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 월연대…물 위에도 물 아래도 달빛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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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월연대…물 위에도 물 아래도 달빛 어려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3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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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 경남 밀양 월연대

 

                                    밀양강 너머에서 본 월연대 일원. 국가지정 명승 제87호다.

밀양강변 용평로를 달린다. 가로수는 지난해 가을보다 풍성한 모습으로 만추를 향해 온 몸을 흔들고 있다. 잠시 후 길이 절반 너비로 좁아지면서 편자 모양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옆구리를 스칠 것만 같은 좁은 터널을 엉금엉금 달리면, 구원처럼 하늘이 잠깐 열렸다가, 다시 어둑어둑 이어진다. 터널 길은 1905년에 놓인 경부선 철길이었다. 1940년 철길은 이설되었고 이후 도로가 되었다. 터널을 빠져 나오면 교행(交行)의 차례를 기다리는 차들이 인내심 있게 서있다. 그 너머로 밀양강과 단장천이 고요히 합수하고 활주로처럼 허허로운 강변 공원이 펼쳐진다.  

 

                                      용평터널 옆으로 월연대로 가는 두 길이 있다.
                  원래 경부선 철길이었던 용평터널. 지금은 월연터널, 백송터널이라고도 부른다.

터널은 밀양의 작은 진산이라는 추화산(推火山)의 동남 벼랑을 관통한다. 벼랑 위 산기슭에 오래된 기와집들이 단단하게 앉아 있다. 터널이 뚫리고 기차가 지축을 울리며 달렸던 때보다 훨씬 이전에 지어진 집들이다. 터널 옆으로 산기슭을 오르는 시멘트포장의 비탈길이 있고, 강섶에는 수직 벼랑에 걸쳐진 오솔길이 있다. 우체부 아저씨는 비탈길을 다르르 오르고 나는 오솔길을 걷는다. 조금 넉넉한 잔도다. 수목들은 푸름과 갈 빛이 뒤섞여 있다. 푸름이 머리 위에서 차르르 빛나고 마른 색색의 이파리들은 다져진 흙길 위에서 사각거린다. 곧 높다란 축담 너머 살짝 솟은 지붕이 보인다. 그리고 솟을대문과 협문이 비밀처럼 나타난다.  

 

                            월연대로 가는 오솔길. 밀양강과 추화산 벼랑 사이 오붓한 길이다.
                 석축 너머 쌍경당의 지붕이 살짝 보이고 솟을대문과 협문이 비밀처럼 나타난다.

이곳은 조선중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월연(月淵) 이태(李迨)가 은거했던 곳이다. 그는 한양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외가인 밀양에서 자랐다. 중종 5년인 1510년 문과에 급제했고 기묘사화가 일어난 1519년에는 함경도 도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세상은 그를 ‘기묘완인(己卯完人)’이라 했다. 몸과 명예, 그 어느 것도 다치지 않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뜻이었다. 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김안로(金安老)가 병풍에 글씨를 써 줄 것을 그에게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내 팔이 어찌 권세 있는 사람 집의 병풍으로 인해 더럽혀질 수 있겠는가”하고 거절했다 한다. 

 

                         축대 앞에 서면 좁고 낮은 협문 속에 월연대 현판이 올려다 보인다.
                         월연대. 매월 월주가 서는 보름마다 이곳에서 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쌍경당. 월연 이태가 기묘사화를 피해 낙향하여 지은 건물로 ‘강물과 달이 함께 밝은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는 뜻이다.                        

