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요람 퍼타일 크레슨트
상태바
문명의 요람 퍼타일 크레슨트
  • 남영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지리학
  • 승인 2021.11.08 07: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저자에게 듣는다_ 『문명의 요람 퍼타일 크레슨트: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 문명의 이해』 (남영우 지음, 푸른길, 440쪽, 2021.09)

 

지리적 관점에서 본 문명의 발달

이 책은 지리적 관점에서 본 문명론을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 문명이 탄생한 퍼타일 크레슨트 중심으로 다룬 책이다. 흔히 문명의 기원이 그리스·로마에 뿌리를 둔 유럽 문명이라고 생각하지만 퍼타일 크레슨트에서 발생한 최초의 잉여식량을 들어 그것이 오류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퍼타일 크레슨트에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하천형 농업문명과 이집트의 하천형 석조문명만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한 고원형 융합문명과 레반트 페니키아를 중심으로 한 해양형 교역문명도 있었다. 이들 문명이 가진 각각의 특징도 있지만, 문명 간 교류로 이루어진 융합적 특징이 다분하다는 점은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한다.

문명이 발생하는 요인은 다양해서 이를 설명하는 방식 역시 학자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이 책은 문명이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 문명이 땅의 생김새, 즉 ‘지절’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저자의 오랜 지론을 소개해 놓았다. 독자들은 문명이 땅의 생김새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절(肢節)이란 개념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땅의 생김새에 좌우되는 문명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있듯이 땅 역시 잘 생긴 땅과 못생긴 땅으로 구별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아무 땅에서나 살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살기에 적합한 땅을 골랐다. 어떤 땅에는 신석기시대가 빨리 찾아 왔고, 또 어떤 땅에는 뒤늦게 찾아왔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신석기시대의 사회는 모든 땅에 동일한 시기와 동일한 수준의 기술과 지혜가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왜 이러한 지역적 차이가 발생했을까?

여기서 필자는 몇 해 전 《땅의 문명》이란 저서에서 문명 창출의 메커니즘으로 땅의 생김새를 꼽은 바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지구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의 일이다. 기나긴 선사시대에 비하면 문명이 발생한 기원전 3,500년~기원전 500년에 걸친 약 3,000년이란 세월은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700만년에 비하면 일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땅에서는 문명이 생겨났고, 또 어떤 땅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땅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필자가 주장하는 문명 창출의 메커니즘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땅의 생김새를 거론하면서 잘 생긴 땅이라 함은 문명이 발생할 수 있는 땅이라는 담론을 제시했다. 땅의 생김새는 지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평면적으로 볼 때 해안선의 만입 상태가 풍부해 드나듦이 복잡한 지형과 단면적으로 볼 때 평지와 산악의 굴곡이 다양한 지형의 정도로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을 땅의 ‘지절’이라 부른다. 이 용어는 필자가 고안한 용어는 아니지만 지형적 다양함과 복잡함의 정도를 의미하는 ‘지절률(sinuosity ratio)’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지절에 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평면적으로 본 지형적 다양성을 수평지절이라 부르고, 입면형태의 그것을 수직지절이라 구별했다. 따라서 수평지절은 대륙으로부터 돌출한 반도와 해안의 만입이나 하천의 출입상태를 뜻하며, 수직지절은 단면으로 본 지표면의 기복상태를 가리킨다. [그림 1]에서 보는 것처럼 직선에 가까운 A의 지절률 SA를 1.0이라 한다면, 그보다 굽이치는 정도에 따라 B의 SB는 1.5, C의 SC는 2.0, D의 SD는 3.0의 순으로 높아진다. 결국 지절률이 높을수록 다양한 형태로 복잡성을 띠게 된다.

곡선 B의 곡률도가 1.5 이상이면 지절률이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림 하단부에 표시된 스케일의 축척에 있다. A의 길이 xy 간의 실제 거리가 1,000킬로미터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말하는 지절률은 국지적 스케일이 아닌 대륙적 스케일에서의 지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D의 2.5는 2,500킬로미터가 되는 셈이다. 독자들은 일단 국지적 스케일에서 탄생한 것을 문화로, 그리고 대륙적 스케일에서 잉태된 것을 문명이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기서는 주로 국지적 스케일이 아닌 대륙적 스케일의 경우만을 대상으로 언급했다.

