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권력, 권력숭배 종교 비판담론의 결정체로서의 구약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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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권력, 권력숭배 종교 비판담론의 결정체로서의 구약성서
  • 김회권 숭실대·성서신학
  • 승인 2021.10.3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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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 (김회권 지음, 박영사, 761쪽, 2021.09)

 

인류의 주요종교들의 경전이자 종교비판담론의 결정체로서의 구약성서

구약성서는 서른아홉권의 책을 묶어 만든 책이다. 장르도 다양하며 저작자, 저작시기, 그리고 주제도 다양하고 다기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단어가 서른아홉 권을 관통한다. ‘하나님.’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니체와 하이데거가 때려 부셨던 형이상학의 구름 위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인류역사의 한복판, 난민들, 노예들, 고아와 과부 등 지상권력 엘리트들에게 부단히 시달리는 주변화된 인간과 압제당하는 피조물 한복판에 존재하는 ‘역사참여적 신’이다. 특이하게도 구약성서는 약 30억의 인류가 신봉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통으로 존숭하는 경전이다. 구약성서가 특정종교집단이 신봉하는 경전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구약성경은 종교문서로 폄하되고 환원되기에는 아까운 인류의 고전이다. 참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구약성서는 종교권력 혹은 상부지배층 집단의 일원으로 봉사하는 상부구조의 주축인 권력기생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권력비판 담론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 세 종교집단은 구약성서가 자신들의 종교권력 기반을 해체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선민지위, 자신들의 배타적 구원론을 전개하기 위해 구약성서를 취사 선택적으로 인용하거나 인증하고 있다. 16세기 유럽역사를 격변으로 몰아넣은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정치경제권력의 신화화에 맞선 마틴 루터나 캘빈의 성서읽기 시위였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권력정치와 구원매매 장사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 나사렛 예수, 그리고 신약의 사도들의 명명백백한 하나님 담론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권력화된 종교, 혹은 압제적 정치경제지배체제를 승인하고 그것과 동맹하는 종교권력은 성서의 메시지에 의해 장마비에 무너지는 토성 처지에 놓여있다.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는 예언자들의 권력비판 담론이라는 관점에서 구약성서 서른아홉 권을 톺아본다.

구약성서에 고전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지성사회의 편견에 맞서서

구약성서가 인문고전이 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인류의 모든 고전들이 다루는 주제들(인간성 통찰, 인간운명 평가, 세계의 시원과 궁극적 지향, 인류사회를 지탱하는 보편적 덕과 법에 대한 탐구 등)을 구약성서가 핵심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구약성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원시적인 선민사상에 채색된 황당무계한 주장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읽기에 그친 사람들의 인상비평일 뿐이다. 둘째, 구약성서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산출되었으나, 세계의 인류역사와 문명진보에 끼친 영향력이 이미 검증된 보편적인 책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인류의 문명사, 법제사, 사상사에 끼친 영향은 다대하다. 셋째,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인간존엄을 옹호하는 인문학의 창발점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산출되던 당시의 모든 고대문명 국가들은 오로지 왕만 ‘신의 형상’이라고 주장했고 신봉했다. 왕에게 지배당하고 세금을 바치는 농민들은 신의 형상 담지자로서 결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첫 인간 아담을 왕이자 땅을 경작하는 농민으로 규정한다. 땅을 경작하는 농민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버금왕(副王)이라는 것이다. 농민 아담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왕이라는 사상이다. 여기에는 맹자사상보다, 정약용보다 더 급진적인 농본사상이 깃들어 있다. 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이유 때문에 구약성서를 종교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부당한 편견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인류의 고전으로 혹은 철학으로 인정받는 사례들