아주 오래전 이곳에는 월영사(月影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벼랑 아래는 월영연(月影淵)이라 불렸다. 이태는 이곳으로 돌아온 이듬해 옛 절터에 쌍경당(雙鏡堂)과 월연대(月淵臺)를 짓고 스스로 ‘월연주인’이라 칭했다. 오솔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기와지붕이 쌍경당이다. ‘쌍경’은 ‘강물과 달이 함께 밝은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는 뜻이다. 쌍경당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영조 때인 1757년에 후손인 월암(月菴) 이지복(李之復)이 복원했다. 쌍경당 축담 옆으로 안채로 통하는 솟을대문이 이어진다. 안채에는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고 대문은 잠겨 있다. 그 곁으로 협문이 나 있고 다시 이어지는 높은 축담 너머 제헌(霽軒)의 지붕이 보인다.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을 추모하여 1956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재실인가 했는데 ‘비 갤 제(霽)’자에 ‘추녀 헌(軒)’이다. 멋있어라, 비가 그칠 무렵의 추녀라니. 제헌 앞 오솔길 한 가운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더없이 그윽하고, 그 아래로부터 끝 간 데 없을 듯 솟구친 한 그루 은행나무는 아직 푸르다.  

                                제헌 앞 오솔길 한 가운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더없이 그윽하다.
                            제헌의 축담 모서리를 돌면 ‘영월간’ 위에 ‘쌍청교’ 돌다리가 놓여 있다.

오솔길은 제헌의 석축 끝에서 직각으로 꺾인다. 그 앞에 좁은 계곡이 밀양강으로 흐른다. 이태는 이 계곡을 ‘영월간(迎月澗)’이라 했다. ‘달을 맞이하는 실개천’이라는 뜻이다. 계곡 너머 가파른 벼랑 위, 층층으로 쌓은 축대와 반석을 딛고 월연대 정자가 자리한다. ‘달이 비치는 못가의 정자’다. 영월간에 놓인 작인 돌다리는 ‘쌍청교(雙淸橋)’다. ‘달과 물이 모두 맑다’는 뜻이다. 월연대를 등에 업은 반석은 ‘탁족암(濯足巖)’이다. ‘맹자’에 나오는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탁하면 발을 씻는다’는 구절에서 유래하는데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의 처신 방법과 인격 수양에 달려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탁족암 반석에 ‘한림이공대(翰林李公臺)’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옛 사람의 유유자적이 눈에 보인다. 

 

                       쌍청교 아래 영월간을 따라 밀양강변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다.
                                 탁족암 반석에 ‘한림이공대(翰林李公臺)’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높은 축대 앞에서 올려다본다. 좁고 낮은 협문 속에 월연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인 1866년 중건되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이다. 한 가운데에 방이 있고 사방으로 마루를 둘렀다. 흙돌담이 정자 가까이 바짝 다가와 에워싸고 있다. 이는 이태의 시대부터 그러하였던 것일까 훗날의 장치일까. 은일과 동시에 답답함이 있는데, 또 가만 담장이 없다 생각해 보면 허전함과 불안이 생기는 듯도 하다. 마루에 오르면 담장 너머로 밀양강이 내다보인다. 보름달이 뜨고, 달빛이 강물에 비쳐 기둥을 이루는 것을 ‘월주경(月柱景)’이라 한다. 옛 사람들은 매월 월주가 서는 보름마다 이곳에서 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영월간의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광활한 밀양강변이다. ‘백송보는 곳’ 안내가 있다.
                 월연대 아래 벼랑을 뒤덮은 수풀 가운데 한 그루 가느다란 백송이 수직으로 서있다.

월연대 반석의 가장자리 위에 ‘백송’ 안내판이 있다. 위태위태 올라 보았으나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강변 공원 쪽으로 가야 되요. 두 그루 있었는데 지금은 한 그루.” 쌍청교 아래 좁은 길을 따라 내려서면 강변의 대지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월연대 아래 벼랑을 뒤덮은 수풀 가운데 한 그루 가느다란 백송이 수직으로 서있다. 저 홀로 희다. 월주처럼 희다. 벼랑 위로 무거운 회색빛 구름이 느리게 움직인다. 밀양 12경 중 하나가 ‘연대제월(淵臺霽月)’이다. 비갠 후 월연정 위로 떠오른 밝은 달, 오늘이 ‘연대제월’의 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곧, 소나기가 왔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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