필자가 제시한 지절의 개념은 대륙적 스케일에서 볼 경우를 의미하지만, 국지적 스케일에서 볼 경우에도 지절률이 높은 지역에서 문화가 창출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개념은 동일하지만 공간적 스케일이 다를 경우 적용되는 것이 이른바 프랙털이론(fractal theory)이다. ‘프랙털’이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특징을 자기유사성이라고 하는데, 이 특징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털구조라 하며, 동일한 구조는 동일한 기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문명 창출의 메커니즘

초기의 문명은 현대문명에 비해 훨씬 더 지리적 조건에 구속되는 바가 컸지만, 인간들은 지리적 제약을 조금씩 극복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이동을 가로막는 산맥과 하천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기술이 이 시대에 발달한 것이다. 독보적인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자연조건이 지나치게 좋은 환경에서는 문명이 생겨나지 않았고, 안락한 자연환경보다는 가혹한 환경에서 문명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면서,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수레바퀴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저널리스트인 마샬은 지리의 힘이 21세기의 현대사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함을 강조하여 그것을 ‘지리의 포로’라 표현했다. 과연 그의 말처럼 역사는 지리의 포로인지 이 책에서 추론해보았다.

토인비의 문명론은 지리적 환경 요소를 경시하거나 간과한 탓에 객관성을 상실하는 우를 범했지만 독특한 시각에서 체계적이며 간명한 분석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는 “지구는 인류의 어머니다”라고 언급하면서도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자연환경이 좋은 나라는 늘 발전에서 뒤쳐졌고 고대문명과 세계 종교의 발상지가 모두 척박한 땅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론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류의 문명은 과연 어떤 땅에서 꽃피웠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리학자의 몫일 것이다.

문명은 자연환경의 영향에 좌우되는가, 아니면 인간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가? 미국의 지리학자 헌팅턴은 악명 높은 그의 저서 《문명과 기후》에서 기온 및 습도와 풍속 등과 관련된 기후 환경이 인간의 능률을 지배하고 그것에 따라 문명의 발달 정도가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다 양호한 환경을 찾으려고 노력해온 서양인의 본능적이고 현실 불만족 정신이 서양역사의 활력소가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이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서양인들의 제국주의적 기질을 미화했다.

이러한 환경결정론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학파에 뿌리를 둔 히포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기후가 인간의 지력은 물론 건강과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으로 온난하여 농작물이 잘 자라는 그리스 남쪽의 민족은 온순하지만 용기와 근면성이 결여되었고, 기온이 낮고 자연의 혜택을 못 받은 그리스 북쪽의 민족은 인내력과 진취성이 결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중간에 위치한 그리스민족은 근면하고 독립심이 강할 뿐더러 지성적이라는 자기(그리스)중심적 궤변을 전개했다. 그렇다면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는지 난감해진다.

이와 같은 히포크라테스의 사상은 고대 그리스로 그친 것이 아니라 서구우월주의의 사상적 계승자인 루소, 헤겔, 마르크스, 랑케를 거쳐 계승되었고 뒤를 이어 지리학 분야의 라첼과 헌팅턴에 이어 셈플이나 마쉬가 궤를 같이 하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모두 현대인의 추앙을 받는 학자들이다. 그러나 고대환경사학자인 휴스는 인류가 체득한 과거의 경험, 적극성과 창의성, 기술 수준 등과 같은 요인들이 무시하지 못할 요인들임에 틀림없지만, 기후 환경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전인수로 문명의 절정기에 달한 유럽문명의 우위성을 논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영국과 같이 추운 땅에서 발전한 문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리학자 헌팅턴이 일관되게 주장한 기후결정론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으나, 인류의 문명은 기후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하고 발전해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셈플과 같은 학자는 지중해 연안을 사례로 과거 농업의 발전은 토양의 비옥도보다 기후 조건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앞에서 헌팅턴의 연구를 악명 높은 저서라 표현했지만, 블레이는 헌팅턴의 저서를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그의 이론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많은 지리학자들이 헌팅턴의 저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헌팅턴이 강조하려는 핵심은 기후가 식량과 생산자원 획득의 난이도와 관련되어 문명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있다. 특히 고대에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식량 획득이 불가결했고, 식량 생산은 기후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인류는 잉여분의 식량자원이 충분하게 얻어지는 땅에서 기원했으며 그곳에서 문명을 발전시켰다. 기후는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와 육체적 에너지를 포괄하는 활동 에너지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활동은 섭씨 15도를 정점으로 하여 섭씨 10~20도에서 가장 능률적으로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물론 헌팅턴의 주장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역설하는 바와 같이, 기후가 인간의 활동에 알맞은 땅에서는 인간의 창의적인 활동력이 왕성해져 문명이 발달할 뿐만 아니라 생산이 증진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활 내용이 풍부해짐에 따라 문명발달을 가져오게 된다. 나는 물론 헌팅턴의 그와 같은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토인비의 문명론과 헌팅턴의 문명권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명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이 책에서는 퍼타일 크레슨트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설명하고 싶어 한다. 수메르의 역사, 바빌로니아의 역사, 영욕의 도시 바빌론, 알렉산더 대왕과 헬레니즘 시대의 도래, 마호메트의 등장과 이슬람 제국의 출현, 몽골과 티무르의 침략, 레반트·가나안·팔레스타인의 차이, 해양민족과 팔레스타인의 등장, 이집트 문명 등 큼직한 것들뿐만 아니라, 퍼타일 크레슨트의 공간적 범위,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는지, 쿠르간 가설이란 무엇인지, 《길가메시 서사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레반트의 땅이 겪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같은 이야기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문명의 발달과정을 설명했다.