그래서 이 책은 구약이 다른 어떤 고전보다 더 고전적인 의미의 고전이라고 주장하며 서른아홉 권의 책을 개관하고 해설한다. 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가 고전이듯이, 신의 계시에 의해 자신의 철학을 개진한다고 주장한 파르메니데스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고전이듯이, 이스라엘의 민족수호신 야웨의 맹활약이 돋보이는 구약성서 또한 고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 등장해 주인공 역할을 맡은 야웨 하나님이라는 존재 때문에 고대 히브리인들이 남긴 구약성서를 인류에게 보편적인 교양과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하는 고전의 자리에서 배제하는 것은 부당하다.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수호신으로 자임하는 야웨 하나님은 언뜻 보기에는 이스라엘을 편애하고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맞서는 이방인들에게 엄청 가혹한 부족신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지극히 피상적인 인상비평일 뿐, 구약성서 본문 어디에서도 지지받기 힘든 오도된 통설이다. 구약성서의 신, 야웨 하나님은 철저하게 체제 전복적이고 권력 비판적이고 약자 옹호적인 하나님이다. 구약성서 39권 전체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이고 자기복무적인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특정한 민족의 이름이지만 실상은 이 지상의 절대적 압제자들이나 강자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겨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는 난민을 대표하는 자이며, 안식도 빼앗긴 채 강제노동을 강요당하는 ‘노예’를 대표한다. 구약성서를 산출한 이스라엘의 조상은 난민과 노예였으며, 구약성서 전체는 삶과 문명의 벼랑 끝에 추방된 난민과 노예와 친히 언약을 맺으셔서 역사의 중심무대를 장악한 압제자들과 요새화된 성읍의 지배자들을 무찌르시고 해체하시는 권력 해체적이고 체제 전복적인 하나님을 내세운다. 그래서 이 책은 종교적 교리가 포장하기 이전의 구약성서 본문 안에 밝히 드러나는 이 야생적이고 원시적이고 순수한 야웨의 민낯을 드러냄으로써 구약성서가 어떤 점에서 인류의 고전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의 가치

앞서 말했듯이, 구약성서는 특정 종파 또는 특정 종교의 경전이기 전에 인류 전체에게 선사된 고전이다. 고전이라는 말은 특정 지역 또는 특정 시대, 특정 문명의 모태에서 태어났지만 인류 전체에게 사랑받는 검증된 지혜의 책이다. 이 점은 구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은 고대 근동 문명의 모태에서 형성된 책이다. 적어도 세계의 주요 종교들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구약을 경전 혹은 준경전적 권위를 갖는 책으로 존숭한다. 그래서 구약은 특정 종교인들이 특정 교리를 뽑아내는 경전으로 사용될 여지가 있다. 우리는 성서에 대한 특정 종교적 읽기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읽는 방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인문고전으로서 성서를 읽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 읽기가 가능한 만큼 인문고전적 읽기도 가능하다. 

성서는 구약 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이 스물일곱 권으로 된 신약보다 네 배 이상 분량이 많다. 통속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구약은 주로 분노하고 징벌하는 하나님 이미지와 연결되고 신약은 인간과 화해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보다는 신약이 더 쉽게 읽힐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신약은 나사렛 예수 중심으로 짜여진 단일 서사구조로 되어 있으며 구약은 장강대하처럼 본류와 지류가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복합적 서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사적 풍요로움을 기준으로 삼자면 구약성서가 훨씬 더 재미있는 인문고전처럼 읽힐 수 있다. 구약은 창세기부터 이스라엘의 종말과 미래 운명까지를 다루는 미완성 드라마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들과 기타 철학적 궁극 질문이 제기되고 다뤄진다. 반면에 신약성서에는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 독자적인 서사구조가 없다. 신약성경은 만일에 구약성경이 없다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단절된 언어에 불과하다. 신약은 구약의존적이고 구약계승적, 그리고 구약성취적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코란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창세기가 다루는 시작드라마가 없다.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까지 모두 다 구약성서에서 시작되었다. 코란에는 특별히 독자적 창세기나 출애굽기 같은 장편 대하 역사구원 드라마 서사의 시종이 없다. 예를 들어서 시작, 끝, 인간의 창조기사 등이 다루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어떤 독자적 응답에 해당되는 서사 구조가 없다. 코란은 구약성서를 그대로 인용하거나 인증(引證)한다. 결국 구약성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 모두가 경전으로 삼는 책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구약성서는 오히려 인류에게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세 종교를 이성적인 대화 테이블로 합류시켜서 서로 소통하게 만드는 에큐메니칼(ecumenical)한 플랫폼과 같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가 자신의 독특한 교리를 전파하려고 하는 경우 그런 교회를 ‘복음전파적인 교회’(evangelical church)라고 부르며, 반면에 자신의 독특교리체계의 전파나 제도적 교세 확장보다는 세상의 공통선(민주주의, 생태계보호, 정의, 평등, 자유 등)을 추구하는 데 힘쓰며 심지어 이 과정에서 타종교 사람들과 그리고 종교 없는 사람들과도 광범위하게 협력하는 경우 그런 교회를 에큐메니칼 교회(ecumenical church)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에큐메니칼한 교회를 지지하는 한 가지 방식이 구약성서를 인문고전으로 읽는 방법을 시범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시종일관 어떤 점에서 구약성경이 특정종교의 파당적, 호전적 종교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책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선사된 열린 고전인가를 증시(證示)하려고 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독특성과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참 뜻

