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주의와 기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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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주의와 기회주의
  • 이근세 국민대학교·철학
  • 승인 2021.10.3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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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효율성, 문명의 편견』 (이근세 지음, 은행나무, 148쪽, 2021.09)

 

『효율성, 문명의 편견』은 2014년의 초판 후에 몇몇 수정과 함께 2021년 발간된 개정판이다. 원래 필자는 ‘영웅주의와 기회주의’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었으나, 출판사의 기획에 맞추어야 했고 특히 두 용어에 따라붙는 편견 때문에 현재의 제목을 채택했다. 사실 영웅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걷어낸다면 두 용어는 각각 서양 사유와 동양 사유를 적절히 나타낸다. 

중국 사유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위나 사회 제도는 세계의 운행 질서를 본받아야 한다. 자연의 총체적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근본적으로 효율적일 수 없으므로 전략, 대인관계, 도덕, 제도 등 모든 것은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펼쳐져야 한다. 가장 높은 효능은 운행과 합쳐질 때 이루어진다. 세상의 전체적 힘이 개인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세상의 흐름을 타고 기회에 맞게 나아가거나 물러서는 것이 효율성의 원천이라는 점은 대부분의 중국 사유가 논의의 필요도 느끼지 않은 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전제를 통해 나머지를 이해해야 한다. 반면 서양의 관점에서 세계는 가변적이고 불완전하므로 고정불변의 더 완전한 차원이 상정된다. 완전한 세계를 부정하거나 모른다고 해도 논리나 수학 같은 관념적 법칙이 기준이 된다. 그래서 서구적 효율성은 최선의 계획과 목적을 세우고 강력한 의지로 실천에 옮기는 구도이다. 계획을 구상하는 지성과 계획을 실천하는 행동 사이에 자유로운 의지가 개입되므로 ‘주체’의 개념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국적 효율성의 핵심인 ‘상황’이 발생하여 계획이 무산되어도 서양에서는 기존 계획이 평가를 위한 기준이 된다. 계획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주체의 천재적인 능력이나 영웅적 행동이 요구된다. 서양이 영웅주의와 모험을 찬양하는 이유이다. 영웅주의는 계획 또는 ‘합리성’이 상황에 의해 파열될 때 제시되는 대안이다.

필자는 2010년경 동양철학 강좌를 담당하면서 자료를 수집하던 차에 동서문화철학의 거두인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의 사유를 접했다. 『효율성, 문명의 편견』 초판 발간 후 줄리앙의 저작 3권을 번역 출간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해왔기 때문에 현재의 연구 양상은 꽤 달라졌지만, 당시로서는 4세기 이상 동서양이 교섭해온 복잡한 역사를 몰랐던 필자에게 서양철학자가 중국 고전을 섭렵하고 동서양 사유의 관계를 해명해가는 작업은 지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많은 저작을 입수했고 먼저 읽은 것은 『바깥(중국)으로부터 사유하기』(Penser d'un dehors - La Chine)라는 대담집 형태의 저작이었다. 

『바깥(중국)으로부터 사유하기』, 2000<br>
  『바깥(중국)으로부터 사유하기』, 2000

줄리앙이 중국 사유를 탐구하게 된 이유와 그의 관점을 이해하게 되면서 500여 쪽의 이 대담집에 빠져들었다. 책 한 권이 그토록 시야를 넓혀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서양의 고대와 근대철학은 물론 푸코, 들뢰즈, 데리다, 폴 리쾨르 등의 현대 거장들이 등장하다가 어느새 공자(孔子)를 논하고 손자병법, 한비자, 노자, 맹자가 자연스럽게 만나는가 하면 플로티노스와 왕부지(王夫之)가 비교되고 모택동과 등소평의 정치도 동서문화철학 담론 안에 녹아들었다. 중국에서 전개된 동서양의 교류 역사, 조선후기의 천주교 수용 역사, 동서양 철학사 등을 줄리앙 사유를 매개로 살펴보면서 지금까지 공부해온 많은 것이 연결되었다. 이 책은 줄리앙의 사유를 접하면서 진행한 독서와 강의를 정리한 결과이다.

중국과 서양 두 문명이 각각 지닌 효율성 개념을 앞서 영웅주의와 기회주의로 설명했는데, 각 문명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체화하고 있는 문화적 근간을 프랑수아 줄리앙은 ‘습벽’(習癖, pli)으로 명명한다. 구체적으로 서양과 중국의 습벽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짚어보자. 