 

퍼타일 크레슨트문명의 특징

문명의 자궁이라 할 수 있는 수메르문명으로부터 시작된 인류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와 동시에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이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은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의 4개 왕조에 걸쳐 4500년간 지속되었고, 이집트문명은 2500년간 존재했다. 두 지역 사이에는 레반트에서 생겨난 페니키아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있었다. 이들 문명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헬레니즘문명으로, 또한 페르시아문명으로부터 이슬람문명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인류문명의 발생지가 그리스·로마문명에 뿌리를 둔 유럽문명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와 같은 생각이 오류임을 이 책의 곳곳에서 지적한 바 있다. 수메르인들은 죽을힘을 다해 관개기술을 발전시켜 최초로 인류거주불가능 지역(Unökumene)인 사막과 소택지를 인류거주가능 지역(Ökumene)으로 탈바꿈시켰다. 퍼타일 크레슨트문명이 ‘하천형 문명’이라면 그리스·로마문명은 ‘해양형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 문명의 유전자는 퍼타일 크레슨트에서 찾아야 한다. 퍼타일 크레슨트문명에 포함된 페니키아문명은 다분히 해양형 문명이었던 것이다.

문명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다. 철학자이며 역사학자인 벌린은 사물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고슴도치와 여우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사상가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는데, 하나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고슴도치 형’과 단일한 관념으로 축약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많은 경험에 의존하는 ‘여우 형’이 그것이다. 전형적인 고슴도치형에는 플라톤, 헤겔, 브로델 등이 있고, 전형적인 여우 형은 아리스토텔레스, 헤로도토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문명을 설명할 때 이들 두 유형의 관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명 연구의 접근법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카는 “역사는 항상 움직이는 과정에 있으며 역사가는 그 과정에서 움직인다”라고 갈파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명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새로운 모색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지리학자 머피는 급변하는 세계에서 여전히 지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문명 간의 관계를 둘러싼 복잡한 사안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장소가 중요한 이유와 지도화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문명이 탄생되는 장소(땅)에 관한 설명과 지도화 작업을 통한 문명 간 교류에 대해 설명한 이유가 바로 머피의 주장과 괘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학자 헌팅턴은 오늘날 문명의 수준과 기후적 상태를 비교하며 양자 간에 현저한 비례적 유사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문명뿐만 아니라 고대문명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권은 원래 외부로 세력을 뻗어나가는 중심지인데, 오늘날에는 고대문명의 중심지 가운데 지구면적의 2%에 불과한 서부 및 중앙유럽이 여전히 문명권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번영을 누렸던 것은 문명의 중심과 야만의 중간에서 발흥한 바빌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이었다. 그 후, 문명의 중심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으로, 또 피렌체, 파리, 런던 등의 도시처럼 선대 문명의 중심과 야만의 경계에서 차례로 이동했다. 우리가 서양인의 정신세계의 근원이 동양의 메소포타미아 혹은 퍼타일 크레슨트에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세와 현대에도 존속하고 있는 문명의 중심지 중 가장 중요한 곳은 메소포타미아평원이다. 이 땅에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이 설형문자를 발명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거대한 관개시설을 만들고 소택지에 배수로를 만들며 복잡한 종교와 법률제도의 기초를 닦는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오늘날 근대문명의 특징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독창적 사상을 정립해 실행에 옮긴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유입된 종족인지 불명하지만 수메르에 들어와 여러 종족이 섞이면서 새로운 문명을 계발해 탄생시킨 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특유한 사건이었다.

