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적 이행의 이정표, 한국 ‘천만 관객 영화’에서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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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적 이행의 이정표, 한국 ‘천만 관객 영화’에서 찾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1.01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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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 | 심광현·유진화 지음 | 희망읽기 | 388쪽

 

역사상 유례없는 문명사적 이행기이다. 다중위기가 소용돌이치는 오늘날의 위기를 넘어설 해법이 있을까? 이 책은 한국의 ‘천만 영화 현상’에서 그 해법을 모색한다. 정신분석과 뇌인지과학 사이에서 대중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 온 제3의 항로가 영화라고 밝히면서 책은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사실로부터 문명사적 이행의 이정표를 찾아간다. 2003년부터 2019년까지 할리우드를 압도하며 지속된 한국의 ‘천만 영화 현상’, 이 특이한 현상에서 대중의 소원-성취 꿈이 담긴 새로운 철학을 벼려내고,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로 바람직한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저자가 보기에 영화는 대중의 집단 무의식이 기입된 예술 장치를 넘어서서 한 개인의 의식 체계를 혁명적으로 전복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저자는 정신분석과 역사지리-인지 생태학, 뇌 과학과 시스템 이론, 철학과 영화이론을 경유한다. 저자가 펼쳐낸 방대한 지도 속을 거닐다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화 내에서 작동하는 역동적 힘과 만나게 된다. 특히 미국과 중국, 인도 다음으로 자국 영화의 비율이 가장 높은 한국의 경우, 천만이 넘는 관객을 수용한 대중영화들은 그 자체로 징후적이며 선험적이다. 저자는 이 작품들을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 위치한 작인으로서 역사화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집단 무의식을 들여다본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자화된 개인주의적 인간상과는 상반된 다중지능의 사회적 개인들이 연대해 만드는 개인, 사회, 자연의 선순환. 이 꿈을 가로막는 현실의 장벽과 대중의 무의식적 소원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창조적으로 변형해 현실의 변화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영화들을 저자들은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라 부른다. 그동안 암묵적으로 진행된 이 영화적 실천의 철학적 함의를 사회 구조 변화와 대중정치의 상호작용 분석을 통해 명시적으로 해명하고, 영화를 매개로 사회적 대안을 설계하는 마음의 지도와 가치 평가의 틀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신경정신분석학 + 역사지리·인지생태학’에 기초한 영화철학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무려 19편이나 된다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특수한 한국적 맥락이 자리 잡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대중영화의 철학적 효용론을 바탕으로 ‘천만 영화’에 담긴 2000년대 한국 사회의 대중적 무의식을 탐사한다. 이 책은 그동안 융합 인문학의 선구적 시도를 통해 사회문제를 통찰하고자 했던 저자가 그간의 이론적 연구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영화가 무의식의 발현인 꿈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현대 영화이론의 가장 중요한 가지 중의 하나다. 크리스티앙 메츠는 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마음에 작동하는지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상징계 개념으로 설명해 냈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의 인지생태학적 관점과 2000년대 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여 대중영화의 작동기제 뿐만 아니라 천만 영화의 문화정치를 밝히고자 한다.

무엇보다 비판적 문화이론가인 저자가 2000년대의 대중영화를 대중의 철학적 사유의 장(場)으로까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놀랍다. 그것은 사변적 철학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중과 점차 유리되면서 일상 속의 사색이 그 역할을 대신 맡을 수밖에 없는데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잠시나마 삶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대중영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삶에 지친 대중들에게 영화는 꿈과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적인 소원 성취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중영화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2000년대 한국에서 두드러진 ‘천만 영화’ 현상이다.

물론 한국의 ‘천만 영화’ 현상이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제작, 배급 상영을 장악한 대기업 영화의 독과점 흥행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대중영화를 통한 카타르시스의 경험이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대중영화가 대중의 무의식을 왜곡된 방식으로 연결하여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도록 유도할 수 있고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해 왔음을 지적한다. 다만 할리우드의 SF 영화들은 현란한 기술 변화의 시대에 개인들에게 잠재된 역량을 끌어올려 소원 성취의 꿈을 시뮬레이션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천만 영화’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2000년대 한국 시장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외국 영화들의 대부분이 SF-판타지물이다.

3부에서는 이 책의 공저자가 앞에서 논의된, 대중의 철학적 성찰의 항로로 기능해 온 ‘천만 영화’를 실제로 분석하고 있다. 이론적 논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3부의 내용이 친숙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1, 2부와 다소 이질감은 있지만 이러한 시도가 오히려 이 책을 더욱 다성적(polyphonic)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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