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쓰기’라는 공동작업 - ‘나를 일으키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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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쓰기’라는 공동작업 - ‘나를 일으키는 글쓰기’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1.11.08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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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나는 공동 작업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이다. 주로 하는 일이 번역과 강의인데 둘 다 혼자서 전 과정을 진행하고 책임도 다 짊어지는 종류여서 그렇다. 물론 번역은 편집자를 거쳐 독자와 만나게 되고 강의 또한 학생들의 실시간 암묵적 평가와 학기말 공식 평가를 받은 후 학교가 이를 확인하니 끝까지 모든 과정이 내 결정사항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혼자 취미로 하는 활동이 아닌 이상 이 정도의 결과 점검도 없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혼자 하는 일을 주로 하던 내가 공동 작업을 흠씬 경험하는 일이 일어났다. ‘나를 일으키는 글쓰기’라는 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 책은 글감을 제공해 실제로 글을 써보도록 하는 워크북이었다. 그러니 내가 글로 채워 넣어야 하는 분량이 많지는 않았다. 글감을 주고 글 쓸 여백을 주는 방식이니 말이다. 

비슷한 워크북을 이전에 다른 출판사와 이미 만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떤 글감을 넣을지, 글감들을 어떻게 장으로 구분해 책 한 권을 구성할지, 장별로 간략한 소개글을 얼마나 어떻게 넣을지 내가 혼자 결정했고 그래서 또 다른 단독 작업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출판사는 번역된 글쓰기 워크북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을 바꿔놓고 싶어 했다. ‘가장 멋진 워크북’을 만들어야 했다. 

2020년 여름부터 회의가 시작되었다. 담당 편집자와 만나 목차를 구성했다. 어떤 주제의 장들을 만들고 각각의 장에 어떤 글감들을 넣을지 논의했다. 회의를 할 때는 내가 일종의 기획안을 만들고 이를 함께 검토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실제 작업해야 하는 사람이 나이니 초안을 만드는 사람도 나여야 했다. 하지만 회의가 거듭될수록 나는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숙제 검사는 결국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 받고 다음 숙제를 지시 받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전체 내용이 80% 이상 만들어진 후에는 숙제 검사가 한층 힘들어졌다. 만들어놓은 것을 삭제하고 바꿔 넣어야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바꿔 넣는 것이 장 서두에 들어가는 글일 때도, 글감일 때도, 장 말미의 글쓰기 안내일 때도 있었다. 머리말, 그러니까 책을 펼쳐 가장 먼저 읽게 되는 글은 출판 직전까지 계속 바뀌었고 나는 급히 새로운 소재를 찾아 써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내 나름대로 정해둔 시간표는 방학 중에 원고 작업을 끝내는 것이었는데 학기 중에 자꾸만 원고를 붙잡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담당 편집자가 자꾸 바뀌었다. 작은 출판사는 본래 이직이 빈번하다. 새로운 편집자는 원고를 살펴보며 기본 전략 방향을 수정했다. 대상 독자가 젊은 여성이다가, 중장년층이다가, 중년 여성이다가 했다. 대상에 따라 글감의 내용과 문장이 다듬어져야 했다. ‘전체적으로 너무 올드하다’는 숙제 검사를 받아들면 한숨이 나왔다. 나는 내 나이대 여성을 대상으로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인 걸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다음 단계의 숙제 검사는 문장과 표현을 수정하는 최종 편집 단계였다. 편집자가 수정하고 내게 의견을 구하고 수정 허락 여부를 묻는다. 이건 번역에서도 늘 하는 작업이다. 내가 쓴 글은 편집자 마음에 안 차고 편집자가 수정해 놓은 글은 내 마음에 안 차는 줄다리기가 펼쳐진다. 줄다리기 끝에 도착한 중간지점이 결국 최선이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요행히 편집자와 나의 글 궁합이 어느 정도 맞으면 그럭저럭 수월하게 지나가지만 아니라면 또 다른 험난한 길이 열린다. 이 책을 맡은 마지막 편집자와 나는 글 궁합이 별로 맞지 않았고 또다시 시간과 노력, 신경전이 이어졌다. 책이 출간되고 난 후에는 최종 편집 때 건드리지 않았던 문장을 멋대로 바꿔놓은 것을 보고 혼자 씩씩대는 일도 있었다.

최종 숙제 검사, 그러니까 출간 후 독자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판매량은 형편없었고 글쓰기 워크북 시장을 바꿔보겠다는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다.  

내게는 흔치 않은 공동작업의 경험이 이렇게 끝났다. 세상의 수많은 이들이 어제도 했고 오늘도 내일도 이어가고 있는 공동 작업에 나도 살짝 발끝을 담가보았던 셈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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