 

■ 모델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만개하기 시작한 서양철학은 관념적인 모델을 구상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설정하는 특성이 있다. 그 후에 의지와 행동이 관념적 구상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적용된다. 서양철학은 모델화에 집중한다. 모델화는 관념적 형상(eidos)을 세계에 투영하고 그것을 목적(telos)으로 설정한 후, 의지를 통해 그것을 결정하고 행동(praxis)을 통해 그것을 실현하는 구도이다. 그래서 목적/수단, 이론/실천, 이상/현실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식화된다. 이상과 이론에 가까워질수록 목적에 다가간다. 

모델화는 질문의 대상도 되지 않고 그것을 보지도 못할 정도로 서양철학에 달라붙어 있는 구도이다. 『파이돈』에서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어떤 논의 끝에 얻어진 귀결이 아니라 자명한 것처럼 간주한다. 대화 상대자 역시 당연하다는 듯 이 거대한 주제에 대해 논박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나중에 가서야 영혼 및 영혼의 불멸성과 관련해서 논쟁이 벌어진다. 달리 말하면 내세/현세, 정신/육체 등의 구분은 서양에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합의의 기초인 것이다. 

플라톤에서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는 ‘불멸의 존재’에 시각을 고정하고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이는 불멸의 존재가 지닌 형상과 그 속성들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세계의 질료가 단지 수동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즉 세계는 이데아의 단순한 복사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이상을 향하는 시각은 계속 유지된다.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중도의 이상이 행동의 목표이며 그 완전성은 구현해야 할 규범으로 설정된다. 목적으로 정립된 모델은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이론적 구상을 토대로 결정되는 것이다.

프랑수아 줄리앙, 『이상의 발명과 유럽의 운명』, 2009<br>
        『이상의 발명과 유럽의 운명』, 2009

서양 전통은 이론/실천이라는 습벽에 대해 다양한 변형을 가하기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독교에서 세계는 신의 지성과 섭리에 의해 창조된다. 모든 존재들은 창조를 통해 현존(existence)하기 전에 본질(essence)이 정해진다. 또한 서양근대과학은 수학에 기초한 거대한 모델화 작업이다. 서양 사유는 근대과학을 확립함으로써 수학에서 비롯된 모델화 작업에 막대한 힘을 투입했다. 특히 수학을 언어로 규정하는 중대한 이념을 창출해왔다.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우주를 수학적 언어로 기술된 책으로 보았다. 근대과학의 정립 이후 수학에 기초한 과학의 원리를 모든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서양에서 일반적이다. 결국 공학과 과학기술은 세계를 물질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막대한 힘을 발휘했고 서양이 동양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핵심 기반이 되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근대과학까지 이어지는 모델화 전통이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만들어줌으로써 기술의 차원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과연 그것이 인간관계에서도 타당한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우연적인 행동이 법칙의 보편성을 따르며 단순히 과학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특히 적대적 주체들이 상호대립하고 반응하는 상황 속에서 모델화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전쟁은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서구의 대표적 전쟁이론가 클라우제비츠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실제 전투는 항상 상황에 의한 변수를 마주치게 된다. 모델로서 구상한 절대적 전쟁과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는 현실적 전쟁 사이에는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 때문에 클라우제비츠는 서양이 전쟁을 사유하는 데 실패했다고 강조한다. 전쟁에서 발생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델화와 무관한 천재적 능력 또는 영웅적 행동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서양의 모델화 개념은 모델화와 상반되는 영웅주의라는 다른 개념을 낳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서양 사유에서 모델화와 영웅주의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점이 서구인들에게 확인되는 합리성과 모험주의의 독특한 결합이다. 모델화의 고정성, 모델화를 대체하는 영웅주의가 서양 사유의 습벽이다. 

 

■ 운행

중국 사유는 서양의 습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동요시킨다. 중국 사유는 현실 세계에서 분리되어 있으면서 현실 세계에 형상을 부여하는 원형이나 순수 본질을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 세계는 음양(陰陽)의 상호작용을 통해 조정되는 지속적인 운행(運行)이다. 운행은 현실을 초월한 이상이 아니다. 운행은 내재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그 통행을 한결같이 유지한다. 그래서 현자는 세계가 흘러가는 내적 일관성을 밝히고 거기에 자신의 품행을 일치시키려 할 뿐이다. 중국의 현자는 그리스 철학의 최종 목표인 순수 인식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한쪽에 인식(theoria)이나 관조가 있고 다른 쪽에 행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상/현실, 목적/수단, 이론/실천의 도식은 의미가 없다. 이는 중국 사유가 미숙해서가 아니다. 모델화, 이상, 신 등을 그냥 지나쳐 버릴 뿐이다.   