지난 십수 년에 경남 고성, 하동, 전남 여수, 강원도 양양 등지에는 한반도 중생대 백악기 때 살았던 공룡의 뼈들, 공룡 알, 또는 공룡의 유해들이 발견되었다. 세계 3대 공룡 서식지로 알려진 고성에는 공룡박물관 등 여러 전시관이 있다. 거기에는 공룡의 활동을 보여주는 지질학적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 현존하는 어떤 동물도 감히 남길 수 없는 큰 보폭을 가진 발자국들이 바위에 자세히 암각되어 있다. 그 보폭의 크기, 굵기 등을 볼 때 다른 나라에서 나온 공룡 발자국과 똑같은 발자국임을 알 수 있다. 뉴욕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공룡 발자국과 우리 한반도의 공룡 발자국이 거의 같다. 이 유물은 한반도가 중생대 때 공룡이 집단으로 서식했던, 또는 살았던 거주지인 것을 드러냈다. 고생물학자들이나 지질학자들은 이렇게 분명한 공룡발자국을 가지고 있는 공룡의 집단 서식지를 중심으로 특정지역에 공룡이 살았는지 살지 않았는지를 판단한다. 이때, 공룡의 발자국이 목적지향적으로 뚜렷이 암각된 지역이 기준이 된다. 공룡의 잔해물들 또는 유해들이 분명히 남겨진 지역이 다른 지역에도 공룡이 나타났는지 나타나지 않았는지를 판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고생물학자들은 공룡의 발자국이 뚜렷이 찍힌 지역들을 중심으로 공룡학을 전개한다.

