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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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배움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1.11.14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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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_ 논설고문 칼럼

우리는 어디서 배우는가? 자연에서 배운다. 책에서 배운다. 사람에게서 배운다. 세 가지 배움을 견주어 살펴보자. 배움이 창조와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도 알아보자.

자연은 무엇을 요구하지 않고 보여주기만 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배우면 된다.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초목이 자라고 꽃이 피고, 단풍이 들었다가 잎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밤이면 하늘에서 별이 빛나고 하는 데서, 시간과 공간을 직접 체험하고, 천지만물의 이치를 눈으로 본다. 배우는 장소가 적절하고 시간이 넉넉하면, 얻는 것이 아주 많다. 오염이나 혼잡이 없는 시골의 청정한 자연에서 살아가는 특권을 누리면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잘 배운다. 시인이나 학자로 자라날 수 있다.

책은 알려주려고 하는 것만 알려준다. 책은 자연처럼 열려 있지 않다. 도서관의 책을 이용할 수 있으나 항상 가까이 두려면 사야 한다. 원하는 책이 없을 수도 있다. 자연에는 나쁜 자연은 없지만, 책에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있다. 나쁜 책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데,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다. 저질 오락물이 아닌 학습용 도서도 다 좋은 책인 것은 아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쳐주기만 하고 묻고 따지는 길을 막는 책은 나쁜 책이다. 학습용이라고 자처하는 나쁜 책을 읽고 공부하느라고 소중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인생 낭비이다. 시인이나 학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차질이 생긴다.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아주 달라진다. 모든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훈계한다. 훈계만 일삼고 자식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부모는 나쁜 친구만큼 나쁘다. 나쁜 부모는 자식에게 학교에 가서 남들과 같게 배우기나 하지 말고, 학원에 가서 남들과 다르게 배우라고 등을 떠밀어 보낸다. 학원 강사는 인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생업을 위해, 협동은 배제하고 경쟁에 필요한 지식만 주입시킨다. 이것은 창조주권을 마비시키는 독약이어서, 오래 먹으면 재기 불능의 상태에 이른다. 학교 교사는 학원 강사보다 월등하게 좋아야 하는데, 장애 요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선다형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얻게 하려면 기계적인 훈련을 하는 악역을 맡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치는 사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시인이나 학자가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다.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은 책에서 배우는 것만 못하다. 책에게 배우는 것은 자연에게서 배우는 것만 못하다. 사람에게서 배우면 작은 것을 이룬다. 책에서 배우면 중간 정도의 것을 이룬다. 자연에서 배우면 큰 것을 이룬다.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하려고 하거나 학문의 역사를 바꾸어놓는 대학자가 되려면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 자연에서 배운 경력이나 성과가 어느 정도 되는가에 따라서 크게 되는 정도가 달라진다.

이렇게 말하면 반론이 제기된다. 자연에서 배우기만 하고 책을 보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가? 책을 매도하고 선생을 나무라면서 원시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가? 아니다. 자연에서 배우면 배움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 배워 얻은 바가 있으면 좋은 책을 골라 좋게 읽어 배움을 키울 수 있다. 교사와 반면교사를 구분할 능력이 있어. 배우기도 하고 배움을 넘어서기도 하는 이중의 소득을 얻는다. 동지와 적을 구분하면서, 세상이 좋아질 수 있게 하는 힘을 합치고, 불의를 공격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자연이 가르치는 일을 다 맡을 수는 없어 좋은 책도 있고, 좋은 선생도 있어야 한다. 좋은 책은 좋은 출판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서 배워 얻은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기존 지식의 허위를 파헤치고 시정 방안을 제시하는 좋은 책을 짓는다. 좋은 선생은 학벌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연에서 배운 것을 창조의 원천으로 삼아 교육의 역사를 바꾸고 새로운 학문을 내놓아야 좋은 선생이다.

가격이 나날이 오르는 초호화주택에 살면서 돈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 자식에게 가장 고가로 아주 특수한 사교육을 시키는 쪽을 부러워해야 하는가? 경쟁을 물리치려고 별난 짓을 하다가, 안목을 더욱 협소하게 하면서 자폐증을 키운다. 창조주권을 마비시키는 독약을 자기 대보다 자식에게 더 많이 먹여 자살하는 길에 들어선다. 이것은 안타깝다고 하겠으나, 지나치면 망하는 불변의 이치를 실현하고 있어 도와줄 길이 없다.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어렵게 살아가느라고 학교에 겨우 보내는 자식이 집에 돌아오면 일을 거들게 하는 쪽은 가련하다고만 할 것인가? 세상이 잘 되게 하고, 학문을 혁신하고,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인재가 거기서 자란다. 창조주권을 어느 누구보다도 온전하고 풍부하게 지니고, 아주 큰일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한다. 광활한 자연에서 직접 체험하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실현해 세상을 바꾸어놓으려고 구상한다.

이치가 명백해졌다고 하면서 여기서 말을 끝낼 수는 없다. 가능성이 현실은 아니며, 현실이 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가 여럿 있다. 세상이 잘 되게 하고, 학문을 혁신하고,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인재가 가능성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말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이 과제를 스스로 해결해, 사고의 비약을 이룩해야 한다. 

자연에서 배움이 완성되지는 않고, 책에서 배우고 사람에게서 배우는 다음 과정에서 배움이 획기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표면에 나타난 허위이다. 가르치는 사람을 반면교사로 삼으려고 책의 도움을 받고, 책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자연과 다시 만나야 배움이 창조로 비약한다. 이것이 이면에 숨은 진실이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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