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 한(恨)의 정서가 아닌 역동적 애도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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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 한(恨)의 정서가 아닌 역동적 애도의 태도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11.01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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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비추는 운명: 해방 전 임화 시의 문명 비평적 애도 | 홍승진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86쪽

 

이 책은 ‘어째서 임화의 해방 이전 작품 대부분은 상실된 무언가를 슬퍼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서기장까지 맡으며 사회주의 문학을 적극 옹호하였던 임화의 이력과 상반되게도, 그의 시만큼은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 문학처럼 진취적인 전망과 선명한 이데올로기를 선전·선동하는 측면보다도 죽거나 떠나간 사람을 슬퍼하는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점은 우리의 통념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때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전유한 자크 데리다와 주디스 버틀러의 애도 개념은 그 물음을 풀 수 있는 유효한 시각이 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공적인 애도는 상실된 대상에게 향하는 사랑을 회수하여 다른 대상에게로 돌리는 작업이지만, 데리다와 버틀러가 말하는 진정한 애도는 상실된 타자의 대체 불가능한 타자성, 즉 단독성(singularity)을 자아 안에 보존함으로써 자아를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카프 시인들의 많은 작품은 희생된 동지나 가족이나 연인 등을 시적 화자의 사회주의적 이념과 동일시하고 그 이념의 고취를 위한 소재로 환원시킨 반면에, 임화의 시는 상실된 인간들이 특정한 이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을 표현한다.

이처럼 이 책은 마르크시즘이라는 단일한 기준을 중심으로 임화의 문학 전반을 파악하던 기존 연구 관점과 달리, 임화의 시 세계가 그 출발 지점부터 해방 직전까지 일관되게 도식적ㆍ교조적 마르크시즘을 벗어나 있다고 해석한다.

카프 시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손꼽히는 1920년대 후반 임화의 ‘서간체 시’는 상실된 타자를 고정적 이데올로기로 환원할 수 없는 단독적 타자로서 시적 자아 안에 보존하고 기억한다. 서간체 시는 지금까지 보통 ‘단편서사시’로 규정되던 작품들을 새롭게 개념화한 용어라 할 수 있다. 단편서사시라는 용어는 사회주의 이념의 대중화 수단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딱딱한 이념을 짧은 이야기(서사)로 쉽게 전달하여 대중에게 공감시킨다는 것이다. 반면 서간체 시라는 용어는 편지(서간)의 발신자만도 아니고 수신자만도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가 함께 들어 있는 유일무이한 기억을 강조한다. 이는 상실된 타자를 주체와 동일시하지 않으며 주체성 안에 타자성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애도와 상통한다.

이 책은 임화의 시 세계가 민요시 창작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 주목하며, 임화의 시에 나타나는 애도의 특성이 김소월 등의 한국 민요시와 거기에 나타나는 애도의 미학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국문화의 고유한 특징은 ‘한(恨)’의 정서이며 그것이 민요시에서 잘 나타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통념이다. 그러나 ‘한’의 정서는 한국 민족문화의 본질을 수동적이고 비관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위하여 일본 학자들이 고안해내었다는 식민주의적 함의를 띤다. 그러나 김소월의 민요시부터 임화의 서간체 시에 이르는 한국시의 미학은 수동적 ‘한’의 정서가 아니라 주체성 안에 타자성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역동적 애도의 태도임을 이 책은 밝힌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임화의 시에 나타나는 애도가 한국시의 독특한 미학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문명론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이다. 사적인 감정이나 행위쯤으로 간주되기 쉬운 애도의 시적 표현이 기존 문명의 한계를 비판하고 새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 비평’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애도가 문명 비평과 연관되는 까닭은 세계문학사에 관한 임화의 독특한 시각에서 비롯한다.

임화는 문학에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방식이 문명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중세는 집단 중심의 문명이었으므로, 중세 문학은 개성이 희박하며 집단으로 환원되는 인간을 형상화한다. 조선시대의 양반 사대부 문학이나 서구 중세의 기사도 문학 등에서 인간이 개성적이지 않고 계급이나 계층 등의 집단적 성격으로 표현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반면 개인 중심의 문명인 근대 아래서, 문학은 집단성을 상실한 파편적 개인으로 인간을 형상화한다. 이는 근대 문학에서 인간의 개성이 두드러지지만 그 개성이 사회와 상호작용하지 못하고 시대현실에 무력하게 압도되는 것과 통한다. 

그러나 임화가 생각하기에 중세는 개성 없는 집단성만이 있고 근대는 집단성 없는 개성만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근대의 개인 중심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집단성 중심의 문명으로 회귀하려는 흐름은 제국주의 파시즘의 파국을 낳았다. 임화는 자신이 목격한 일제 강점과 1·2차 세계대전을 중세-근대-파시즘으로 이어진 서구 문명사 전체의 파산으로 진단하며, 집단 중심(중세와 파시즘)으로도 개인 중심(근대)으로도 돌아가지 않는 제3의 문명을 모색하였다.

집단적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중세 문명 아래의 문학이고 개인적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근대 문명을 압축하는 문학이라면, 임화의 시에서 애도하는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은 제3의 새 문명을 드러내는 문학이 된다. 애도하는 인간은 너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되 나의 나다움 안에 너의 너다움을 살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임화의 시를 연구한 뒤로 그의 독특한 사유 덕분에 동학(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더 특별히 주목할 수 있었다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임화가 천도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은 없지만, 개체[人]와 전체[天]를 대등 관계로 바라보는 동학사상은 곧 임화 문학에 나타난 한국적(주체적) 문명론과 통하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의 기억 속에 잠재해 있는 문명 창조의 가능성을 임화의 시는 ‘운명’으로 사유한다. 운명을 긍정하는 임화의 사유는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 자체를 긍정하는 사유로서, 그가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몽테뉴와 파스칼과 괴테를 거쳐 니체로 이어지는 독특한 변증론의 흐름을 재구성한 것이기도 하다. 임화가 그들의 사유를 치열하게 재해석하여 새로운 변증론을 이끌어낸 까닭은 헤겔에서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목적론적 변증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임화가 현해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서 마르크시즘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는 기존 논의에 정면으로 맞선다. 임화의 시는 모든 변화를 단 하나의 목적에 귀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 없이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삶 그 자체를 긍정한다. 일제 말기로 접어들수록 모든 희망과 가치가 점차 사라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가치를 생성하고자 애쓰다가 좌절한 사람들을 애도함으로써, 임화의 시는 특정한 목적 없이도 끊임없이 역동하는 삶의 힘 자체를 아름다운 운명으로서 찬미한다. 생명력이 상실되고 훼손된 인간들을 애도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은 새로운 문명 창조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눈물이 비추는 운명』이라는 책 제목에 담긴 뜻이다.

요컨대 이 책은 슬픔을 수동적 감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 변화의 가능성으로 표현하는 한국시 특유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중세와 근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의 사유를 제시하며, 한국 근대문학이 서구 근대의 모방이자 미달이라는 통념을 극복한다. 이처럼 다각적이면서도 문제적인 작업은 임화의 일제 강점기 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해방 이전의 시인 임화에 관한 단순한 연구서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이 되고자 하는 이 책은 한국문학 연구가 학문적으로 얼마만큼 보편적 가치를 담보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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