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세계를 시야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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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세계를 시야에 담다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0.3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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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학술신간]
- 동북아역사재단,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발간

■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 임상선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91쪽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이영호)은 동북아 지역의 역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기획한 교양서 중 하나인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을 발간했다. 이 책은 『발해고』(渤海考)에서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한 유득공이 청나라 파견 외교사절인 연행사절단에서 수행한 역사전문 외교활동을 검토했다. 1790년 청 고종(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행 사신단의 구성으로부터 출발, 활동, 귀국 보고에 이르는 전체 과정에서 유득공이 한 역할, 18세기 후반 조선이 파악한 청나라 실상과 국제관계, 그리고 정조를 비롯한 조선의 주류 집단이 조선의 미래를 어떻게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확인해 보려고 했다.
 
▶ 유득공은 1748년(영조 24)에 태어나 1807년(순조 7)에 타계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발해고』(渤海考)의 저자로 유명하다. 박제가·이덕무·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4검서(서적의 교정 등을 하던 벼슬)'로 불렸고, 한양의 진보적 북학파 지식인 모임인 '백탑파'와 '사가시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자는 혜보(惠甫) · 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 영암(泠庵) · 고운당(古芸堂)이다. 서얼 출신인 그는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에 제수돼 이후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경도잡지(京都雜志)』·『영재집(泠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盎葉記)』·『사군지(四郡志)』·『발해고(渤海考)』·『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는 조선시대 시민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서적이며, 『발해고』는 그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저서이다. 규장각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장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가 많았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나온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연행사 여정도

▶ 유득공은 역사 전문 외교관으로 1778년 심양(瀋陽)에 다녀온 뒤, 1790년과 1801년 북경을 두 번 방문하는 등 총 3회에 걸쳐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러한 여행은 그의 인식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역사 방면 저술에 많이 반영되었다. 유득공은 발해사가 한국사임을 남북국이라는 논리로 명백히 설명하고, 조선과 청을 넘어 동남아시아, 몽골 등까지도 시야에 담은 국제인이었다. 

유득공이 처음으로 중국 사행에 나선 것은 31세 때인 1778년(정조 2)이다. 같은 해 7월 심양에 있는 능묘를 보러 오는 건륭제를 문안하러 가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윤 6월 26일 서울을 떠났다. 유득공이 당시 얼마나 중국으로의 여행을 바랐는지를 전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유득공은 같은 해 3월, 정사 채제공을 따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던 박제가와 이덕무를 개성에서 만나 “멀고 가깝고 빠르고 느린 것을 왜 묻는가, 어쨌든 압록강만 건너면 되지 않는가”(『영재집(泠齋集)』권3)라는 시를 지었다. 이덕무와 박제가가 사행지인 연경과 심양을 비교하며 놀리자, 유득공이 자신의 심정을 말한 것이었다. 

유득공은 심양 사행의 기록을 『읍루여필(挹婁旅筆)』(『영재집』권7)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는데, 이는 심양이 과거 읍루국이 있던 곳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기록은 서문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 

유득공은 17세기 초 심양의 한인들이 청의 침입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한 결과 변발을 하고 만주족의 옷을 입게 되었던 것인데, 당시 이 지역 선비들이 조선 사신의 갓과 옷을 부러워하는 것은 앞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두 번째는 43세 때인 1790년(정조 14) 5월 박제가·이희경과 함께 건륭제의 팔순절 축하 사절의 일원으로 북경은 물론 열하(熱河)도 다녀왔다. 이 사행의 기록이 『열하기행시주』이다.

유득공은 사행 중 많은 명사들과 교제했는데, 이때 사고전서 편찬을 담당하던 당시 예부상서 기윤(紀昀)의 집(북경 유리창 부근)을 박제가와 함께 방문하였고, 기윤이 몸소 유득공이 머물고 있던 관사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한편, 유득공은 만주족에 대한 한족 인사들의 편견을 비판하였다. 열하에 있을 때 만주 정황기인(正黃旗人)인 복건장군으로부터 흰 부채에 시와 낙관을 받았는데, 이것을 본 연경의 명사들이 좋지 않다고 평하였다. 유득공은 복건장군이 인물됨이 걸출하니 비웃지 말라고 하며 자신은 동단엽기도(東丹獵騎圖)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유득공은 복건장군의 성이 완안(完顔)인 것에서 그가 ‘금나라의 후예’임을 알았을 것이고, 그가 그려준 그림을 동단왕(동단국왕 야율배를 말함)이 말 타고 사냥하는 그림에 비유하며 호감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54세 때인 1801년(순조 1) 주자서 선본을 구해오라는 어명을 받고, 박제가가 참여한 사신단을 뒤쫓아 연경에 다녀왔다. 이때 연경에 두 번째 갔다는 의미에서 사행 기록을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이라 하였다. 유득공은 당시 청나라 문인들과 문답할 때 대부분 한어(漢語)를 사용하고 혹 필담으로 하였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21세의 조강(曹江)이라는 인물이 유득공에게 “그대가 종을 부를 적에는 ‘이융납(伊隆納,‘이리 오너라’의 음차인 듯)’이라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가요” 라고 물으니, 유득공은 “그대가 종을 부를 적에 ‘래아(來啊)’라 하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답하였다. 유득공은 진삼(陳森)이라는 화가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도 받아 왔다. 진삼은 유득공에게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며 돌아보고 웃으며 말을 하라 하고, 이러한 모습의 유득공이 매화 아래 돌에 걸터앉아 글을 보는 초상화(梅花踞石看書圖)를 그렸다고 한다.

▶ 유득공은 ‘남의 신하는 외교를 할 수 없다(人臣無外交)’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타국의 형편을 살피는 것이 사신의 직분’이라 생각하고, 원활한 외교활동을 위해 말과 글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만주족을 비롯한 한족, 몽골, 회회, 베트남, 버마, 라오스, 대만,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의 각 민족과 국제관계에 큰 관심을 갖고, 정보를 수집, 보고했다. 오늘날의 측면에서 보면 역사 전문 외교관이었다.

19세기 후반 국내외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조선의 현실과 미래 인식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실학자들이 청의 발달한 문물과 사상을 본받고, 국제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조(正祖)와 주류 집단은 5∼8백여 년 전 과거 송나라의 정치와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조선에 적용하려고 했다. 유득공은 ‘청나라만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다가오는 서양을 정확하게 알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득공은 천하만사는 지나간 일을 보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있다며, 당시의 천하가 태평하여 모든 지역이 고요하지만, 역대 사건의 변화, 싸움의 강약, 산천의 요새, 성읍의 연혁을 살피고 알아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이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한국고대사 계승 인식』 전근대 편·근현대 편(공저, 동북아역사재단, 2019), 『발해사 바로읽기-발해사 쟁점과 연구』(동재, 2008), 『동아시아의 역사분쟁-한중일 역사교과서의 비교분석』(공저, 동재, 2006), 「732년 발해와 당의 전쟁 과정 재검토」(동국사학, 2020), 「발해 멸망 후 건립된 동단국의 외교 활동」(역사와 교육, 2019), 「고구려·발해 역사의 공동연구를 통한 남북한 동질성 회복 방안」(국학연구, 2007), 「신라시대의 서울지역 경영」(향토서울, 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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