뒤를 이어 연속적으로 수메르로 유입된 종족들은 기존의 문명으로부터 독창적 사업을 이룩해 새로운 사상을 창출해냈다. 바빌로니아로 유입된 종족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문화 수준을 한층 더 높여 주류세력이 셈어족, 스키타이인, 메디아인 등으로 바뀌는 와중에도 위대한 사업을 전개했다. 페르시아에 정복된 후에도 선행문명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자극적 과정이 쉼 없이 지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문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땅에 침입한 종족이 새로운 땅으로 유입되면서 일약 문명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침입한 땅에 자극을 받은 때문일까? 만약 그들이 문명을 이룩한 이유가 수메르 땅에 자극을 받은 때문이라면 그 자극의 무엇이 고도의 문명을 만들어냈을까?

지리학자 헌팅턴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새로운 땅에 유입된 침입자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풍부한 기회를 포착해 직접 육체적 활동력이 증가된 것에 따른 현상이었다고 설명했다. 침입자들이 받은 자극은 기존의 주민이 이룩한 업적에 마주하여 메소포타미아의 농업적 발전 가능성에 그들의 능력을 첨가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메소포타미아지방의 기후적 자극이 작용했다는 것이 헌팅턴이 제시한 가설이다. 그가 말하는 기후적 자극이란 정신적 에너지와 육체적 에너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헌팅턴의 가설에 동의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성장기를 거쳐 번영기를 맞이하게 되며, 번영기에 도달한 국가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절정기를 거쳐 쇠퇴하기 시작해 노화기에 이르러 결국 멸망기에 직면해 사멸하게 된다. 일련의 태동기→성장기→번영기→절정기→노화기→멸망기로 이어지는 과정 가운데 노화기와 멸망기를 극복하려면 성장기 후기부터 번영기 초기의 단계에서 새로운 세대가 주도하는 혁신적 정치구조와 사회체제를 정비하여 적절한 시기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선진문명의 강점을 점진적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이 시도되며 끊임없는 야성의 역동성을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신라와 동로마는 1,000년간 지속될 수 있었지만, 멸망한 국가의 경우는 대부분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 한용운은 우리 민족에게 “각성하라!”란 화두를 던지면서 만고에 어떤 나라든 자멸하는 것이지 남이 망하게 할 수는 없다면서 망국의 한을 품고 분노만 하면 민족의 미래가 없다고 일갈했다. 이는 위에서 지적한 멸망기에 대처하지 못한 한 민족의 어리석음을 통탄한 뜻이리라. 수메르인과 미케네인들은 난민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유럽인들이 두려워했던 훈족 역시 자취를 감췄다. 아직도 메디아 왕국의 후손들인 쿠르드인들은 나라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문명의 요람이었던 퍼타일 크레슨트에서는 여러 왕국과 제국이 명멸했다. 한 제국이 일어나려면 다른 제국이 쓰러져야만 했다. 어떤 왕국은 장수했고 또 어떤 왕국은 단명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처럼 단명한 왕국이라 하여 반드시 그 영향력이 작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장수한 왕국이라 하더라도 그 파급력이 크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또한 영토규모가 페니키아처럼 작아도 해양국가로서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연 왕국도 있었다. 역사의 울림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퍼타일 크레슨트의 복잡한 문명 간의 관계를 요약해 스키마로 제시한 것이 [그림 2]이다.

오래 지속된 왕국과 제국들은 대체로 나름대로의 장수한 이유가 있었다. 인간은 뜻이 같아야 오랜 동안 함께 할 수 있다. 사랑과 우정도 뜻이 같아야 오래 지속되는 법이다. 백성들의 생각하는 바가 같으면 뜻을 모아 이룩하는 바가 많았다. 백성들의 생각을 읽고 뜻을 모은 왕은 훌륭한 업적을 낳았으며, 아울러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 민족을 포용한 왕은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포용 정책이었다.

