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후퇴와 회복력: 한국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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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후퇴와 회복력: 한국의 경험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1.08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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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이슈브리핑] 민주주의 후퇴와 회복력: 한국의 경험

 

30여 년 전 민주화는 세계적인 대세였다. 1970년대 중반 남부 유럽에서 시작된 민주화는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거쳐 아시아 지역의 많은 국가로 이어졌다. 이후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동유럽 국가에서의 민주화로 이어졌고, 넬슨 만델라로 상징되는 남아공의 민주화 등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새뮤얼 헌팅턴은 이를 두고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라고 불렀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체제 경쟁이 마무리된 ‘역사의 종언’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 후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헝가리, 터키, 태국, 필리핀, 러시아 등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의 트럼프 현상,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극우 정당, 포퓰리즘 정당의 부상을 들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언제라도 도전받을 수 있으며 그 회복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도 민주주의는 후퇴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signs of crisis)’는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이에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지난달 <민주주의 후퇴와 회복력: 한국의 경험>(작성자: 강원택 서울대 교수)이란 제목의 이슈 브리핑을 발간했다.

이 이슈 브리핑에서 강 교수는 ‘위기 징후’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과제를 던져준다는 데 주목한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 분석에 이어 위기 징후 극복과 민주주의 복원력 강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강 교수는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고 유지하는 핵심 요인으로 깨어 있는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며 시민교육에서 관용과 공존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한국의 민주화 과정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비교적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민주적 공고화를 이뤄왔다. 민주화 이전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비민주적 체제였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것은 아니었다. 선거는 주기적으로 실시되었고 야당의 존재는 허용되었다. 선거의 공정성은 의심받았고 야당이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도 사실상 없었지만, 선거는 상당히 경쟁성을 갖고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도 선거를 통해 권력에 대한 민심의 불만은 표출되었고 그것은 집권 세력에게 심각한 정치적 경고가 되었다.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고 해도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확인받고자 했고, 원천적으로 정통성에 대한 취약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야당 지도자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보장될 수 있다면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이뤄졌다. 한국의 민주화에서 핵심적 요소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1987년 한국 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의제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후 민주적 공고화 과정은 선거의 공정성 확립에 놓였다. 그런데 이러한 선거 민주주의의 확립과 그로 인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주요 정치 지도자들 간의 경쟁을 구심적(centripetal)인 형태로 이끌었고 민주화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또한 선거 승리를 위해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경쟁적으로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들 중에는 ‘타협’으로 이뤄진 민주화 전환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강경파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제도권 정치 진입은 새로운 엘리트의 충원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정치적 분극화(polarization)와 분절화(fragmentation)를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민주화와 함께 등장한 지역주의 정당 구도와 단순 다수제 중심의 선거제도 역시 유효 정당의 수를 3-4개로 제한하여 안정적인 온건 다당제로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실제로 정권교체가 일어났고 이제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선거를 통한 권력의 위임이 유일한 정치적 경쟁의 규칙(the only game in town)으로 확립된 것이다.

한국의 민주적 공고화에는 민주화 초기의 조속한 군의 탈정치화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민주화 이후 두 번째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취임 직후 신임 대통령에 대한 높은 기대감과 지지, 그리고 민주적 정통성에 기초하여 이전 군부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색 짙은 군 장성들을 해임하고 새로운 인물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조직된 ‘신군부’로 불리던 군부 내 파벌의 지배 속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던 다수의 군부 인사들은 이러한 군 개혁을 환영했고 민주화로 형성된 새로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의 원만한 민주적 공고화 과정에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경제성장이 꾸준히 이뤄졌고 특히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하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기까지 대다수 국민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했고, 사회적 계층 이동에 대한 믿음도 강했다.

