 등장했다. 이를 보통 ‘물질적 전회’라고 부른다. 신유물론은 ‘물질’을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무비판적으로 통용된 수동성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물질은 자기조직화와 형태발생적 힘을 가진 능동적 ‘주체’이다. 유기적이든 무기적이든, 세포든 입자든 간에 흐름으로서의 강도적 생성의 과정이 물질의 핵심에 자리잡게 된다.

형태발생적이며 개체적인 과정은 자연과 인위의 이분법을 구분불가능하게 한다. 물질은 이 구분불가능성의 영역에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놓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선취하는 것이다. 이때 포스트휴먼의 ‘포스트’는 인간 ‘이후’의 어떤 단일한 형상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포스트휴먼은 혼종성으로 발산하는 물질성 그 자체다. 그러므로 ‘물질적 전회’란 다른 말로 ‘존재론적 전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회를 의미하는 형이상학은 포스트-메타피직스, 들뢰즈의 용어로 ‘순수 형이상학’이다.

요컨대 ‘물질적 전회’란 ‘포스트-메타피직스’로의 전회이며, 이것이 신유물론이다. 신유물론은 그것이 생성하는 학문적 담론 안에서 항구적이지만 이론 자체의 보편성이나 개념들의 영원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당대의 과학과 교전하면서, 그로부터 나오는 개념을 통해 새로워지며 발전해나간다. 피직스(자연학)는 언제나 제일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 또는 ‘순수 형이상학’과 함께 가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둘은 늘 횡단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자연, 즉 물질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형이상학이 창발해가는 그 과정이 신유물론의 개념작업을 조형한다. 마찬가지로 신유물론의 개념들은 자연에 대한 총체적이고 유일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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