비잔틴문명에는 그리스와 로마문명, 오리엔트문명이 공존했던 것처럼, 오리엔트의 퍼타일 크레슨트문명 속에는 문명의 복합체라 할 수 있는 다양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문명은 인류의 DNA가 되어 물질문명뿐 아니라 정신문명 속에 녹아들었다.

퍼타일 크레슨트문명의 복합체는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하천형 농업문명과 이집트의 하천형 석조문명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한 고원형 융합문명과 레반트의 페니키아를 중심으로 한 해양형 교역문명이 있었다. 이들 문명은 각각의 특징도 있었지만, 문명 간 교류로 융합적 특징이 다분했다.

문명의 탄생은 다양한 변화를 일으켰는데, 무엇보다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문화의 다양화에 있다. 이는 고대문명 가운데 가장 확실한 현상이었으나 간과하기 일쑤다. 문명의 탄생과 더불어 건축, 의복, 기술, 행동 양식, 사회구조, 사상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의 고유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경향은 선사 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지만, 문명의 탄생으로 한층 더 확대된 것이다. 선사 시대에 다양화를 촉진한 것은 땅의 생김새인 지절에 따른 것이었고, 그 후부터는 각 문명이 지닌 창의력이 새로운 다양성을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이들 문명의 땅을 이용하는 태도다. 아나톨리아의 고원형 융합문명은 ‘땅 적응자’였고 메소포타미아의 하천형 농업문명은 ‘땅 창조자’였는데 비해, 이집트의 하천형 석조문명은 ‘땅 기생자’였으며, 레반트 페니키아의 해양형 교역문명은 ‘땅 초월자’였다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퍼타일 크레슨트문명의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명은 모든 문화와 마찬가지로 인위적 또는 인공적인 것이며 집단생활의 의식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차츰 확대해 감에 따라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복잡한 도구들을 만든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수메르 동쪽에 위치한 엘람 및 페르시아도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의 차이처럼 평야의 저지대와 산악의 고원지대라는 극단적 지리적 차이를 보이며 고원형 융합문명을 형성했다. 또한 아나톨리아고원의 ‘땅 적응자’는 나일강 유역의 ‘땅 기생자’ 간에 ‘땅 초월자’인 페니키아를 놓고 충돌하기도 했다. 이 차이가 퍼타일 크레슨트지대의 문명과 역사적 발자취를 설명해 주는 열쇠가 된다.

구체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이라크)는 도시생활에 불가결한 원료물자가 빈약하기 때문에 정치체제를 경제적 필요에 맞출 필요가 있었는데 비해, 페르시아(이란)는 산악지대의 목초와 풍부한 광산자원이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 취락을 더 확대해 대규모 집단을 형성해야 할 자극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건축술의 진보란 측면에서는 도시가 발달된 메소포타미아가 앞서게 되고 문자사용의 측면에서도 역시 더 빨리 보급되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고원지대의 이란(페르시아)이 평야지대의 메소포타미아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체제를 갖춰 분발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구석구석에서는 여러 인종과 만족들이 살아오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를 만들어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그들 모두가 문명을 탄생시킨 것은 아니었다. 지절률이 높은 땅을 골라 문명이 탄생했고, 교류했으며 이동했다. 문명 교류는 물질문명만 공유한 것이 아니라 정신문명을 교감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차츰 삶의 양식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들어 냈다. 시대정신을 반영한 가치는 불변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일 것이다.

우리가 문명사를 배우는 목적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인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그 문명의 역사 속에서 장점을 찾고 단점을 반성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정신을 일깨우고 고양하며 삶의 방향을 찾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기르기 위함이다. 우리는 퍼타일 크레슨트문명에서 문명간 상호작용에 의한 창의성, 융합성, 포용성, 진취성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남영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지리학

서울대학교와 일본 쓰쿠바대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다. 고려대학교 교수, 쓰쿠바대학교 초빙교수, 미네소타대학교 연구교수, 한국도시지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도시공간구조론』, 『글로벌시대의 세계도시론』, 『한국인의 두모사상』, 『日本の生活空間(공저)』, 『首都圈の空間構造(공저)』, 『21世紀人文地理學の展望』, 『France-Coree: 130 ans de relations 1886-2016(공저)』, 『땅의 문명』, 『한국의 도시와 국토(공저)』, 『아주 쓸모 있는 세계 이야기(공저)』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