운행이 중국 사유의 습벽이다. 장자(莊子)가 말했듯이 중국의 모든 논쟁에는 논의되지 않은 것이 있다(在辯者有不辯). 모든 논의와 대립적 입장을 취하기에 앞서 모두가 전제하고 있는 합의의 기초가 운행이다. 운행은 한결같은 흐름(天道)으로서 중국 사유의 대전제다. 서양철학이 존재나 본질 등을 내세우면서 변화를 제대로 설명 못한다면 중국 사유는 변통(變通)을 말한다. ‘변’은 변양(變樣)이고 ‘통’은 지속성이다. 변양은 ‘갈라지는 것’ 또는 ‘바꾸는 것’이고 지속성은 ‘계속하는 것’ 또는 ‘이어받는 것’이다. 두 용어는 대립되지만 서로의 조건이다. 변양 덕분에 운행은 고갈되지 않고 쇄신되면서 지속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속성 덕분에 변양을 거쳐 교통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중국 사유에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어준 것은 계절이다. 변양(變)은 겨울에서 봄으로 또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즉 냉기가 온기로 또는 온기가 냉기로 전환될 때 나타난다. 지속성(通)은 봄에서 여름으로 또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즉 온기가 더 더워지거나 또는 냉기가 더 차질 때 뚜렷해진다. 변양과 지속성 두 차원은 번갈아 뒤를 잇고 서로의 고갈을 막으면서 운행 전체를 유지한다. 모든 것이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은 병법, 유교, 도교, 법가 등 대부분의 중국 사상이 논의의 필요도 느끼지 않은 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전제 같은 것이다.

『효율성 논고』, 1997
                 『효율성 논고』, 1997

운행의 역학에 따라 현자의 윤리적 태도도 정해진다. 현자는 행동 규범으로 추구할 모델을 세우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흐름을 탐색하고 그 진행방향에 자신을 통합시키려 한다. 현자는 서양의 경우처럼 현실 세계에 투영하는 관념적 형상을 구축하거나 행동에 목적을 고정시키지 않고 상황의 잠재력(形勢) 속에서 유리한 요인이 자신을 이끌어가도록 한다. 운행의 흐름에 합류함으로써 자신과 운행의 귀결을 통합하는 것이 지혜의 길이다. 결과를 작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결과를 낳도록 놔두고 결과를 거둬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미리 구상한 계획과 결과 사이에 서양이 강조하는 자유나 의지 같은 주체성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전개과정이 우리 자신을 이끌어 가도록 놔두는 것이 운행에 부합하는 윤리적 품행이다. 

서양 사유가 모델화와 분리 불가능한 영웅주의, 그리고 주체의 행동에 따라 삶의 방향을 규정한다면 중국 사유는 이런 인위적 행동이 운행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한다고 본다. 계획으로 삶을 고정하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효율적일 수 없다. 운행은 이탈하지 않는 지속적인 변화이며 천덕(天德)이다. 변화과정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실려가는 것이 ‘때에 맞게’(時中) 나아가고 물러설 줄 아는 지혜이다. 이 점에서 중국의 전략가도 공자 같은 성인(聖人)도 현명한 기회주의자이다. 불굴의 의지로 계획을 실현해내려는 서양의 영웅주의나 모험주의처럼 고난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흐름에 기대는 자연스러움과 쉬움의 추구, 간단히 말해 개인적 구상을 세계에 강제로 부과하고 세계의 흐름을 바꾸려 하는 대신에, 운행에 의거하는 것이 동양 사유의 습벽이다.

 