이 공룡발자국 비유에 기대어 말하자면 이스라엘 역사 또는 이스라엘 역사를 담고 있는 구약성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자의 발자국이 뚜렷이 찍힌 역사적 암각 자료와 같다. 여기서 기독교나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미 중립적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십중팔구 ‘하나님’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지난 인류의 역사, 특히 기독교나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이 관련된 역사에는 ‘하나님’은 평화의 적, 인류의 분열자와 갈등촉발적 절대자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란 말을 친숙하게 언급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독선적이고 파쟁적이고 투쟁적이고 호전적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역사, 고대 근동의 역사,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 등 모든 종교 개입적 인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관여된 모든 종교들의 극단적 폐해들을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종교가 개입되기 전에는 평화로웠던 마을이 종교가 개입되고 나서 분쟁과 전쟁, 또는 분열의 지역으로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마틴 부버(Martin Buber)라는 유대인 신학자는 “하나님 그 단어는 유혈 낭자한 언어, 피가 묻어 있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놀라운 사실이 있다. 성경에서는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누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언급하는가? 우리는 이 단어가 쓰이는 맥락을 자세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의 입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들려있는가? 권력자의 입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들려있을 때와 그 권력자에게 학대당하는 지극히 연약한 자들의 입에 하나님이 언급될 때는 ‘하나님’이라는 뜻 자체가 전혀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는 절대적 압제권력을 정당화하는 자라는 말이요, 후자의 경우에는 압제적 권력자를 부서뜨리는 체제전복적 권능을 함의한다. 힘을 가진 자, 지배자, 압제자, 독재자 등 권력을 남용하는 자의 입에 하나님이라는 언어가 들어갔을 때, 그 하나님이라는 언어는 유혈 낭자한 파괴적인 우상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하나님 언급, 하나님 언명은 체제비판적, 권력비판적 맥락에서 이뤄졌다. 사악하고 불의한 압제자들의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빼앗아 민중의 입에 되돌려준 사람들을 구약성서에서는 예언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미래 일을 미리 예고하고 말해주는 길흉화복 선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즉 하나님이 대변하는 가난한 피억압자의 자리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권력자의 권력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하기 위하여 예언자들이 썼던 언어가 바로 하나님이었다. 이때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최후 보루요 보증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언자들은 지상에 살아있는 권력자들의 권력을 해체하고 남용된 권력을 바로잡기 위하여 하나님께 호소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배자, 압제자에게 짓밟힌 사람들의 입에서 언명될 때 참된 하나님 역할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라는 언어가 피억압자, 가난하고 학대당하는 자의 입에 담길 때 그 단어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언어가 된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단 한 번도 다른 맥락에서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서는 이 낱말이 누구의 입에 들려져 있는가를 자세히 주목한다. 성서는 시종일관 압제자, 권력자, 지배자, 또는 갑의 관계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경계한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고 경고한다.

구약성서는 압제적 권력을 해체하고 비판하는 맥락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썼던 사람들을 예언자들이라고 말한다. 구약성서는 이런 예언자적인 저자들에 의해 쓰였다. 예언자들은 살아있는 절대 권력자들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빈민들, 고아와 과부, 난민들, 즉 사회적 약자들을 옹호할 때 하나님이라는 언어를 썼다. 인문학적 성서읽기의 가장 핵심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예언자의 입에 다시 되돌려 놓는 읽기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절대로 종교권력자들이 함부로 남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는 점을 부단히 상기시키는 것이 인문학적 성서읽기의 또 다른 과업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의 주지는 인문고전인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참된 의미를 알자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예언자들의 입에 들렸을 때, 그것은 인권옹호의 보루가 되었고 체제전복의 보루가 되었고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언어적 무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가자는 것이다. 구약성서 전체에서 무릇 하나님이란 말을 쓰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자기해체적이고 자기부인적인 맥락에서만 하나님이라는 언어를 썼다는 점을 부단히 상기하자는 것이다. 만일에 하나님이라는 언어를 쓰면서 자기이익을 담보하고 자기이익을 취하려고 한다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배반하는 일이다. 그런 목적을 갖고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호소해도 하나님 임재나 현존을 확보할 수 없다. 자기복무적 관점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썼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헛되이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헛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현존을 매개하지도 못하는데 마치 하나님을 언급함으로써 말하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 모종의 친밀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래서 기독교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어떤 맥락에서 쓰는지 또는 성직자, 사제, 주교, 교황 등 모든 종교인들이 절대자의 이름을 어떤 맥락에서 쓰는지 세상 사람들은 세심하게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쓰면서 자기 권력, 자기 기득권, 자기 이익을 사수하려고 할 때, 그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미 우상화된 하나님일 뿐 참다운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집트 압제자 파라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압제자 파라오 밑에서 혹독한 고난과 압제를 받았던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시다. 히브리 노예들은 자유와 인권은 빼앗겨도 하나님이라는 언어를 빼앗기지 못한다. 자유와 인권 등 모든 존귀한 것들을 다 박탈당해도 하나님은 빼앗길 수 없다. 어떤 절대 권력자가 가난한 과부나 농민의 자유, 생존권, 존엄성 모두를 다 강탈한다고 해도 그의 입술에 불려지고 그의 심장에 새겨진 하나님을 강탈할 수는 없다.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면 그 가난한 자의 입에 담겨 불러지는 하나님도 멸시를 당하는 셈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을 향한 권력자들의 공격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공격이다. 이런 일은 출애굽기 1-12장에서 사실 그대로 일어났다.

