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죄인이 옥중에서 음독자살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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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인이 옥중에서 음독자살한 사연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 승인 2021.11.15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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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㉔_ 대역죄인이 옥중에서 음독자살한 사연

 

자살과 ‘공소권 없음’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에서 2014년에 펴낸 『검찰 수사 중 피조사자의 자살 발생원인 및 대책 연구』에 따르면 검찰 조사 과정에서 피의자가 자살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2004년부터 2014년 7월까지 검찰 수사를 받던 도중 자살한 사람은 무려 83명으로 집계되었다. 수사의 당사자가 이렇게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 해당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은 난망한 일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처분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럼 검찰에서 조사받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를 일률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해당 연구에 따르면 피조사자에 대한 고려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검찰의 강압적 수사방식, 인권침해적인 무분별한 언론의 범죄보도를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지목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개선하고 적절한 자살방지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사법기관에 의해 신문받던 피의자가 갑자기 자살했다는 기록이 종종 확인된다. 특히 대역죄로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에 옥중에서 음독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이 죽음을 택한 사연을 알아보자.

 

조선후기 의금부 관아 건물. 앉아 있는 관리들 오른쪽의 지붕이 튀어나온 부분은 죄인을 신문하는 호두각(虎頭閣)이며, 맨 아래쪽 행랑에는 중죄인을 수감하던 남간옥(南間獄)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뇌물을 받고 대역죄인을 독살한 경우는 참형에 처한다”

조선 경종, 영조대인 18세기엔 정치세력간의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역모 사건으로 한양에서 추국청이 개설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다. 주요 사건 수사, 재판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등 관련 사료를 보면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갇혀 추국(推鞫)을 받던 피의자가 옥중에서 음독하여 생을 마감하곤 했는데, 이들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역죄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죄 없는 피붙이들이 연좌되어 처벌받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백할 때까지 계속되는 고문의 고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한 법규를 살펴보자. 영조 때 만들어진 법전 『속대전(續大典)』에 실린 법규 중에는 ‘대역죄의 증거가 명백한 자를 의금부 아전들이 뇌물을 받고 독살한 경우에는 지정률(知情律)로 처벌한다’는 규정이 있다. 여기서 지정률(知情律)은 대역죄를 알고도 숨겨준 자를 처벌하는 것을 말하는데, 형량은 참형이었다. 요컨대 이 규정은 의금부 아전들이 뇌물을 받고 대역죄인 혐의가 있는 자의 독살을 돕는 일들이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 향후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하겠다는 내용이다.

조사를 받던 피의자들이 왜 의금부 아전을 매수하여 음독자살을 했을까? 당시 대역죄 피의자들은 신문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으며, 자백을 하여 끝내 죄를 시인할 경우에는 대역죄인으로 확정되어 가족들까지 화를 면치 못했다. 당시 규정에 모반, 대역 죄인은 주범, 종범 모두 법정최고형인 능지처참에 처해졌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중형을 면치 못했다. 즉 16세 이상의 아버지, 아들은 모조리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15세 이하의 아들, 어머니와 딸, 처와 첩, 형제, 자매, 할아버지와 손자들은 노비로 삼고 집안 재산도 몰수하도록 하였다. 옥중 죄인들은 이와 같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막기 위해 의금부 아전들을 매수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음독자살은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그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조성집, 옥중 동생에게 독을 권하다

그렇다면 옥중에서 비극적 삶을 마감한 실제 주인공들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먼저 경종 임금 때 조성복(趙聖復)의 사례이다. 

숙종 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에 오른 조성복은 경종이 병 때문에 후사가 없자, 1721년(경종 1) 사헌부 집의(執義) 벼슬로 경종에게 왕세제(王世弟), 즉 경종의 배다른 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요구는 연잉군을 후원하던 노론의 지지를 받아 관철되었으나, 당시 국정을 장악한 소론 측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국왕 경종을 무시한 대역죄로 몰려 의금부에서 상소문 제출의 배후를 캐는 국문을 받고 제주도 정의현으로 안치되었다가 1723년(경종 3)에는 다시 한양으로 잡혀 올라와 가혹한 신문을 당했다.

 

                 연잉군 초상화.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14년의 모습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때 조성복은 형 조성집(趙聖集)에게 편지를 보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의사를 밝힌다. 조성집은 동생이 제주도 정의현에 안치될 적에도 고문을 받아 다리 상처가 극심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면서 구호해준 가족이었다. 동생이 대역죄를 벗을 가망이 없자 조성집은 결국 의금부에 비밀리에 독약을 보내 아우의 자진을 도왔다. 나중에 아우를 독살하려 한 죄로 체포되어 조사받던 그는 “내가 차마 아우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내 아우로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려고 했다”고 아우의 독살을 도운 이유를 밝혔다. 조성복의 음독은 대역죄인이 되어 팔다리가 절단되고, 가족들 또한 풍비박산하는 비극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조성복의 음독 이후 채 십 년도 지나지 않은 영조 즉위 초에 발생한 궁중 저주사건의 관련자들 상당수도 의금부의 차가운 옥중에서 음독자살을 선택하였다. 사건은 이렇다. 

1730년(영조 6) 3월, 궁녀와 무당 등이 궁궐 안에서 죽은 사람의 뼛가루와 흉물을 묻고, 심지어 세자와 옹주에게 이를 몰래 먹여 저주 행위를 하다가 들킨 사건이 발생하였다. 영조의 외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가 갑자기 죽은 2년 뒤의 일이었다. 국청이 열려 조사가 진행되면서 사건은 영조에 적대적인 소론 강경파 인물들이 연루된 역모 사건으로 비화하였다. 무신난에서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정사효(鄭思孝)의 아들, 동생 등이 연루된 것으로 확인되고, 궁궐 안의 사람과 내통하는 역할을 맡은 전 군관(軍官) 박도창(朴道昌) 등 관련자들이 줄줄이 체포, 구금되었다.

 

 『효장세자 예장도감 의궤』. 1728년(영조 4) 효장세자의 장례에 관한 기록을 담은 규장각 소장 의궤. 세자가 죽고 2년 뒤 세자의 사망 원인이 궁중 저주와 독물 섭취로 인한 것으로 결론나면서 이에 가담한 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신문,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 국문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인물들이 옥중에서 음독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중 한 사람이 박도창이었는데, 그가 죽기 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두 가지 요구가 담겨있다. 하나는 더 이상 매질을 견디기 어려우니 매질을 담당한 아전 집장방(執杖房)에게 떡값을 써서 매질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할 것, 다른 하나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나장(羅將)에게 뇌물을 주어 독약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매질을 견디기 힘들었던 박도창으로서도, 그가 죄를 시인할 경우 연좌처벌을 당할 것을 염려한 가족들로서도 어찌 보면 박도창의 음독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조선시대 의금부 옥중에서 죄인들이 음독자살한 행위는 현재 검찰 조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의자 자살 문제와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비극의 당사자,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남긴 선택이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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