■ 동서양 사유의 간극
   
서양에서 모델화의 전통에 따라 미리 지성을 통하여 최선의 계획을 구상하는 것이 관건이라면 중국에서는 관념을 미래에 투영하는 계획을 세우지 않고 현 상황을 평가한다. 『손자병법』 1편의 제목이기도 한 ‘계’(計)는 산정, 평가 등의 뜻이다. 상황을 상세히 살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탐지하며 그 흐름을 따르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고 효율적인 전략이다. 반면 서양 전통에서는 사태가 ‘계획’에 맞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예기치 않은 상황을 타개할 영웅적이고 천재적인 능력을 요구한다. 거의 모든 헐리우드 액션 영화는 이런 도식을 따르고 있다. 필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기시감이 들었다. 이 영화 서사의 근간에 계획 개념의 근본적인 패착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가 유행을 했는데, ‘계획’이라는 단어에 집중하면서 다시 영화를 살펴보기를 권한다. ‘계획’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차례 등장하고 ‘가장 좋은 계획은 무계획’, ‘기세’ 등 『손자병법』을 집약한 듯한 용어들이 중요하게 사용된다. 아마도 모델화와 영웅주의에 기초한 헐리우드 영화의 틀에서 절묘하게 벗어난 서사 구조가 <기생충>의 성공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서양 사유에서 계획의 기능은 목적 개념이 관념적 형태와 연동한다는 데 기인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모델/형상과 목적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참나무의 관념이 도토리를 자라게 하듯이 목적원인은 생성을 자기에게 끌어당긴다. 유대/기독교에서도 인간은 천국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반면 중국에는 ‘목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을 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사유는 목적 대상을 정해놓고 수단을 강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상황을 장치로서 활용하는 사유이다. 즉 상황의 흐름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고정된 목적을 정하지 않고, 주어진 배치 상황을 활용함으로써 그 귀결로서 결과물을 거둬들인다.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는 우회적으로 성숙을 돕되 억지로 결과를 쟁취하려 하지 않는다. 서양 전통의 고난 예찬과 달리 중국 전통에는 쉬움의 예찬이 있다. 현자는 쉬움의 단계에서 일을 처리한다. 반면 서양에서 효과는 어려움에 비례한다. 영웅은 큰 고난을 겪고 나서야 큰 성과를 올린다. 자연스럽게 결실을 거둬들이기보다는 쟁취해내고 쉬움이 아닌 고난을 예찬한다.

『존재에서 삶으로: 사유의 유럽-중국 용어집』, 2015
『존재에서 삶으로: 사유의 유럽-중국 
용어집』, 2015 

서양 사유에서 도덕은 자유의지와 행동을 요청한다. 지성이 계획한 것을 의지를 통해 실천하는 것이 도덕이다. 또 이론/실천의 관계이다. 지성의 관념적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의지의 결단이 이루어지고 구체적 행동이 투입된다. 인식/지성과 의지/행동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항상 모종의 인위성이 요구된다. 행동은 일시적이고 지엽적이며 주체를 명시적으로 지시하기 때문에 사태의 흐름에서 분리된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눈에 띄는 극적 특성을 가지며 영웅주의와 서사시의 주제가 된다. 이처럼 지성과 의지, 이론과 실천의 구분은 서양 사유의 독특한 결합인 합리론과 영웅주의의 관계를 다시 드러낸다. 반면 중국 사유는 행동이 아니라 상황의 고요한 변화 또는 숙성에 의거한다. 변화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운행을 따른다. 변화는 주체를 명시적으로 지시하기보다는 영향을 통해 주변에 스며들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과정 자체가 아닌 그 결과만을 확인한다. 고요하게 싹이 자라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어느 날 우리는 커져있는 식물을 발견한다. 『맹자』의 ‘조장’(助長) 이야기를 상기하자. 빠른 성장을 위해 싹을 잡아당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절차를 방해하는 일이다. 식물은 숙성할 상황에서 자연스레 성장하므로 개입을 지양하고 잡초를 뽑아주거나 김매기로 보조하면 된다. 싹의 성장은 상황 속에, 즉 땅속의 씨앗에 들어있다. 의지와 행동을 통해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것보다는 싹이 저절로 성숙하게 두면 된다. 숙성의 사유를 도덕에 적용해보자.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상황의 잠재력을 얻을 필요가 있다. 백성이 바라는 것은 선(이익)이므로, 세금과 노역을 줄이고 믿음을 주면 다른 나라의 백성과 경쟁자조차도 스스로 우리의 편이 될 것이다. 도덕은 외형적으로 눈에 띄는 극적 행동과 달리 시원적인 단계에서 은미하게 스며들기 때문에 저항을 일으키지 않는다. 중국 사유는 우회적으로 성장을 활성화하는 농경 사유이기 때문에 서양의 영웅시나 서사시에서처럼 행동을 극화(劇化)하지 않는다. 