이집트의 군주 압제자 파라오는 온갖 불의한 명령과 포고령 등으로 히브리 노예들의 삶과 행복을 처참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유대인, 히브리인 노예들을 압제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절대권력이 있었지만 그 권력을 순식간에 무로 만들어버리는 하나님이라는 언어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파라오의 언어가 아니라 모세의 입에 들린 그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해방의 무기가 되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함부로 언급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 하나님 이름이 들려지기를 원하신다. 고아와 과부, 난민과 노예,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살아남으며 투쟁했고 또한 불의와 맞섰다. 인문학적 성서읽기의 핵심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특정종교, 특정종교 권력자, 특정 국가체제를 떠받치는 어떤 기득권 동맹에 들어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가 말한 상부구조의 이념적 동맹언어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본주의 체제에 노동자를 압제하는 그런 권력체제에 기생하는 상부구조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노예제를 떠받치는 제국주의 시대에 왕실을 후원하는 기독교 신학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거룩하신 절대타자이시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 세상의 부당한 권력들과 부당한 체제 아래서 신음하는 노예들과 당신을 일치시키신다. 그래서 이런 전복적이고 매우 생활밀착적인 하나님을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서읽기 또는 인문고전으로서의 성서읽기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결론 -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의 의의

구약성서를 인문고전으로 읽는 최대의 목적은 구약성서를 특정종교의 교리적 농단과 자기복무적 해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다. 인문고전으로서 구약성서를 읽는 이 시도는 특정종교의 종교권력 절대화를 해체하고, 교파주의와 종파주의 읽기를 극복하는 데 있다. 인문고전으로서 구약성서를 읽는 이 접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시범을 보여준 하나님 본마음으로 구약성서를 읽는 것을 계승한다. 그것의 당면목적은 모든 인류에게 구약성서의 메시지가 왜곡됨이 없이 전달되도록 하는 데 있다. 

인문고전은 오늘날 무시당하고 주변화되는 ‘인문학’의 남상(濫觴)이요 원천이다. 인문학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학문이다. 특별히, 거대한 권력체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개인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누가 파괴하는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죄악된 행동이 인간 존엄성을 파괴한다. 즉, 개인의 인간 존엄성 파괴의 제 1주범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소설이 암시하듯이, 불행한 환경에 노출되어 자란 개인의 경우 그의 뒤틀린 심리가 자신을 파괴한다. 알콜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 등 모든 중독자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파괴한다. 심한 폭력에 자아가 파괴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세력은 나의 자아 밖에도 있다. 압도적으로 비대칭적 힘을 가진 강한 자가 나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비대칭적 힘을 가진 직장 상사나 강한 자가 나의 존엄을 파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경우 편의점 주인이 갑질을 일삼고 임금을 체불하고 규정노동보다 더 많은 양의 노동을 시키며 수시로 희롱을 일삼는 경우, 존엄이 파괴된다. 

이 외에도 나를 겨냥하지는 않으나 시대가 추종하는 각종 유행, 음식 유행, 취미 유행, 광고, 즉, 대중문화. 내가 나의 존엄을 의심하게 만드는 거대한 소비 트렌드, 대중문화, 광고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이러 이러한 것을 못하면 나는 불행하고 부족한 사람인가?’라며 위축감을 심어주는 대중주류 문화는 우리 존엄을 손상한다. 이런 문화적 공세가 자신의 존엄성을 파괴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자신의 자존감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세상 사람 중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적 명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 생각대로 존재하지 못하고 생각의 70%로 축소된 영혼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회사의 부장일 경우,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상사로 인하여 회사 일에 관해 직장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못하는 경우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는 데 실패한다.’ 양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 채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를 억지로 행하여야 하는 사람은 인간존엄을 파괴당하는 셈이다. 자신의 생계가 걸린 직장의 조건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엄은 70% 축소된 영혼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회사원일 때 위의 압력에 의해 나의 의견을,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다시 말해, 생계가 걸린 직장의 조건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인간은 사회에서 70% 존엄성이 축소되거나 강요되거나 찌그러지도록 요구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찌그러지도록 요구된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인문학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굉장히 중요하다.

