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지젤 알리미…“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상태바
페미니즘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지젤 알리미…“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1.15 05: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여성의 대의 | 지젤 알리미 지음 | 이재형 옮김 | 안타레스 | 336쪽

 

프랑스의 인권 변호사이자 페미니즘 운동가로, 억압받고 소외당한 여성의 권리를 위해 평생 헌신한 지젤 알리미의 대표작이다. 낙태는 무거운 죄인데도 성폭행은 죄가 아니던 시절에 온몸으로 맞서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률’과 ‘성폭행 및 사회 도덕을 저해하는 행위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페미니즘의 본질을 꿰뚫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치우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이고 투쟁이며 혁명이다. 대중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켜 지지를 끌어내고 법과 제도를 만듦으로써 완성해나가는 실천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큰 오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지젤 알리미의 진단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방법론적 문제가 초점을 흐리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모두가 사람인 세상’이다. 이것이 지젤 알리미가 일평생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라고 강조한 까닭이다. 

그녀는 반식민지주의 인권 변호사이자 페미니즘 운동의 주역이었다. 프랑스의 법이 낙태를 금지하고 성폭행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지젤 알리미는 법정에서, 특히 1972년 ‘보비니 재판(낙태 합법화)’과 1978년 ‘액상프로방스 재판(성폭행 범죄화)’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

1971년 4월 5일, ‘낙태죄’라는 억압에 맞서 수많은 여성이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요구하고자 대규모 행동을 개시했다. 자신들도 낙태한 경험이 있다고 시인하며 피임과 낙태의 적법한 권리를 요구한 당대 여성 저명인사 343인의 공동 선언문이 〈르누벨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 실렸고, 지젤 알리미도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343 선언(Manifeste des 343)’이다. 그해 지젤 알리미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여성의 대의를 선택하다(Choisir la cause des femmes)〉 협회를 설립해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수많은 여성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면서 페미니즘 투쟁을 본격화했다. 협회의 슬로건은 “임신은 나의 선택이다!”, “피임은 나의 자유다!”, “낙태는 나의 최후 수단이다!”였다. 그녀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낙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십자군이 아니다. 어머니가 되는 일이 여성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가 되도록 싸우는 것이다.”

 

지젤 알리미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보비니(Bobigny) 재판’이다. 보비니 재판은 이후 보건부 장관 시몬 베유(Simone Veil)가 발의해 1975년 1월 17일 가결되고 공포된 ‘베유법’, 즉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률’로 향하는 거대한 전환점이 됐다.

1980년 12월 23일 발효된 ‘성폭행 및 사회 도덕을 저해하는 행위에 관한 법률’ 또한 지젤 알리미의 공로였다. 1974년 8월 21일,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Marseille) 인근의 바위로 둘러싸인 작은 만에서 스물네 살 안느 통글레(Anne Tonglet)와 열아홉 살 아라셀리 카스텔라노(Araceli Castellano) 두 명의 여성이 캠핑하다가 남성 세 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재판은 무려 3년 동안 이어졌다. 1978년 5월 3일 최종 공판에서 주동자 한 명에게는 징역 6년, 나머지 두 명에게는 징역 4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성폭행이 범죄로 판결되는 판례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지젤 알리미는 이 책에서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자유는 억압하고 법은 해방시킨다”는 앙리 라코르데르(Henri Lacordaire)의 말을 인용하며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법, 제도, 규칙이기에 “특권을 없애고, 지배관계를 무력화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법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81년 시행된 총선에 사회당 소속으로 출마해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1984년까지 국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모두 7개의 법안을 발의했으며 선거 여성 할당제를 법제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여성의 몸을 판매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갈하면서 매춘 및 대리모 합법화를 격렬히 반대했다. 1985년에서 1986년에는 유네스코(UNESCO) 프랑스 대사로, 1989년에는 유엔(UN) 프랑스 대표단 특별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정치 평등을 실현코자 애썼다. 

지젤 알리미는 평생을 여성의 대의를 외치고 페미니즘을 옹호하다가 갖은 모욕과 살해 위협까지 받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이 조의를 표하고 찬사를 보냈다. 모든 프랑스 언론은 그녀의 사회 참여와 열린 정신, 페미니즘 운동에서 이룬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