또한, 1987년 민주화가 시민의 참여로 이뤄낸 것처럼 민주적 공고화 과정에서도 시민의 역할이 중요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제도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거나 정치적 반응성이 크게 낮아질 때는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제도권 정치를 압박했다. 2002년, 2004년, 2008년, 2016년 거대한 규모의 촛불집회가 그 예가 된다. 한국의 민주적 공고화는 이런 요인들이 결합되어 비교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원만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나?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라고 할 만한 현상이 목도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했거나 권위주의 체제에 가깝게 변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민주주의의 질(quality)’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려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87년 체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댓글 사건이 드러났고, 2017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드루킹 사건이 일어났다. 두 사건 모두 선거와 관련된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의도를 갖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더욱이 2020년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서는 사회 일각에서 선거 개표 부정을 주장하는 등 선거 공정성과 관련된 시비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선거의 공정성과 관련된 의구심이나 개입의 문제가 잇달아 발생하는 것은 건강한 민주주의의 기반을 해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선거과정의 진실성 시비는 선거관리위원회를 비롯하여 감사원, 검찰 등 ‘심판 기관’의 중립성이나 독립성에 대한 의구심 제기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일이다. 검찰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고 있고, 공정성과 독립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할 사법부가 종종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사건이나 법령 제정도 나타나고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사찰을 한 것이나, 문재인 정부 하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법, 대북전단 금지법과 같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된 것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언론중재법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정파적 양극화가 심각해지면서 다원주의, 관용, 배려와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와 관련하여 부정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19년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사회적으로 큰 갈등을 빚은 바 있다. 그 사건이 잘 보여주듯이, 우리 사회는 최근 이념적, 정파적으로 두 개의 집단으로 분열되어 있다. 정치적 갈등이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할 수 있지만, 문제는 갈등이 해소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정파적 양극화에 중첩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 직후 지역주의에 의해 분열되었던 우리 사회는 이제는 그 위에 이념, 세대, 계층의 균열까지 더 해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균열이 여러 정당에 의해 분산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주요 정파가 중첩적으로 독점함으로써 양극적 대립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목소리보다 과격하고 극단적인 주장이 각 진영에서 보다 큰 힘을 얻을 수 있고 그만큼 사회적 갈등은 더욱 고조된다. 심지어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인한 양극적 갈등은 ‘선과 악’의 대결로 각 진영의 극단적 지지자들에게 여겨지기도 한다. 나의 주장은 ‘선’이고 남의 주장은 ‘악’이 된다면, 이런 상황에서 타협과 화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인식 속에는 선이 악을 압도하는 것이 정의된다.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할 수 없고 차이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게 된다.

특히 이런 양극화 현상은 인터넷과 사회적 관계망(SNS)에서의 논의에서 더욱 심각해서, 공적 사안에 대한 토론이라고 해도 같은 생각을 갖는 이들 (like-minded people) 간의 논의에 국한되고 이는 진영 간 편향된 입장을 강화해 가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소통이 다양한 의견과 입장을 듣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가는 기능을 하기보다는, 오로지 같은 생각을 갖는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편향된 나의 생각을 확인하고 그것을 오히려 재강화(reinforce)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갈등과 이념적 양극화를 해소해야 할 제도권 정치에서 오히려 양극화를 부추기는 적대적 정치(adversary politics)를 행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제기된 이슈가 국회나 정당 등의 제도권 정치를 통해 정파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시민사회에서의 이념적, 정파적 양극화를 고조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민주화 이후 30여 년의 공고화 과정을 거쳐 왔지만, 대통령과 중앙정부로의 권력 집중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이른바 ‘청와대 정부’라고 불리는 것처럼 대통령 측근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 집중의 통치 형태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은 각 부서나 기관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으며, 통치의 효율성, 정책 집행의 지속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지방자치에도 불구하고 지방정부는 여전히 중앙정부에 비해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미약한 지위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서울 공화국’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다. 비교적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이행과 공고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이러한 상황을 ‘민주주의의 붕괴’ 혹은 ‘근본적인 후퇴’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상황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의 훼손이라기보다 권력 실행, 담당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는 시민의 참여와 제도의 작동 때문에 그 스스로 복원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민주주의 복원력 강화를 위한 과제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주목할 특성은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없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체제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위기 상황은 몇 차례 발생했다. 1997년 외환위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시도,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모두 정치제도를 통해 해소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최초의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였지만 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사실상의 탄핵을 둘러싼 국민투표의 성격을 가졌고 여기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획득하면서 정치적으로 해결되었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최종 마무리되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국정농단과 부패 사건은 촛불집회를 통한 시민의 요구와 이에 대한 국회의 반응,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수용 과정을 통해 해소되었다. 심각한 위기들이 국민의 참여와 심판, 그리고 헌정체제를 통해 모두 해소되었다.