인간 존엄성은 데카르트적 명제를 경험하는 사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사람이 누려야 할 천부 불가양 권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행동할 자유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자유롭게 의사 결정할 수 있는 자유,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자유, 생계의 위험을 걱정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 존엄성의 중핵이다. 자유를 통해 향유되는 이 인간 존엄성을 옹호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래서 인문학적 성서 이해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전제 아래 인간은 하나님에게만 절하며 그 외에 것에는 머리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는 진리를 가르친다. 인문학은 우리를 창조하신 사랑이 많고 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구에게도 굴욕적으로 머리 수그려 절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갑질을 견디지 못한다. 노예처럼 부리는 사람들을 보고 견딜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하나님 외에,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는 모든 권력은 악한 것이라는 저항감이 우리들의 DNA, 모세혈관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은 생각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에 의해 향유되고 표현된다. 생각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는 어떤 권력자나 압제자 앞에서도 양심이 위축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리킨다. 즉, 생계문제가 내 양심을 파괴하지 않도록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문고전으로 구약성서를 읽는 것은 보통 교회가 가서 구원받으려고 읽는 성서 이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문학적 성서 이해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특정 종교, 특정 교파, 특정 종파, 특정 제도권 교회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성경 읽기에 속박되기 쉽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의 모든 교회 다닌 사람들은 중세 로마 교황청처럼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도된 성경 읽기에 속박되었다. 이를 제도 권력, 제도권 종교 권력을 정당화하는 성경 읽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에 맞서는, 부당한 제도권 종교 권력을 가진 목사에게 맞서는 방법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 인문학적 성서 이해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모든 거짓된 종교의 권력도 저항할 수 있는 읽기가 인문고전으로서의 성서읽기이다. 이것은 특정 교파, 특정 교회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맹목적 읽기, 인간의 존엄을 손상시키는 종교 권력의 부당한 읽기에 맞서는 읽기다. 

이런 의미에서 인문고전으로서의 성서읽기는 한국교회에도 꼭 필요하다. 이런 성서읽기가 사제나 목사에게 해가 되는가? 아니다. 인문고전으로서의 성서읽기는 특정한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며, 부당하게 부풀려진 종교 권력을 비판하고 미신적, 맹목적으로 추종되는 교리를 비판하는 읽기이며, 한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짝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는 제도권 권력자들의 성경 읽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와 캘빈의 성서 읽기, 1933년부터 1945년 9월까지 나치의 만행과 나치의 교만한 신성모독적인 인류 대학살 범죄에 맞서서 성경을 읽었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성서 읽기 등이 인문고전으로서의 성서 읽기를 실천한 실례들이다. 

창세기 1:26-28은 인간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로 정의한다. 골로새서 1:13-15은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하나님 형상 회복이라고 규정한다. 로마서 8장 29절도 구원을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모방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한다’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인문고전으로서의 성서읽기는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말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공통어로 번역하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에서는 여타 인문고전이나 사상, 철학들과 구약성서의 통섭적 대화가 부단히 시도되고 있다. 고대근동 문헌들, 호메로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홉스, 헤겔, 칼 마르크스, 에드워드 카 등 인간의 존엄을 옹호하고 인류역사의 진보에 희망을 품은 사상가들의 글과 구약성서를 교직시키는 논의를 다수 포함시켰다. 


김회권 숭실대·성서신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구약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김회권 목사 청년 설교 1·2·3·4』,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2』, 『하나님의 도성, 그 빛과 그림자』,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성서주석 이사야 I』, 『현대인과 성서』(공저), 『하나님 나라 복음』(공저) 등 다수가 있으며, 『현대성서주석 시리즈』 중 『신명기』, 『열왕기상·하』, 『예레미야』, 『아가』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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