   
■ 동서문화철학의 과제

영웅주의와 기회주의를 통해서 『효율성, 문명의 편견』의 대강을 살펴보았는데 오해하면 안 될 사항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문화를 유사성이나 차이에 따라 특징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동서문화철학의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과 서양을 맞대면시키려면 이국적 취향에 의한 관심, 각 문명의 본질을 내세우는 민족중심주의, 그리고 양자 간의 공통점과 차이를 찾는 단순비교를 통해 접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문화 간 맞대면을 철학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각 문화를 맞대면시킴으로써 서로 간에 부재한 것을 드러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 책에서 다룬 중국과 서양의 사유를 다루는 방법은 양자가 갖지 않은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각 입장에 설명 없이 전제된 ‘습벽’을 드러내는 것이다. 두 사유를 자신의 문화적 습벽을 새롭게 자각하도록 이끄는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왜 하필 중국과 서양인가? 첫째, 중국은 서양철학에게 그토록 중요한 인도유럽어의 구문론 및 어원과 단절함으로써 인도유럽어의 전통에서 빠져나오도록 해준다. 둘째, 중국은 역사적 영향의 차원에서 서양과 단절된 문명의 맥락을 제공해준다. 셋째, 중국 사유는 오래 전부터 텍스트를 통해 명백히 표현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럽 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도, 텍스트 문화가 부족한 아프리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럽에 전해준 아랍이 아닌 중국이 서양철학을 새롭게 읽기 위한 ‘바깥’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 역시 서양의 외부이다. 다만 한국은 중국 사유의 “보관소”로 간주될 정도로 중국 사상 일반을 흡수했고 일본 사유 역시 중국 문자, 불교, 유교 등을 중국으로부터 전수받았기 때문에 중국 사상의 영향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럽과 중국은 각기 고유한 학문적 체계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영향 관계에 있지 않은 두 ‘바깥’으로 간주될 수 있다.

두 사유 체계에 서로 부재한 것을 포착하여 각자의 습벽을 드러내는 접근법은 단순히 타자성이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타자나 차이라는 것은 이미 나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개념이다. 차이는 더 일반적인 동일성을 가정한다. 즉 차이는 이미 공통된 종류의 것을 가정하고 그 안에서 특수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차이는 같은 틀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문화들을 철학적으로 맞대면시키기 위해서는 문화의 일반성을 전제하고 차이를 하위의 특수성으로 간주하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성, 인간 본성 등의 보편적 개념이 먼저 전제되듯이 공통된 단일 문화가 우선 존재하고 세계 곳곳에 그 단일 문화의 변용으로서 다양한 문화들이 펼쳐져 있다는 편견 말이다. 오히려 서로 모르는 것들은 차이도 대립도 없다는 점에서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요컨대 ‘바깥으로부터의 해체’를 통해 각 입장의 기준, 각 사유의 다른 틀 또는 습벽을 드러냄으로써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시작해야 한다. 습벽은 수평을 잡는 굄목과 같다. 우리는 굄목에 기대어 끊임없이 사유의 균형을 유지하지만 바로 그 안락함 때문에 사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한 문화권의 사유가 스스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쉽게 타성에 젖는다. 문화적 타성은 내가 항상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 덕분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체취를 맡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화적 안락함에서 빠져나오고 자신의 타성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 이질적인 문화들 간의 맞대면이다. 서로를 비춰볼 때 각자는 자신과 거리를 두고 사유할 수 있다. 
 
동서문화철학의 과제는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 것이다. 문화적 습벽들 사이의 간극을 창출하고 굄목을 동요시킴으로써 이제까지 사유하지 못했던 것을 사유할 때 철학은 재가동한다. 나를 다시 보게 해줄 때까지 바깥을 읽어야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차이와 무관하던 바깥이 차이가 되며 차이는 맞대면의 구성과 함께 드러난다. 바깥이 차이가 될 때 나와 타자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해진다. 
 
동양과 서양은 언어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문화일 뿐 아니라 각자의 사유가 텍스트를 통해 일관성 있게, 즉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쪽의 개념을 가르는 세부적인 주제들은 무한정하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를 보려는 일은 끝이 없다. 나와 관련된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주제는 동서 문명 전반에서 일관성을 갖추고 지극히 다양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개별 주제들은 동서문화철학적 접근을 위한 풍부한 재료로 계속해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근세 국민대학교·철학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교 철학고등연구소(ISP)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모리스 블롱델의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브뤼셀 통‧번역 대학교(ISTI)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동서문화철학, 서양근대철학, 프랑스철학이다. 주요 저서로 『철학의 물음들』(2017), 『효율성, 문명의 편견』(2021) 등이 있고, 역서로 『스피노자와 도덕의 문제』(2003), 『변신론』(2014), 『전략: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중국까지』(2015), 『데카르트, 이성과 의심의 계보』(2017), 『스피노자 서간집』(2018),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2020), 『탈합치』(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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