그런 점에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위기 징후’나 ‘민주주의 질의 하락’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민주주의는 상당한 회복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 현상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공정한 선거와 이를 통한 정치적 책임성의 확립, 정권교체의 일반화 역시 민주주의의 회복력과 관련해서 중요한 제도적 기반이 된다. 한국의 경험 속에서 볼 때, 민주주의의 회복력에 대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정권교체의 가능성과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위기 징후’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시민사회와 국가를 이어주는 정당 정치의 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지역주의에 기초한 거대 양당의 카르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당 정치의 경쟁성 회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선거라는 정치적 경쟁 시장에서 참신하고 경쟁력 있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이 가능해야 하고 이를 통해 정당 정치 생태계의 변화와 함께 더욱더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정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기존 정당들이 기득권을 대표하거나 특정한 이해관계나 입장만을 대표한다는 불만이 고조되면 정치제도는 불안정해진다. 포퓰리즘이나 극단주의 정치도 이런 상황에서 힘을 받는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정당 정치를 통해 표출될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통해 새로운 요구나 주장이 제도권 정치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와 같은 단순 다수제 방식의 선거제도 아래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대표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지역주의와 결합한 단순 다수제 방식 위주의 선거제도 아래에서는 두 거대 정당의 기득권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의 출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런 제도적 보호 속에서 거대 양당은 양극적 대립을 통해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려고 하고 그 결과로 사회적 갈등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따라서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로의 개혁이 필요하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뤄진 이른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같은 ‘꼼수’적 타협이 아니라, 비례성의 원칙이 제대로 구현되는 형태로 제도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계층, 성, 지위, 학력, 직업, 출신 등의 기준에서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균형 있는 대표성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이와 함께 권력을 감시하는 심판자의 역할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선관위, 감사원과 같은 행정 기구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매우 중요하다. 사법부를 비롯한 각 기관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에 대한 논란은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의 지위와 대통령으로의 권한 집중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개헌 과정을 통해 대통령은 행정 수반의 지위로 되돌리고, 대법원에서의 법관추천 회의의 부활처럼 각 제도적 기관이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확립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책의 마련이 필요하다. ‘제왕적’이라고까지 불리는 대통령 중심 체제의 해체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의 행정부서와 서울에 집중된 행정적, 재정적 권한을 과감하게 지방에 이양하는 지방 분권의 실현 또한 중요하다. 민주화 당시 우리 사회의 핵심적 과제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이라는 제한된 목표에 놓여 있었다. 그 목표는 이제 대체로 달성되었다. 민주화 이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새로운 국가 통치 시스템 구축을 위한 헌법 개정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역시 깨어 있는 시민의 역할이다. 권력을 견제하고 정치제도의 작동을 감시하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를 복원하게 만드는 힘은 시민에게서 나온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습득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시민교육 역시 민주주의의 복원력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표성과 포용성 확대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정당 엘리트 선발의 구성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층, 성, 지위, 학력, 직업, 출신 등의 기준에서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관용과 공존의 중요성이 시민교육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동질적이고 일원적인 것이 아니라 불일치, 다양성이 원래의 사회 상태이며 합의는 그러한 다양한 이들 간 타협과 양보를 통해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는 것이 교육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이 ‘서로 다름에 대한 합의(agree to disagree)’라고 하는 다원주의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내재화되어야 한다. 사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그동안 강조되어 온 것은 자유보다는 민주주의 측면이었다. 민주주의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언제나 우리 정치에서 중요한 가치로 유지됐다.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하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이에 비해 자유주의적 가치는 우리 사회에서 많은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개인의 자유, 다름에 대한 인정, 관용과 배려, 다양성의 존중과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제도권 정치만으로는 조화와 화해의 사회를 이뤄내기 어렵다. 시민이 직접 그러한 가치를 만들어 내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 바로 그 가치를 지켜내려는 시민의 의식이다.

 
■ 저자: 강원택 서울대 교수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영국 런던정치경제대(LSE)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한국정치학회장, 한국정당학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 정치, 의회, 선거, 정당 등이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2019), 『사회과학 글쓰기』(2019), 『한국 정치론』(2019), 『시민이 만드는 민주주의』(2018, 공저), 『대한민국 민주화 30 년의 평가』(2017, 공저), 『대통령제, 내각제와 이원정부제』(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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