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화할 수 있는 대가는 무엇이고 정당화할 수 없는 대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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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화할 수 있는 대가는 무엇이고 정당화할 수 없는 대가는 무엇인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1.01 0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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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기는 싫으면서 천국엔 가고 싶은: 생명윤리학의 쟁점들 | 에이미 거트먼·조너선 D. 모레노 지음 | 박종주 옮김 | 후마니타스 | 440쪽

 

의학과 과학의 진보와 함께 찾아온 생명윤리학의 쟁점들을 살피는 책이다. 전염병 예방이나 백신 접종, 건강보험 등의 공중보건 이슈에서 동물/인체 실험, 장기이식, 임신중지, 재생산 기술, 죽음, 유전자공학, 뇌과학 이슈까지 ‘생명윤리학’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며, 정치경제적으로 양극화된 사회를 관통하는 생명윤리학의 쟁점들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사회적·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생명윤리학이 부상한 것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쏠린 대형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1972년 앨라배마주 메이컨 카운티(청사 소재지는 터스키기)에서 진행된 매독 실험이 언론에 폭로돼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이 폭로가 변곡점이 되면서 미국은 인체 실험의 윤리적 원칙을 수립하는 ‘생의학·행동과학연구인간피험자보호를위한국가위원회’가 1974년 설치됐고, 이런 연구에서 준수되어야 할 가이드라인으로 《벨몬트 보고서》가 개발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사람들은 이제 비윤리적 인체 실험의 시기가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펜실베이니아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의 실험에서 두 사람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리 윤리적인 인체 실험이라도 가능성과 난관이 동시에 따른다. HIV 연구에 큰 성과를 낸 칼 준이 말한 대로 “어떤 프로토콜을 적용한 첫 환자의 사망으로 아무도 치료되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 책은 보건의료사의 유의미한 사건·사례들을 소환해 공정한 시각으로 비추며, 질병에 대한 새 지식을 개발하는 데 있어 피해 갈 수 없는 질문들을 독자에게 던진다. “정당화할 수 있는 대가는 무엇이고 정당화할 수 없는 대가는 무엇인가?”

생명윤리학의 쟁점들은 삶의 전 단계와 연결된다. 유전학 등이 발전하면서 인류의 미래까지 가 닿는다. 개인이나 가족뿐만 아니라 서로 연결된 세계에, ‘우리’에게 닥쳐온다. 저자들은 이 책의 초점이 그런 사회적 차원에 있다고 밝힌다. 대화에 보다 많은 공동체를 참여시키고, 서로 경합하는 관점들을 이해시키고, 논쟁의 와중에서도 공동선을 더 잘 성취하기 위한 공적 결정들을 정당화하는 과정 말이다.

유망한 의학 연구를 추구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이를테면 인권 존중과 사회복지의 극대화라는 가치가 서로 경합한다. 생명윤리학은 다수를 보호하면서도,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 감수하는 위험으로부터 소수를 보호해야 한다.

2019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2020년 페이퍼백 버전이 나오면서 “팬데믹 윤리”라는 제목의 저자 후기가 새로이 추가됐다. 40쪽 분량의 이 글에서 저자들은 팬데믹 윤리의 본질이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집단적 헌신’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마스크 착용’이라는, ‘알지 못하는 타인을 향한 헌신’을 요구하는 하나의 지침은 정치적 싸움의 땔감이 됐다. 미국 대통령과 몇몇 주지사들은 자발성과 자유를 강조하면서 마스크 착용을 ‘누구를 지지하느냐’의 정치적 문제로 만들었다. 그들은 공중보건 전문가들의 의견과는 다른 메세지를 내보내며 혼란을 줬고, 이 여파는 물리적 거리 두기, 선별 검사, 접촉자 추적, 양성 확진자 격리 등의 국가적인 정책 적용에도 방해가 됐다.

팬데믹 상황에서 흑인, 히스패닉, 원주민 등의 저소득 노동자들은 백인이나 중산층 이상 계급보다 훨씬 많은 필수 노동, 즉 고위험 노동을 감당한다. 또한 이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더 많이 죽고, 더 많이 실직하지만, ‘미등록 구성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가구에는 부양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에 국가의 경기부양책 법안에서 소외당한다. 저자들은 경찰의 진압으로 생명을 잃은 조지 플루이드의 죽음을 언급하며, 팬데믹 상황이 인종차별과 같은 만성적인 부정의의 영향력을 배가시킨다고 말한다. 팬데믹 윤리가 요구하는 차원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공중보건 비상 상황 대처 이상의 것이다.

팬데믹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는 기준들, 이를 테면 질병의 확산을 막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구속만 한다는 원칙, 정보에 기반한 집단적 동의를 구하는 일, 증명되지 않은 약물을 시도할 권리, 백신 공급과 산소호흡기 배분 등의 문제는 모두 생명윤리학의 핵심 질문과 맞닿아 있다. 특히 이는 재난 상황에서 지도자나 사회 구성원들이 무엇을 우선하느냐에 따라 쉽게 간과될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다. 저자들은 “전 지구적 팬데믹 앞에 민족주의를 둘 자리는 없다”면서 “전 세계의 공중보건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득”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폭넓은 연구, 공평하고 비용 부담 없는 보건의료 체제, 강력한 보건의료 인프라, 해당 분야 전문가를 신뢰하고 충분한 정보에 기반해 생명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지도자와 시민을 동시에 촉구한다.

이 밖에도 책은 총 3부에 걸쳐 미국 보건의료사의 60년 궤적을 연대기 순으로 살피고, 의사 조력 죽음, 비용 부담 없는 보편적 보건의료 접근성, 장기이식, 재생산 기술 등 첨예한 생명윤리학의 주요 논쟁들을 다룬다. 또 유전자편집, 합성생물학, 뇌과학 등 첨단의료 기술이 부과하는 새로운 선택들을 조명한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누구부터 살려야 할지”에 대한, 생명윤리학의 관점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구명보트 윤리를 넘어, 전문가의 말할/비밀을 유지할 의무, 정보에 기반한 개인/집단의 동의, 보건의료 접근의 공정성, 인도적 말기 의료와 인권 존중의 원칙 등의 복잡성을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불필요한 규제는 없이, 그러나 필요한 규제는 모두 시행”하면서, 연결된 우리는 어떻게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옮긴이에 의하면, 저자들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자유지상주의 등 여러 정치적 입장의 공통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자유주의자로서 입장을 가감 없이 제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보편타당한 것으로 포장하지 않고 여러 관점을 고루 설명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섣불리 답을 내리려 들지 않고 끊임없고 폭넓은 대화를 펴고자 하는 생명윤리학의 지향과 필요를 생각한다면, 이어질 토론을 위한 입구로서 이 책이 갖는 미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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